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옥산사 마애약사여래좌상원만한 눈매와 그윽한 미소로 ‘봄꽃 공양’에 화답 |
안동 유일 마애삼존불 추정…유형문화재 제181호 지정 이중으로 된 두툼한 연화대좌위 봉안…감실처럼 바위 깍아 <사진설명>진달래 아래로 우협시의 무릎 이하 부분의 조각이 남아 있으며 윗부분은 별석에 조각해서 올려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봄날은 이래저래 곤혹스럽다. 옷을 얇게 걸친 날은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어대고 꽃은 채 피지도 못했는데 비바람은 그를 떨어뜨리고 만다. 거기에다가 불청객인 모래바람은 어쩌면 그렇게 해마다 거세지기만 하는가. 간밤에 그가 지나갔다기에 길을 나섰지만 채 모래바람은 사그라지지 않았는지 새벽하늘은 불투명했다.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그 정도가 더욱 심해 죽령 고개를 넘어설 무렵에는 먼 하늘에 누런 기운이 남아 있기까지 했다. 그런들 어떨까, 이산 저산 흐드러진 진달래가 농익어가는 봄을 알리고 논틀밭틀에 다보록하게 자란 쑥이며 냉이 꽃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물이 오른 버드나무는 마치 연초록의 빗줄기라도 된 양 늘어져 있으니 그 또한 아름다운 봄의 정취가 아닐 수 없다. 정겨운 봄기운을 만끽하며 닿은 곳은 안동시 북후면의 옥산(玉山)아래 벽절마을이다. 벽절이라, 한때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를 두고 벽절(璧寺)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다. 나옹선사의 다비가 이루어진 강월헌(江月軒)의 위쪽에 벽돌을 굽고 그것을 쌓아올린 다층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지금 가려는 옥산사 마당에 전탑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문사인 옥계(玉溪) 강봉문(1735~1815)을 배향한 서원이 마을에 있으니 그 이름 또한 벽계서원(碧溪書院)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푸른 기운 넘치는 깊은 계곡은 없으니 꼿꼿한 절개를 말하는 벽절(碧節)인지 아니면 벽돌 탑이 있는 절이 있어서 벽절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마을 이름 또한 날씨 못지않게 정겹기만 하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어난 사당 근처에 자동차를 세우고 옥산사를 향해 중간쯤이나 갔을까. 갑자기 눈앞이 붉어졌다간 이내 환해졌다. 동이 터 오는 것이다. 절 마당의 부처님 곁에서 해가 돋는 것을 보려고 깜깜한 밤중에 길을 나섰건만 속절없이 솟아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사과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저 멀리 거침없이 펼쳐진 평원 끝에 영양의 일월산과 청량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유장한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붉은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바람결에 실려 온 매향(梅香)과 얼음을 털어내고 물을 대 놓은 논에서 나는 진한 흙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코끝을 간질이니 이 무슨 복에 겨운 새벽이란 말인가. 솟아 오른 해가 붉은 기운을 떨쳐 버릴 때까지 머물렀다가 몸을 일으켜 부처님에게로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꼬불꼬불 이어졌고 가파르기 또한 만만치 않다. 겨우 자동차 한 대가 다닐 수 있기는 하지만 길섶에 핀 진달래며 노란 생강나무 꽃을 못 본 듯 지나치고 싶지 않았으니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길이 가팔막지기까지 하니 힘겨운 것에 더해 이 꽃, 저 꽃 온갖 꽃과 새움을 틔우는 잎 그리고 풀들을 참견하는 헤픈 눈을 다스리지 않는 마음조차 느긋하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기신거리며 겨우 절 마당에 닿았는가. 한 바가지 불유(佛乳)를 들이켜고 부처님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햇살은 부처님을 비추고 곁을 떠났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건만 이게 웬일인가. 부처님 얼굴은 마지막 햇살에 젖어 있었다. 아! 저 원만한 눈매와 그윽한 미소를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향 사르는 것도 삼배를 올리는 일도 잊어버린 채 불량하게도 부처님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곁에는 마치 입을 다물지 못하는 순례자들을 예견이라도 하는 양 이제 갓 피어난 진달래 한 떨기가 대신 헌화공양을 올리고 있었으니 그 아니 고마운 일일까. 환해진 마음과 눈으로 부처님 상호에 그늘이 드리울 때 까지 머물렀다간 마당으로 내려와 전탑 자리로 올랐다. 양지 뜸인 그곳에는 무량하기 이를 데 없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으니 몸돌을 모두 잃고 기단부만 남은 탑일지라도 어찌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와편들이 뒹구는 맨 바닥이면 어떨까,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부처님을 바라보려 애를 썼지만 눈길은 부처님 계신 바위를 외호(外護)하듯 탐스럽게 피어난 보랏빛 진달래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눈을 감은들 소용없었다. 뜨겁기까지 한 봄 햇살이 만들어 내는 안화(眼花)가 또 성가시게 어른거렸으니 말이다. 아예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곤 무너진 탑의 기단부에 걸터앉아 동틀 무렵 바라보던 능선으로 시선을 던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이 잦아들자 마음은 가라앉고 평온해졌다. 때로는 무엇에 매달리기보다 더러는 등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간혹 뭇 능선에 꽂혔던 눈길을 돌려 부처님을 바라보면 오롯이 부처님만 보일 뿐 더 이상 그 무엇도 나를 방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잠시 눈길 멀어진다고 마음조차 멀어졌겠는가. 꿰뚫거나 넘어서 가야 하는 순간도 있겠지만 돌아가거나 잠시 멈추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은 것이련만 그 순간, 순간들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곧, 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되 언제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하니 현자(賢者)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부(愚夫)로 머무는 것 아니겠는가. 과연 옥산사의 부처님이 약사여래 부처님이라고 하더니 잊고 있었던 내 마음의 지독한 고질병을 되짚어 주는 것인가. 그만하면 됐지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어찌 그에게서 답조차 구할 것인가. 잊고 있던 것을 깨닫게 해 준 것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스승이며 내 삶의 다음 페이지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순전히 나의 몫이 아니던가. 그 몫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사유(思惟)일 것이다. 〈죽창수필〉 사유수(思惟修)에 이르기를 사유란 곧 선(禪)과 같다고 했다. 그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안으로부터 밖을 사유하는 것은 생각이 끝에 이를 수 없어 참(眞)과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라 하고, 밖으로부터 안을 사유하는 것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여 생각이 다할 데 까지 그치지 않으므로 결국 그것을 쇠(滅)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생각이 사라진 자리인 본디 자리,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생각으로써 생각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따뜻한 봄날 활짝 핀 매화를 찾으러 온 산을 헤맸건만 정작 매화는 뜰 안에 피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처럼 문제와 그 해결책을 내 안에 함께 지니고 있으면서도 문제는 먼 곳으로부터 오고 또 그 해결책 또한 먼 곳으로부터 구해야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사는 것이 여태껏 살아 온 내 모습이었다. 그런 내가 오늘 비록 약사여래 부처님을 등지고 앉았지만 그로부터 설법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늘 그로부터 받은 가르침은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무작정 나아가지만 말고 멈추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나로부터 자꾸 멀어지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나를 바로 볼 수 없을 것이니 사유로써 멀어지고 관(觀)으로써 스스로를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쉽지 않다. 그러나 포기할 일도 아니다. 포기할 것이면 정작 부처님을 찾아 나서는 순례조차 마다했을 터, 그만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평소와는 달리 두어 시간 밖에 머물지 않았건만 가볍게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그 가르침이 명쾌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었으니 어찌 몸과 마음이 가뿐하지 않았겠는가. 봄날,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 마냥 가벼웠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말이다. 다시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삼배를 올리고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새벽에 오르며 이미 봤던 진달래이건만 아침나절에 그 길을 되짚어 내려오며 만나는 그들이 왜 그리도 어여쁜가. 그만큼 홀가분해졌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가르침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지키는 일은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깨달음의 순간으로 가는 것 보다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넌지시 눈치 챘으니 아직 나의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그러나 방종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세월은 두렵지 않다. 더딘 것은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구하며 가고 또 가면 이윽고 다다를 것이니 그것은 하늘을 떠난 빗방울이 계곡으로부터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으리라. 비록 파수공행(把手共行)할 이 없으면 또 어떤가. 이미 삶이란 나와 벗어 날 수 없는 파수공행의 길을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 이니까 말이다. 그와 손잡고 함께 나아가지 못하면 그 어느 곳에도 다다를 수 없는 것, 지금 내려오고 있는 이 길이 곧 나를 찾아 가는 길이리라. 사과나무 꽃향기 지천일 때 다시 찾을까, 빨간 사과 주렁주렁 달렸을 때 다시 찾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한결 나와 가까워진 모습이기를 기대하며 뒤돌아보니 먼 산 바위의 부처님이 빙긋 미소 짓고 계신 것만 같았다. 기록문학가 ■ 특징 통일신라시대 조성 된 듯 <사진설명>약사여래좌상과 마주 보고 있는 언덕의 전탑 기단부이다. 옥산사(玉山寺)는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에 있으며 절 이름은 40여 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 이름이 옥산이기에 산 이름을 따라 그리 지었다고 한다. 법당은 2년 전에 지었으며 법당 왼쪽에 절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가 있다. 그 바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유형문화재 제 181호로 지정된 약사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약사여래는 독존이 아니라 삼존불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우협시는 무릎 아래가 확인 되지만 좌협시는 흔적을 찾기가 수월하지 않다. 우협시 또한 무릎 아래는 부조로 새겼으나 그 윗부분은 별석(別石)에 따로 새겨서 올려놓는 독특한 형태를 갖췄던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만약 마애삼존불이라면 안동 지역에서는 유일한 삼존불이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약사여래 또한 별석에 따로 새겼으며 이중으로 된 두툼한 연화대좌 위에 앉아 계신다. 큰 바위의 면을 감실처럼 깎아내며 다듬은 면에 새겨진 부처님의 상호는 이마의 백호와 목의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걸쳤으며 배 부분에 띠 매듭이 아름다움을 더 한다. 오른손은 무릎에 올리고 왼손에는 둥근 합(盒)을 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라는 존명으로 불린다. 전체적으로 갸름해 보이기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며 오른쪽 겨드랑이 부분과 오른팔의 비례가 어색하지만 않다면 보물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위로 마치 천개(天蓋)처럼 큰 바위 하나가 불쑥 나와 있어 비바람을 막은 때문인지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 또 법당 오른쪽으로 무덤 하나가 보이는데 그 위가 전탑자리이다. 부처님 앞에서도 보이며 기단부만 남아 있다. 1608년에 만들어진 안동부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월천전탑(月川塼塔)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추측컨대 그것이 곧 이 전탑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진설명>안동 이천동 석불입상(보물 제 115호).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으로 나가서 우회전, 1km 남짓 가다가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안동 방향 5번 국도로 올라간다. 그 후 줄곧 직진하다가 북후면 소재지를 지나 1k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이정표가 보인다. 북후 초등학교를 지나 마을길로 가야하는데 절 마당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가파르므로 초보자는 마을 아래 벽계서원에 세워 놓고 걷는 것이 좋다. 30분 정도 거리이다. 풍기 나들목에서 옥산사까지는 대략 30km 정도이다. 다시 5번 국도로 나와 안동 방행으로 5km 정도 가면 보물 제 115호인 안동 이천동 석불 입상을 만날 수 있다. [불교신문 2317호/ 4월1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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