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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동 마애삼존석불/ 영주 월호리 마애여래좌상

비록 눈 멀었지만 천년 넘게 생명 넣은 부처님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되새겨 읽는 시가 있다. 스님들과의 교류가 깊어 증승시(贈僧詩)를 누구보다 많이 남긴 이규보의 ‘꽃샘바람(妬花風)’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모진 꽃샘바람이라도 그를 미워 할 일 없다고 한다. 바람이란 꽃을 피우게도 하는 것이지만 또 떨어지게도 하는 것일 뿐 이미 피어 있는 꽃을 위해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바람은 만물에게 고루 펼쳐져야 하는 것일 뿐 어느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노래한다. “꽃 피는 것도 좋지만 / 꽃 지는 것 또한 슬퍼할 게 뭐랴. / 피고 지는 것 모두가 자연인데 / 열매가 있으면 또 꽃을 낳는 것이야”라고 말이다.

마애불의 초기 양식을 잘 보여주는 가흥동 마애삼존불이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독존 마애여래좌상은 2003년 6월 장마로 이 세상에 다시 현신하신 부처님이다.

선(禪)의 경지에 다다른 그는 바람이란 만물에게 후하거나 박함이 없이 고루 미쳐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불법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못된 눈은 분별에 익숙해 있다. 겨우 이것저것 가리고 따지는 눈을 타이르고 다스려 순례자의 발길 뜸한 부처님을 찾아 골골샅샅 잼처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또 투덜거리기 일쑤다. 두월리 마애약사여래석불을 찾아 갈 때에도 갖은 심통을 부리며 푸른빛을 빚어내는 보호각 아래로 빛이 들어오는 시간을 택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잠이 깨자마자 부리나케 월호리로 달려가서 부처님 앞에 섰으니 말이다.

“돌을 천조각 다루듯…” 섬세함 극치 보여

전체적인 중량감과 빚어내는 조화 ‘신비’

그런데 퍼뜩 미친 생각이 있었다. 구태여 기를 쓰고 그 시간을 맞추어야 할까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 만났던 부처님도 부처님이요, 푸른빛을 덮어 쓴 부처님도 부처님 아니지 않으니 아예 푸른빛에 싸여 있는 부처님을 대하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이규보의 말마따나 꽃 피는 것도 좋지만 지는 것 또한 슬퍼할 일 아니며, 열매가 있으면 또 꽃이 피는 법이라고 하니 그 말을 따른 것이다. 푸른빛에 싸인들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해가 높이 솟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찾아 온 부처님은 수 년 전 희미한 얼굴에서 눈과 코 그리고 입을 살피며 만났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때에 비해 빛에 따라 드러나는 조각의 깊이나 돌의 질감마저도 두루뭉술해 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계신 분이 부처님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색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으로는 쉽지만 여간해서 마음을 허용하기가 녹록지 않은 일이다. 자꾸만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말이다. 아예 예전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면 모르겠지만 현재가 예전만 못하니 그 마음 누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모든 것 젖혀 두더라도 보호각 때문에 부처님이 옹색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모셔진 부처님처럼 오로지 부처님의 모습만 봐야 할 뿐 푸른 하늘과 함께 혹은 뒤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나무들과 함께 대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이다.

마애불의 존재감 중 가장 큰 것은 야외에 있는 바위에 부처님을 새겼다는 것이다. 곧 자연 속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며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은 조감(鳥瞰)을 해야 할 일이지 관견(管見)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각 덕분에 마치 대롱을 통해서 보듯이 부처님만 보고 돌아서야 하게 생긴 것이다. 그 때문에 두월리는 물론 월호리 조차도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성이 배제된 문화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보호각은 부처님이 비를 맞지 않게 했을지언정 그것부터가 이미 부처님을 자연으로부터 차단한 것과 다르지 않다.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보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지만 있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빼어난 안목이다. 덧보태면 보탤수록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마련이다. 무엇이든 지나 친 것은 덧대지 않은 것만 못하지 않던가. 두월리와 월호리의 마애불이 이렇듯 푸른색의 지붕을 덮어 쓴 것은 부처님을 오로지 문화재로만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화재 이전에 부처님이며 당연히 그것이 지닌 종교성이나 그 종교성으로 담보되어 빚어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배려도 놓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오늘도 있는 대로 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심술만 부린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보다 먼 미래를 생각하며 국가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할 일이다.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사방불인 보물 제860호인 마애삼존석불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푸른빛을 내는 투명한 아크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전각의 형태를 한 보호각의 살창은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와 너무도 바투 붙어 있다. 그러니 가까이에서나 멀리서나 한눈에 조망하기도 어려울 뿐 더러 해가 좋은 오전에는 살창의 그림자가 부처님에게 올라앉고 오후에는 그늘만 지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그 아름다운 자태를 제대로 살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보호를 명목으로 한 차단이며 폐쇄에 가까운 것이다. 보호의 대상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어찌 보호이겠는가.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대대손손 보존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는 것은 곧 내가 아름다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이미 아름다워진 나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 또한 아름답지 않을 리 없으니 세상이 어찌 빛나는 곳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이미 아름다운 것들을 오히려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저 소홀히 여기고 넘기기에는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그만 발길을 돌렸다. 답답한 보호각에 갇힌 부처님을 뵈었으니 이제 푸른 하늘을 닫집 삼아 계신 부처님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주 시내를 흐르는 서천(西川)을 따라 찾아 간 가흥동 마애삼존석불, 그 앞에 서자마자 가없는 아름다움에 말을 잃고 말았다. 눈은 비록 훼손되었지만 그것이 바위 전체에서 풍겨나는 신성성과 예술성에 흠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절로 머리가 숙여졌던 것이다. 그것은 바위에 생명력이 있는 것과도 같다. 대개 사람들이란 생명이 없는 사물에 대하여 머리를 숙이는 경우는 드물다. 산을 오르거나 들판을 걷다가 천년이나 된 나무를 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지지만 그 보다 더 오래되었을 우람한 바위를 보면 그저 기이한 형태에 감탄한 할 뿐 머리는 숙이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내가 이 거대한 바위 앞에 와서 머리를 숙인 까닭이 말이다. 마애불이란 죽어있는 바위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인류의 출현과 함께 태동된 초기의 신앙대상으로는 바위가 으뜸이었다. 원시 고대사회의 암각화가 그 흔적일 것이며 암석신앙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주목받았던 신앙의 한 형태였다. 이곳 가흥리 마애삼존불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존불이 조성되어 있는 덩치 큰 바위의 맨 아래 왼쪽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바위 앞에 와서 어찌 절로 머리가 숙여지지 않겠는가. 과학적으로는 무생물일지라도 암각화와 부처님이 베풀어져 있으니 이 바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펄펄 살아 움직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더구나 2003년 6월28일, 이 큰 바위는 또 한분의 부처님을 토해 냈으니 그 아니 기이한 일인가. 장맛비에 무너져 내린 바위 더미 속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마애여래좌상이 나올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한달음에 달려간 기억이 새롭기만 했다. 이제 그 부처님은 삼존불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 계시니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예경을 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무심히 앉아 마애삼존불을 우러러보다가 앞을 흐르는 서천을 건너 휴천동으로 향했다. 경북전문대에 가기 위해서였다. 마애삼존불에서 빤히 보이는 그 곳에 또 한 구의 마애불이 계시니 어찌 예서 쉬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표지판조차 없었다.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 아는 이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걸어 나와 수위 아저씨에게 물었다. 듣기로는 학교 안이라고 들었지만 알고 보니 학교와 붙은 야산 중턱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학교 진입로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터로 내려서자 관수대(觀水臺)라는 큰 바위더미가 보이고 그 바위를 에돌아 들자 호박돌을 허튼 쌓기로 올린 돌탑이 있었다. 그 앞 바위에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불두 부분은 바위 면을 깊이 파서 부조처럼 보이지만 그 깊이는 얕았고 어깨 아래로는 선각에 가까운 표현이며 전체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투박한 맛조차 없으니 조선시대의 마애불이지 싶었다.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바위 앞으로 강물이 흘렀으며 황(黃)씨 성을 가진 마을의 부자가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부처님을 새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오늘은 비록 찾는 이 없는 이 부처님 앞에 향 한 자루 사르는 것으로 예경을 마쳤지만 봄이 깊어지면 흐드러진 진달래 한 묶음으로 헌화공양 올릴 것을 약속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했다. 돌아 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서천 건너 가흥동 마애삼존불이 손에 잡힐 듯 보였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더욱 부드럽고 자비로운 모습을 한 삼존불을 이처럼 먼 곳에서 바라보니 마치 그곳이 피안과도 같았다.기록문학가

■ 월호리 마애여래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 휴천동 마애여래좌상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충실…조성은 신라말 고려초 된 듯

문수면 월호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문화재자료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50cm, 너비 240cm의 바위 동면에 새겨졌으며 불상의 높이는 95cm이다. 상호는 깊은 부조이나 육계와 귀, 두광은 찾을 수 없다. 마멸된 것이 아니라 아예 새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삼도는 뚜렷하며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왼쪽 어깨의 주름은 희미하며 복부에 서너 가닥의 주름이 보인다. 좌대 또한 바위 아래로 공간이 충분함에도 새기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생김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에 새긴 휴천동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221호인 가흥동 마애삼존석불은 시도 유형문화재 제248호인 가흥동 암각화와 같은 바위더미에 있으며 암각화는 바위더미의 하단 왼쪽에 삼존불은 최상단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삼존불은 산에 박혀있는 바위에 새긴 것이 아니라 독립된 다른 바위에 새겼다. 조각은 부조라기보다 환조에 가까우리만치 불거졌으며 연화좌에 앉은 본존불을 향해 살짝 몸을 튼 양 협시는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은 높이 330cm이며 우협시는 198cm, 좌협시 195cm이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에 충실하며 본존불 법의의 표현은 돌을 천 조각 다루듯이 매만져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렇지만 날렵함만을 강조하지는 않았으며 전체적인 중량감과 빚어내는 조화는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2003년 6월에 출토된 마애여래좌상 또한 동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높고 두툼한 연화좌 위에 또 다시 높이가 낮은 연화좌를 깔고 결가부좌로 앉은 모습이다. 수인은 삼존불의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눈 부분은 훼손 되었다. 광배는 삼존불의 좌협시와 같은 양식을 하고 있다.

보호각의 푸른빛에 젖은 월호리 마애여래좌상.

휴천동 마애여래좌상은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개인이 아들을 얻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선각에 가까우며 광배나 두광은 찾을 수 없이 불신만 새겼다.

● 가는 길

중앙고속도 북영주, 풍기 나들목으로 나가 5번 국도를 따라 영주 시내로 들어가면 가흥동 마애삼존불을 알리는 이정표들이 잘 되어 있다. 삼존불을 등지고 서천 건너 오른쪽으로 경북전문대가 보인다. 월호리 마애여래좌상은 5번국도 안동방향으로 가다가 영주소방서에서 서천을 따라 수도리 전통마을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서천을 끼고 영주환경사업소를 지나 월호교를 오른쪽으로 두고 우회전 하자마자 만나는 첫 마을길로 우회전, 200m남짓 들어가면 된다.

[불교신문 2311호/ 3월2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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