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오전리 석조아미타여래좌상·봉성리 석조여래입상뭇 사람 발길 끊긴채 자연을 도반삼은 부처님 |
며칠 전, 가까이 지내는 소설가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형! 눈이라도 왔으면 좋겠네. 마치 벚꽃 잎 떨어지는 것처럼…”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덕지덕지 내려앉은 일상의 피곤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음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처럼 아름다운 정경은 아닐지라도 난분분 흩어지는 눈을 본 적도, 퍼붓듯이 쏟아지는 눈보라 속을 걸어 본 기억도 없건만 기어코 올해 겨울은 떠나려는 것 같다. 해가 돋기 전부터 부처님 곁에 앉아 동살을 기다리는 나에게로 다가 온 바람이 때 아니게 훈훈한 봄기운을 묻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도 스스로 겸연쩍은 것인가. 저만치 떨어진 암자로 훌쩍 달려가더니 풍경에 매달려 호들갑을 떨고 있을 뿐,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손돌바람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매서웠던 그가 아니었다. <오전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이윽고 지그시 감은 눈에 어른어른 안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햇살은 푸른 새벽기운을 떨쳐내느라 분주하고 능금나무의 거뭇한 가지들조차 반짝이며 빛나는 찬란한 새벽이었다. 햇살을 등지고 앉아 눈을 뜨자 부처님뿐 아니라 온 산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토록 찬란한 새벽을 그저 몸으로만 느낄 뿐 바라보지는 못한다. 머리를 잃어버린 단두불(斷頭佛)이기 때문이다. 천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지켰을 것이건만 언제부터였는지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앉아 계신 것이다. 잘린 목은 바람이 어루만지고 비가 적셔주며 간혹 추운 겨울이면 눈이 두껍게 쌓일 뿐일 테니 그저 부처님을 바라보기보다 성큼 곁으로 다가가 귀엣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밤새 맑은 별빛이나 교교한 달빛이 머물다 갔을 터이지만 그들이 밤의 정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지는 못했을 터, 비록 귀가 없을 지언 정 마음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통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향 한 자루 사르고 세월의 더께가 이끼로 내려앉은 그의 무릎에 기대어 조곤조곤 눈앞에 펼쳐진 정경을 전해 드리기 시작했다. 더러 이른 잠을 깬 작은 새들이 추임새를 넣었으며 눈치 빠른 바람은 어느새 잦아들었는지 뎅그렁뎅그렁 풍경을 흔들곤 했다. 불상앞 빈터에는 와편 몇조각만 남아 길손 반기고… 몸과 머리를 다른 돌로 조성한 巨佛 ‘부조화의 조화’ 햇살을 받아 부처님 앉으신 자리 연꽃으로 피어나고 겹겹이 주름진 법의자락이 선명하게 드러날 즈음, 푸른 하늘에도 드문드문 구름이 피어났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허튼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머리가 눈에 보이지 않을 지언정 정녕 잃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로 하얗게 상처로 남은 자리에 머물다 가는 것 모두 불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곳에 머무는 것, 자연 아닌 것 없으니 그는 단두불이 아니라 자연을 불두로 삼은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온몸에 깃든 이끼를 털어내지 못한 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그대로 자연이었다. 그 모습은 스스로 자연이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수행에 몰두한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마치 자연을 무문관 삼아 목숨을 건 수행을 하다가 어느덧 스스로가 자연이 되어버린 줄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막 봄바람 불기 시작했으니 곧 능금나무 꽃이 피지 않겠는가. 골짜기는 연분홍 물결로 넘실댈 것이며 가을이면 무르익은 능금향이 그 어떤 향화(香花)보다도 짙게 부처님을 뒤덮을 것이다. 그때면 비록 비바람에 닳아버린 몸이 더욱 남루해질 지언정 그의 모습은 보다 더 당당해지리니 향 대여섯 자루 사를 참이 지나고 그만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못내 아쉬워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보면 그는 마치 한 그루 고목과도 같았다. 그러니 어찌 그가 미쁘지 않겠는가. 능금이 빨갛게 무르익을 무렵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북지리의 지림사 앞을 지나쳐 봉성면(鳳城面)으로 향했다. 주름진 법의 ‘선명’ 면소재지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한가했다. 한때 봉화는 봉성현이었으며 봉성은 고려 때만 하더라도 봉화의 중심지였다. 조선말 순종 1년인 1907년에 봉성에서 춘양, 그리고 1914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군청을 옮겨갈 때까지 말이다. 봉화 향교가 봉성면에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현감이 머물렀던 관아는 면사무소가 들어선 탓에 그 흔적이 가뭇없어 찾기도 쉽지 않지만 1738년, 현감이었던 이광직(李匡直)이 세웠다는 관아의 문루인 봉서루(鳳棲樓)는 자리를 옮겨 아직 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지금 봉서루가 있는 자리는 장터거리이다. 이제 더 이상 장은 서지 않지만 이곳에서 2km 남짓한 곳에 석조여래입상이 있으니 자동차는 세워 두고 따사로운 햇살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저자거리가 있었던 때문에 재장골(在場谷)이라 불린 골짜기는 봉성면과 붙은 명호면 양곡리로 넘어가는 옛길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장이 서는 날이면 장돌뱅이를 비롯하여 장을 보러 오가는 뭇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길목에 부처님이 계신다.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흔적은 와편 몇 조각으로만 남았을 뿐 서너 번이나 걸음을 하며 뒤져 봤지만 밭으로 개간이 되어버려 주춧돌 하나 찾지 못했다. 마을 어른들에게 여쭈어도 “미륵재 넘어가는 고개 만디이 있는 부처 말이라요. 그게 절이 있었다고는 카던데, 우리도 보도 모했고, 웃대도 보도 모했으이 뭐라 할 수가 없니더”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두어 구비를 돌며 얕은 오르막을 이십 분쯤이나 걸었을까, 어르신들 말대로 미륵재 고갯마루에 조금 못 미처 검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한 눈에도 거대하고 우람하다. 바위 전체가 부처님이며 머리는 다른 돌로 만들어 올려놓았다. 앞으로 다가가 마주 대하며 우러르니 투박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것이 아무리 봐도 묘하다. 무엇이라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부조화가 이루어 낸 조화로움이 풍겨 나왔다. 맞은 편, 절이 있었다는 곳으로까지 가서 바라보고, 부처님 뒤로 올라가 부처님 눈길 닿는 곳을 바라보고, 또 미륵재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짓을 되풀이하며 그 앞을 서성거렸다.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이곳에 부처님이 계시는 까닭을 가늠할 길이 막연했던 것이다. 그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당우가 사라진 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은 마치 고아들이 겪는 비애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문헌에 글 한 줄이라도 남았으면 모를 일이지만 그마저 없다면 부모조차 모르며 자신의 성씨 또한 알지 못하는 고아와 다를 것이 무엇 있겠는가. 이곳 부처님은 물론 가까이 있었다는 절집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나라에서 만든 〈동국여지승람〉은 물론 〈봉화군지〉나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그 어떤 지도에서도 그 존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기록 남아 있지 않아 현의 중심지에 있었음에도 한 줄 글로도 남지 못했으니 이는 역사서나 지리서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편향된 사고 때문일 것이다. 곧 생각의 경계를 허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역사서나 지리서들이 책으로 엮어지던 때에 이미 절집은 사라지고 덩그렇게 부처님만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부처님 앞 빈터에 절집에서 사용하거나 불상을 장엄하던 불구들을 파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는 것이다. 지금은 축대를 쌓고 떼를 입혀 매만졌지만 전에는 부처님 앞 빈터에 올라서서 발을 구르면 텅텅하며 속이 빈 것 같은 소리가 나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우가 있었던 곳이거나 불상이 있는 자리를 길지라고 여겨 유림들이 그곳에 유택을 마련하는 경우는 허다하지 않던가.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 부처님 뒤로 파묘된 묘 한기가 있는가 하면 곁에는 뒤집어진 상석 하나가 뒹굴고 있다.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거불이다. 몸의 반은 땅에 묻혀 있으며 불두 부분을 다른 돌로 새겨 올려놓은 것이다. 아미타 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부드러운 힘의 균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마애불이다.> 이렇듯 길가에 서 있으며 몸과 머리가 다른 돌로 조성된 거불(巨佛)은 한양에서 개성을 향해가는 길목인 헤음령을 넘으면 만나는 경기도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보물 제 93호)과 안동 이천동 석불(보물 제 115호)이 유일할 것이다. 비록 이곳의 부처님이 그들과 같이 큰 길을 지키는 것은 아닐지언정 미륵재를 넘어 오가는 마을 주민들의 수호신이었지 않았을까. 이곳에 사는 주민들 또한 자신들을 지켜주는 미륵님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몸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있지만 거불이긴 하되 앞의 두 부처님에게 비해 크기 또한 아담한 것은 길의 중요성과 크기,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부처님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앞서 부조화의 조화로움이라고 한 것은 아무리 봐도 다른 돌을 깎아 올린 불두와 바위 자체에 새긴 몸의 조각이 같은 사람이 한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계란형으로 갸름하며 길쭉한 얼굴은 긴 코 덕분에 입술은 눈보다도 작게 표현 되었다. 거기에다가 마치 실룩거리는 듯 입술 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지 않은가. 더구나 바위에 조각된 어깨부분은 잔뜩 움츠린 채 불두를 받치고 있으니 마치 심통이 난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얼굴과는 달리 선각에 가까운 저부조로 새긴 몸은 제법 세련미를 더하고 있다. 그 중 드물게 보는 수인인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중품인을 한 손은 압권이다. 쥔 듯 만 듯 오른손의 검지와 왼손의 중지를 각각 엄지와 맞댄 부드러운 힘의 균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부처님의 존재감은 뚜렷하기만 하다. 기록문학가 ■ 특징 봉화 오전리 아미타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54호)은 물야면 오전리에 있다. 비록 불두는 없지만 당당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항마촉지인을 한 수인이 통일신라 하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평행을 이루며 가슴께에서부터 무릎까지 덮고 있으며 대좌는 군데군데 깨지고 풍화에 의해 섬세한 조각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대는 복판연화문(覆瓣蓮華紋), 상대는 연화문을 중판(重瓣)으로 새겼다. 그 사이에 놓인 중대석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입상이 뚜렷하다. 근처에 석등 부재와 석탑재들도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으며 불상 뒤에 굴러다니는 주춧돌을 볼 수가 있다. 통일신라.고려시대 조성 추측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32호)은 봉성면 봉성리에 있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불이며 머리와 몸을 서로 다른 돌로 새겼다. 토속미가 물씬 풍겨나는 상호와 함께 수인이 독특한데 드물게 보는 아미타구품인이다. 두 손을 가슴 앞까지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했으니 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오른손의 수인은 검지를 엄지와 맞대었으므로 중품상생인 반면 왼손은 중지를 엄지와 맞댔으니 중품중생인이라는 것이다. ■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 북영주 방면으로 나간다. 풍기읍 방면으로 우회전, 931번 도로를 따라 부석사거리까지 간 다음 봉화 방면으로 우회전 한다. 5km쯤 가면 오른쪽에 운부암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으며 왼쪽에 압동1리 버스정거장이 마주보고 있다. 그곳에서 버스정거장이 있는 쪽의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간다. 갈림길에서 좌회전해 1.5km남짓 막다른 집 우사 뒤에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 북영주 방면 나와 우회전 봉성리 석조여래입상은 압동리에서 18km 남짓 떨어져 있으며 931번 도로를 따라 물야면 방향으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915번 도로로 우회전 한다. 북지리 지림사 앞을 지나 봉화읍에서 918번 도로를 따라 유곡리 닭실 마을을 지나 유곡삼거리에서 36번(918번) 영주방면으로 우회전 해 5km 남짓이면 면소재지에 닿는다. 큰 길 가에 ‘오시오 숯불돼지갈비’라는 간판이 보이면 그곳으로 좌회전, 시멘트 길로 가다가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500m 가량 오르면 왼쪽에 부처님이 계신다. [불교신문 2304호/ 2월2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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