영주 두월리 마애약사여래불이른 아침 햇살 듬뿍 머금은 모습 ‘환희심’일어 |
한 차례 비가 뿌리고 바람이 몰아쳤는가하면 싸락눈까지 내리더니 꽃샘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매서운 추위가 들이 닥쳤다. 새벽 들녘엔 지난밤의 추위를 말해 주는 듯 서리가 덥수룩하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어느새 곱아들어 자꾸만 주머니를 파고 든다. 어디에 계신가. 이렇듯 찾아 나선 부처님이 혹여 마당 가운데에 피어있는 매화를 찾아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는 꼴은 아닌지, 길 나설 때 마다 조심스럽다. 외물(外物)에 혹하여 마음을 놓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나 같은 범부가 그것을 능히 다스릴 줄 안다면 그 아니 환희로운 일이겠는가. 오늘도 마음을 다 잡고 나섰지만 이곳 영주에 다다르니 그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불법에 흠뻑 젖었기 때문이다. 영주 땅 어느 곳을 지나간들 부처님을 만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누가 그 길을 알면 나에게 좀 가르쳐 주기 바란다. 절집은 차치하고라도 산중이나 논배미 그리고 길섶을 지키고 있는 마애불만 모두 8구에 이르기 때문이다. 가흥동 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과 그 곁에서 지난 2003년 여름 홍수로 드러난 마애여래좌상, 신암리 마애삼존석불(보물 제680호), 흑석사 마애삼존불상(문화재자료 제355호), 두월리 약사여래석불(문화재자료 제223호), 월호리 마애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243호) 그리고 지난주에 소개했던 강동리 마애보살입상(문화재자료 제474호)과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휴천동 경북전문대 정문을 지나 오른쪽 산기슭에 조선시대에 새긴 마애불이 있으니 어찌 불법에 젖어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진설명> 두월리 마애약사여래석불은 수미단 위에 앉으신 부처님을 표현했다. 마애불에서의 이러한 표현은 다른 곳에서 찾을 길이 없는 희귀한 경우이다. 그중 오늘 찾아 가는 곳은 두월리의 부처바위이다. 지금은 부처바위 위로 볼 성 사납게 푸른색의 지붕을 씌워 놓은 덕분에 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불과 3년 전만해도 그렇지 못했다. 몇 차례 마을길을 더듬고 난 다음 반드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야 그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두월리 마애약사여래불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했어도 부처바위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 금세 골짜기를 가리키곤 했었다. 부처바위가 있으니 그 골짜기는 당연히 부처골이다. 아직 부처골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 다만 부처바위에만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들기 시작했으니 자동차는 길가에 세워 두고 한 달음에 그곳으로 올랐다. 서두른 까닭은 햇살이 그립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 막 산을 넘기 시작한 태양이 더 높아지기 전에 부처님 앞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보주 든 왼손은 있으나 오른쪽은 팔꿈치까지 상반신만 새겨져 ‘독특’ 사실은 며칠 전 예전 생각을 하고 느지막하게 찾았다가 고약한 경우를 당했었다. 부처님이 가장 또렷하게 보이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 시간에 맞추었었다. 동북향으로 앉으신 부처님이기에 이른 아침이 아니면 그윽하게 햇살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대하기가 쉽지 않으니 때를 맞춘다고 한 것이 그만 늦은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은 늦지 않았으나 보호각이랍시고 씌워 놓은 지붕 때문에 마치 내가 선글라스를 낀 채 부처님을 대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애불은 푸른색의 지붕 때문에 온통 푸른빛이 젖었는가 하면 지붕의 철골로 인해 생긴 그림자가 짙게 지나가고 있었으니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었다. 마애불이 빛과 가장 조화로울 때를 맞추어서 살피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물론 그늘이 드리웠다고 해서 부처님이 그저 바위 덩어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을 새길 당시 향(向)을 정하고 계절에 따른 빛의 비침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그 시간을 찾아내어 마주 대하는 일이야말로 비로소 마애불이 지니고 있는 진면목을 온전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부처님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다. 소소한 돌의 질감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자연환경까지도 그때가 되어야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불교미술로의 완성도 뿐 아니라 종교성까지도 극대화되는 시간인 것이다. 마애불은 대개 움직이지 못하는 부동산이다. 그러니 움직이지 못하는 부처님의 환희로운 모습을 대하려면 내가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오늘은 다행이다. 서두른 때문인가. 아직 낮게 떠 있는 태양 덕분에 마애불은 이른 아침 햇살을 듬뿍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마뜩치 않았다. 눈 깜짝하고 나면 달라질 만큼 순식간에 변하는 새벽 태양의 높이 때문에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아니다 다를까. 30분쯤 지나자 부처님은 머리로부터 또 다시 푸른빛으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윽하게 부처님을 마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살펴 본 부처님의 모습이 독특하다. 상반신만 새긴 것이 그렇고 보주를 든 왼손은 있으나 오른손은 팔꿈치까지만 새겨지고 그 아래는 없기 때문이다. 지나온 세월 때문에 문드러진 것이 아니라 아예 새기지 않았다. 물론 다리 또한 새겨져 있지 않다. 나라 안의 마애불 중 이런 양식을 지닌 것은 보지 못했으니 눈은 더욱 커졌다. 하반신을 새기지 않은 대신 오른손 팔꿈치께서 부터 왼손 팔꿈치로 이어지는 선상에 연봉의 간략한 표현이 잇대어 새겨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의 바위는 다듬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뾰족하게 삼각형으로 표현된 연봉이 솟아오른 그것은 아무리 봐도 수미단 맨 위쪽 끝 부분을 장식한 것이지 싶었다. 곧, 마애불에서 흔히 보는 연화좌 대신 수미단과 같은 불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부처님이 앉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새기지 않은 오른손과 다리는 그 단에 가려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니 섣불리 판단하여 어눌한 조각이라고 대충 지나치며 그것을 헤아리지 못한 지난날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것은 치졸하거나 부족한 조각이 아니라 오히려 세련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보는 연화좌 대신 수미단 같은 불단 조성 그 위에 부처님 표현… 왼손 또한 전체가 새겨진 것이 아니라 팔꿈치 아래부터 손목까지는 없으니 무엇에 가려져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부처님이 새겨진 면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뒤로 젖혀져 있다. 그러니 이 마애불 앞에 와서 엎드려 참배하면 마치 법당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낮은 곳에서 우러러보듯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법당을 지을 여력이 없는 사부대중들이 마애불을 조성하며 아담한 바위 하나에 법당과 부처님을 함께 조성한 것은 아닐까. 비록 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처럼 지극한 아름다움이 아니면 어떠랴. 이렇듯 하늘을 닫집으로, 또 땅을 법당마루로 삼고 온 산의 키 큰 나무들을 후불탱화로 두른 산기슭 논배미에 계신 부처님에게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단순한 수미단이 썩 어울리는 것을 말이다. 푸른빛에 덮여가는 부처님을 뒤로하고 내성천을 따라 찾아 간 곳은 흑석사(黑石寺)이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저만치 높은 곳의 석조여래좌상과 마애삼존불이 눈에 들어왔다. 채색을 했던 듯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마애삼존불은 저 높은 곳에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두월리 약사여래불이 뒤로 젖혀진 듯 위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마애삼존불을 탱화로 삼은 듯 앞에 앉아계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은 먼 산을 바라보는 듯 젖혀진 느낌이다. 그것은 마애삼존불의 자리는 본디 그 자리이지만 석조여래좌상의 자리는 본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들 이 마애삼존불을 대하면서 친근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그것은 비록 한 걸음에 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시지만 그 높이만큼 몸을 숙여 지순한 얼굴로 그윽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려이다. 나보다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여 그리 새긴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충실히 따른 장인의 솜씨일 것이다. 앞 서 말했듯이 마애불을 새기는 바위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던가. 산비탈 높은 곳에 있는 바위, 그것도 경사진 면에 부처님을 새기며 그것을 바라 볼 대중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서 새긴 안목은 가히 탁월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돌을 쪼는 장인의 손끝 솜씨만은 아니다. 손끝의 솜씨는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비록 마애불의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시대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저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마애불을 새길 당시의 그 마음들을 헤아리지 못하면 내 안목이 뒤 떨어진 것이다. 그 눈과 마음으로는 예술적 완성도조차도 따지지 못할 것이 아닌가. 나는 아예 위로 오르지도 않았다. 아래에서 우러러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가득 차올랐으니 굳이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종각 옆에 있는 석물에 눈길이 갔다. 혹 그것이 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의 광배가 아닐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운데를 오목하게 다듬은 것이며 불두가 닿는 부분의 광배를 둘러싸고 있는 당초문 그리고 끝부분을 에워 싼 화염문들이 영락없는 광배였으며 그 생김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시멘트 바닥에 박혀 있을 뿐 부처님은 간 곳 없으니 어디에서 부처님을 찾을 것인가. 스쳐가는 바람에게 물어 봤더니 아본불유(我本佛有) 본래성불(本來成佛)이란다.기록문학가 ■ 영주시 흑석사 마애삼존불 정사각형 가까운 상호…고려시대 조성된듯 문화재 자료 제355호로 지정된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의 흑석사 마애삼존불은 불긋한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위의 전체 높이는 570cm, 너비는 320cm의 큰 바위에 새겼으며 본존불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상호를 하고 있으며 삼도가 생략되었지만 머리에 육계는 두툼하게 솟았다. 양 협시불은 모두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두광은 모두 붉은 색으로 그려 놓았다. 또한 협시보살의 얼굴은 본존불의 어깨에 기댄 것처럼 보이며 몸의 윤곽 또한 본존에 가려 있다. 곧 중첩된 표현이며 이는 불화(佛畵)에서 보이는 기법이다. 본존불이나 협시보살 모두 어깨 아래의 표현은 제대로 살필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조성연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독특한 구성과 배치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까지 그 조성연대가 올라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설명> 흑석사 마애여래삼존불과 보물 제681호인 석조여래좌상. 마애삼존불 앞에 계신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681호이며 극락전에는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으며 그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은 국보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 흑석사 종각 옆에 있는 불상의 광배. ■ 두월리 마애약사여래 특징 문화재 자료 제233호 지정 문화재 자료 제233호로 지정된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의 마애약사여래석불은 마애약사여래좌상으로 존명을 고치는 것이 옳지 싶다. 지금껏 아랫부분을 조각하지 않았다거나 불분명하다고만 했지 그것이 수미단 위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수미단 위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표현한 마애불은 없으니 그 희귀함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머리에 비해 너무 큰 육계와 양쪽의 길이가 서로 다른 귀의 표현들이 어눌하긴 하지만 상반신의 표현은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광은 세 겹,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다. 왼손에 보주를 들었으며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의 전체 높이는 250cm이며 불상은 높이 95cm 너비 89cm이다. 양식으로 봐서 조성연대는 고려 초에 가깝지만 통일신라 말기까지도 거슬러 갈 수 있지 싶다. ■ 가는 길 영주에서 안동방향 5번 국도 따라가야 중앙고속도로로 영주까지 간 다음 영주 시내에서 안동방면으로 5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운문교차로에서 935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봉화.상운방면으로 가다가 두월교를 건넌 후 괴한고택을 지나면 곧 오른쪽으로 두월1리 경로당이 나오고 300m가량 직진하면서 왼쪽 먼 산을 살피면 푸른빛의 돔이 보인다. 시내에서 20분 거리이다. 흑석사는 다시 두월교까지 되돌아 나와 다리를 건너자마자 내림삼거리에서 우회전, 내성천을 따라 내림리 마을길을 지나 직진하면 흑석사이다. 두월리에서 20분 거리이다. [불교신문 2309호/ 3월14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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