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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동면리 마애 비로자나불 입상

눈가에 미소 머금고 ‘마음 공양’ 받는 부처님

통일신라 말기 조성 추측

‘지권인’ 수인 이채로워

외진 골짜기 홀로 지키며

1000년 넘는 세월 인내



<사진설명> : 나라 안에 하나 밖에 없는 마애비로자나불 입상이다. 통일신라말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권인의 수인이 독특하다.

오랜만에 한가한 새벽 시간을 영주 부석사에서 보냈다. 연 이은 능선들이 깨어나고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시간, 무량수전 앞을 거닐었다. 남쪽에는 벌써 꽃이 피었다지만 그 소식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이른 새벽, 잠시 한기를 느끼는가 싶지만 해가 솟아오르면 이내 껴입은 옷이 부담스러워 당황스럽기조차 하니 이 무슨 일일까. 입춘이 지났으니 그러려니 싶기도 하지만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아무리 고개를 갸우뚱거려도 아직 꽃이 필 때가 아닌데 말이다.

여느 때와는 달리 늦은 아침을 먹고 게으름마저 피우며 찾아 간 곳은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미륵골에 계시는 마애비로자나불입상이다. 비로자나불이 입상으로 바위에 새겨져 있으니 나라 안에 이곳 밖에 없는 드문 것이건만 서둘지 않은 것이다. 이곳을 처음 찾았던 칠년 전, 당연히 종종걸음을 치며 새벽같이 부처님 앞에 섰었다. 그러나 햇살은 비쳐들지 않았고 콩밭을 살펴보던 할머니 한 분이 난감해하는 나를 보더니 아침 열시나 지나야지 해가 든다고 했다. 그때라야 통통한 부처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으니 때 맞춰서 다시 오라는 것이다. 부처님 새겨진 바위 앞의 밭주인이니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통통한 얼굴의 부처님이라,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마땅치 않아 다음해나 되어서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 말대로 시간을 맞추어 열시 무렵에 찾아 갔으나 햇살은 커녕 부처님은 짙은 그림자에 싸여 있을 뿐 햇살은 머뭇거리며 도무지 비쳐 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시간 가량을 기다리다가 일정에 쫓겨 안동으로 걸음을 옮긴 그 해에도 다시 찾지 못했다. 그리곤 올해에 또 다시 걸음을 나눈 것이다. 그러나 올해도 처음이 아니다. 하필이면 부처님 뵈러 가는 길에 배가 고파 재산면소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먹고 갔더니 그만 해는 넘어가고 부처님은 밋밋한 모습일 뿐 통통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침 그날은 섣달 보름이었다. 불과 보름 전이었을 뿐이지만 그날은 무지막지하게 추웠으며 골짜기로 몰아치는 칼바람은 밖으로 꺼내 놓은 손을 금세 얼어붙게 만들었다. 계곡물은 위에 올라서서 쿵쿵거리며 굴러도 꺼지지 않을 만큼 땡땡 얼어있었다. 그날도 그만 돌아서려던 참에 그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타지 사람이라고는 찾아들지 않는 한가하고 외진 골짜기인 탓인지 부처님 근처를 서성거리는 내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마주쳤지만 그니는 몇 년 전의 면식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부처님 뵈려고 서울서 왔어요, 할매는 내가 몇 년 전에 본 적 있는데…”라며 말을 던졌지만 “그래, 나는 생각이 잘 안 나니더, 그란데 아재요, 저거는 부처님이 아이고 미륵님이라요.”

금씨 할머니 ‘단’ 만들어 놓고

정화수ㆍ향공양 올리며

가족 건강 안녕 발원

주민들은 미륵불로 여겨
그니는 구태여 미륵님이라는 호칭을 강조하며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나를 반박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할매요, 미륵님하고 부처님하고 차이가 있어요. 그거 좀 가르쳐 주소. 난 암만 봐도 모리겠네”하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그니는 잠시 고민 하는 것 같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부처는 절에 있는기고 미륵은 내 마음 속에 있는기라. 여 있는 이 분은 내가 일로 시집오고 난 담부터 줄창 섬기고 있으이 내 마음 속에 부처님 아이래, 내가 전에는 이짝에 가마 있는 청량산에 있는 절에 댕깃다 말이라. 그란데 이 미륵님 섬기고 부터는 절에도 안 간다. 인자 나이도 많아 그까지 가기도 힘들고 이 미륵님이 다 잘 돌봐 주시는데 갈 필요가 있겠니껴 어데.”

“미륵님이 할매 집안 잘 돌봐 주시던기요.” “그라마, 이 미륵님 아이마 우리 자슥들을 우예 키왔을꺼니껴, 이만큼이라도 사는 기 다 미륵님 덕분이라, 내가 여 옆에다가 칠성단도 안 모싯나. 인자 산에 있는 절에 가도 모하이 여다가 이래 모시 놓고 초하루하고 보름날 하고 새북에 나와가 집안 잘되고 자슥들 모두 잘 되라꼬 빌고 안 그라니껴.” 사실 부처님 곁에 누군가가 단을 만들어 놓고 정화수 한 그릇, 향 한 자루 그리고 촛불을 밝혔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 이게 할매가 이래 단을 만들고 섬기는 거구나, 에이 좀 깨끗하이 해 놓고 섬기지 지저분하이 이기 뭔기요.” “어데, 오늘이 보름 아이니껴, 오늘 새북에 나와서 물 떠 놓고 그랬는데 날이 춥어가 얼어붙은 기라.” “아! 저기 할매가 해 놓은기구나. 난 또 마을 사람들이 너도 나도 다 삼기는 건 줄 알았더니…” “어대요, 우리 집이 저 보이는 파란 지붕 저기거든, 그라이 내만 섬기지 마을 사람들은 여 오도 안 해요. 외지 사람들이 간혹 와서 징도 치고 해 대는데 내가 보고 있다가 그런 사람들 오마 전부 못하게 하고 쫓까 내뿌지.”

더러 무속인들이 자신들의 신체로 삼으려고 그렇게 하는 모양이었다. “할매가 무슨 힘으로 그런 사람들을 쫓아요.” “여가 내 밭 아이래요, 그러이 못 들어오게 하마 누군들 들어 올 수 있겠니껴. 어대, 아재도 내가 여서 나가라카마 나가야지 별 수 없는기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니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성씨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니 올해 일흔 한 살이며 금씨란다. 봉화와 이웃한 영양군 일월면에서 동면리로 시집 와 줄곧 이 골짜기에서 살았으니 50년이 넘었단다. 처음부터 부처님 옆에 산 것은 아니었고 더 깊은 막다른 곳에 살았지만 면소나 읍내에 나가려면 언제나 부처님 앞을 지나가야 하니 그때마다 고개 숙여 집안이 태평하도록 빌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부처님 앞 밭 주인이 떠나자 냉큼 그 집과 밭을 사서 이사를 해 여태 부처님 앞의 콩밭을 가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밭을 사고나이 얼매나 마음이 좋은 지, 매일 새북마다 나오고 안 그랬니껴, 그래 어느 날 새북에는 보마 미륵님 얼굴이 환하이 웃고 계신다 말이래, 그라마 그날은 뭔 일을 해도 다 잘되고, 별로 얼굴이 안 좋으마 고마 뭔 일이 생기도 생기고 그랬으이 참 신통방통한 미륵님이라, 저 미륵님 아이랐으면 우리 식구들 이래 살도 모하고 우리 자슥들 다 시집 장가들어 편하이 살도 모했을끼라요”라며 입이 마르도록 부처님 자랑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할머니와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그니가 “해가 반짝 들마 통통한 미륵님 얼굴이 얼매나 복스러운지 우리가 그 복 받고 사는 기라요”라며 뻐기는 듯 말하는 부처님 얼굴을 또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렇게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찾아가는 길이다. 아예 정오 무렵부터 미륵골의 우람한 바위덩어리 근처를 거닐며 기다렸다.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이건만 골짜기에는 봄기운이 넘실거렸고 그토록 땡땡 얼었던 계곡의 얼음도 힘을 잃은 모습이 역력했다. 한 시간 남짓 서성거렸을까, 이윽고 부처님에게로 햇살이 들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말한 대로 볼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부처님, 거기에다가 마치 말이라도 할 것 같은 입술, 그리고 눈가에 알듯 모를 듯 옅은 미소까지 머금었으니 그 아니 환희로웠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 모습에 취한 것일까, 시간은 금세 흐르고 어느새 부처님의 모습은 또 다시 밋밋해져가고 있었다.

그 순간은 찰나였다. 화살보다도 빨랐으며 번개와도 같았다. 섬광이 번쩍거리듯이 지나가버린 그 모습은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았지만 그 연속적인 모습은 내 뇌리에 남았다. 그늘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던 그 모습은 정녕 말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으며 경외의 마음이 절로 일어나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이렇듯 순례자들의 걸음이 끊어진 곳의 부처님들을 대할 때는 그곳에서 머물러야 한다. 순간이 모여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시간들을 샅샅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교감이다. 돌에 새겨진 부처님이라고 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듣느냐 못 듣느냐는 부처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진리의 흐름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의 말씀 또한 멈추지 않는다. 비록 막다른 골짜기의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이라고 할 지언 정 어찌 말씀을 거두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은 내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법, 어찌 부처님의 말씀을 귀로만 들으려하겠는가. 그 말씀은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거늘, 금씨 할머니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으며 불교미술이라고는 그 언저리조차 구경하지 못한 분이다. 그러나 그니의 마음은 언제나 부처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으며 그 믿음 하나로 부처님을 섬기며 스스로 말씀을 들은 것이다.

넌지시 그니에게 물었었다. 비로자나불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런기 뭐래, 그것도 부처님이니껴, 난 그런 거 몰라, 부처님은 다 같은 부처님이고 내가 마음속으로 믿으마 그 뿌이지 안 그러니껴”라고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물론 나는 “그럼요. 할매가 믿으면 저 나무도 부처님이고 돌멩이도 부처님이지요”라고 했다. “하모, 뭐라도 내가 먼저 믿음을 주마 그것들도 도로 내한테도 베푸니더, 그라이 내 마음속에 부처고 미륵이지 뭐 딴 거 없니더”라며 “고마, 편히 가시이더”라는 말을 남기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미륵골을 내려오면서 적어도 금씨 할머니가 살아 있는 한 미륵골의 마애비로자나 부처님은 얼마나 행복 하실까 싶었다. 나라 안 후미진 곳에 계신 부처님들 중 그만한 마음 공양 받는 부처님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문학가


비로자나불 입상으로는 ‘유일’
<사진설명> : 바로자나불이 새겨진 바위는 너비가 100m, 높이가 30m에 달한다.
■ 특징

봉화 동면리 마애 비로자나불 입상은 경북 유형문화재 제 273호로 지정되었으며 봉화군 재산면 동면 1리의 소내골을 지나 미륵골 들머리에 있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는 굵은 자갈과 모래가 섞인 사암류이며 전체 크기는 높이가 30m가량 되며 너비는 100m에 달한다. 부처님 또한 작은 크기가 아닌 키가 230cm에 달하지만 오히려 작아 보인다. 대개의 비로자나불이 좌상인 반면 입상인 점이 특이하며 지권인(智拳印)을 한 수인 또한 이색적이다. 왼손 손가락 전체를 오른손으로 살포시 감쌌기 때문이다.

상호는 풍만한 느낌이 들 정도이며 소발로 표현된 육계는 낮고 두툼하다. 목에는 삼도가 굵게 표현되었으며 머리 주위의 두광 또한 굵은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목 아래로는 통견의 법의와 지권인을 한 수인 까지만 돋을새김으로 새겼을 뿐 그 아래는 선으로 형식적인 처리를 했다. 두광 밖으로 신광(身光)이 있지만 그 또한 선으로만 표현을 했으며 발은 깨진 탓인지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서부터 가슴께인 수인까지 이어지는 곳에만 집중적으로 정성을 기울인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상대적으로 복잡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는 고려시대에 주로 보이는 마애불의 조성기법이지만 동면리 마애비로자나불의 상호는 분명 비로자나불이 활발하게 조성되던 시기인 8세기 말부터 9세기에 이르는 통일신라 말기의 그것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입상이라는 점이다. 나라 안에 있는 비로자나불 중 서 있는 경우는 없으므로 이곳이 유일하여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짐작된다.



가는 길

중앙고속 풍기나들목 나와

소내교 지나 1.5km 직진

재산면은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에서 50km 남짓하다. 풍기 나들목에서 우회전하여 1km남짓 영주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신전교차로에서 36번 국도로 우회전, 도천삼거리에서 다시 청량산방향 35번 국도를 타고 가면 된다.
가는 길에 봉성면과 명호면을 지나게 된다. 재산면소에서는 재산중학교 앞을 지나 4km 가량이면 동면리 소내골 들머리에 닿는다. 소내교를 지나 마을 안길로 1.5km 가량 직진하면 길 왼쪽에 큰 바위가 있으며 문화재 안내판이 보인다.

[불교신문 2305호/ 2월28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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