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협시인 대세지 보살의 상호“꽃잎 처럼 스러진 ‘청년 이차돈’ 해마다 꽃으로 태어나” |
신라 법흥왕 당시 목숨 버려 불법 폈던 이차돈 인연 도량 ‘짐작’ 머리 수습후 장사 지내고 언저리 ‘자추사’ 창건 … 백률사 자리 <사진설명> 얼굴 부분은 부조로 새겼으나 몸은 선각으로 처리한 동천동 마애삼존불이다. 본존불을 향해 협시불이 몸을 돌리고 앉았으며 머리의 두광은 모두 두 겹이다. 마음이 고약한 것일까, 뉴스에서는 연일 꽃이 활짝 피었다며 호들갑을 떨고 경주에 사는 지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빨리 내려오라며 전화를 했지만 나는 요지부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서두르지 않으면 꽃이 지고 말 것이라며 은근히 협박 아닌 협박을 일삼았지만 사실 나는 어서 꽃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꽃잎이 낱낱이 흩어지며 비처럼, 눈처럼 날리기만을 쏜 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내 어찌 꽃그늘 아래를 거닐며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참수(斬首)할 때 목 가운데에서 젖과 같은 흰 피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니, 이 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여섯 갈래로 갈라져 흔들렸다. 사람과 물건이 애통해 하고 동식물이 불안해하였다. 길에는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서는 발길을 멈추었다.”고 쓰여 있는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의 석당기(石幢記)를 읽고 난 다음 문득 성사(聖師) 이차돈을 위해 꽃비가 내릴 즈음 그를 위한 순례를 하리라 마음먹었으니 지인들의 투덜거림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우협시인 관음보살의 상호. 밤을 도와 도착한 경주는 밤이어도 환한 가로등을 밝힌 듯 꽃 천지였다.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휘둘러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심야의 꽃구경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튿날, 붉은 달이 서녘 하늘을 밝힐 뿐 채 여명이 기웃거리기도 전에 숙소를 나서 다다른 곳은 동천동 소금강산 언저리였다. 아직 깜깜하건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굴불사지 사면불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놀란 것은 부처님 때문이 아니다.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대여섯 명의 처사들과 보살들이 벌써부터 몸을 굽혀 절을 하거나 새벽 기운 듬뿍 받은 채 참선을 하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면불에서 가파른 계단을 기신기신 올라 숨을 고르며 불유(佛乳) 한 잔을 들이킨 백률사(柏栗寺) 대웅전에도 또 삼성각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사람들은 산을 올라와 기도에 열중이었으니 발자국 소리라도 날까 조심조심 삼성각을 에돌아 산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이라고 해야 백률사에서 5분 남짓한 거리이지만 그곳은 참수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다는 곳이다. 그 머리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그 언저리에 절을 지어 자주차(刺楸寺)라고 불렀다고 하니 그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또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 간 곳이라고도 하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생각한다. 설화란 그 진위의 여부를 반드시 밝혀야 하고 혹은 그 설화의 배경이 된 장소를 굳이 찾아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미완성의 설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더러 이야기는 무성하게 남아 있을지라도 그 사실을 증거 할 만 한 역사적 유물의 존재나 장소를 굳이 이것과 저곳이라고 못을 박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설화란 끊임없는 상상력을 요구하고, 때로 실낱같은 한 가닥의 꼬투리를 잡고 풀어 나가야 하는 실타래처럼 엉켜 끝이 없는 미로를 헤쳐 나가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저 마다의 방법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다다른 곳이 곧 그 설화의 역사적 장소가 되어도 무방하리라. 그 때문에 설화라는 존재의 연속성은 무한한 것이며 늘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설명> 본존불의 상호. 그 때문이리라. 오늘 내 마음 속의 자추사는 소금강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30m 가량 내려 간 곳에 있는 마애삼존불 언저리이다. 소금강산에 있는 그 무수한 바위들 중 큼지막한 바위의 동북쪽을 향한 면에 삼존불을 좌상으로 새겼으니 이만한 불사를 일으킬 만한 연유가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까닭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을 뿐 더러 오로지 자추사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만한 근거 밖에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애삼존불 앞에서 100m 가량 더 내려 간 곳에 사지로 추정되는 넓은 공터가 있긴 하지만 그곳 또한 자추사터라고 단정 짓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니 그저 이 마애삼존불 언저리를 자추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틀렸어도 개의치 않고 맞는다고 한들 또 무슨 소용 있을까. 어차피 홀로 길 떠나는 순례자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전각들이 뚜렷한 백률사 보다는 산길에 외로이 계신 부처님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 않겠는가. 부처님 앞에 다다른 지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동쪽하늘은 벌겋게 달궈지기만 할 뿐 붉은 해는 좀체 눈앞의 능선을 넘어 오지 않았다. 여느 곳과 같이 부처님에게 새벽 첫 햇살이 비쳐드는 순간의 그 행복함을 만끽하려고 곁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지만 그것은 헛된 꿈이었다. 희미하게 산길이 보이기 시작하자 운동복 차림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앞을 지나가며 두 손 모으고 절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일찍 다다랐지만 부처님 앞 뿐 아니라 그에게로 오는 길까지도 말끔하게 빗질이 되어 있는 것에 놀라지 않았던가. 비록 정병(淨甁)에 담은 물은 아니면 어떠랴. 늙은 보살 한 분은 산 아래 굴불사 사면불 옆의 샘에서 길어 왔다는 맑은 물을 공양하고 떠나가고 또 다른 이는 한지에 곱게 싸서 온 향공양을 올리고는 떠나갔다. 이윽고 해가 비쳐들자 또 다른 보살 한 분은 이미 쓸어 놓은 길과 부처님 앞을 다시 쓸기 시작했다. 이미 깨끗한데 왜 또 쓰느냐고 물으니 “내 마음인데예”라며 뭇사람들의 발길로 어지러워진 마당을 정갈하게 쓸고는 홀연히 떠나갔다. 그 말이 참 좋았다. ‘내 마음’이라는 짧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말말이다. 그것은 정성을 뜻하는 것이며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내 몫을 다할 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나 아닌 남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그 보다 큰 것이 또 있을까. <사진설명> 경주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 날마다 그 지순한 마음 공양을 받은 때문인가. 고개 돌려 부처님을 바라보니 찢어진 눈매에 투박한 입술을 했을 뿐 더러 조각조차 선명하지 않은 본존불이 빙긋이 미소 짓고 계셨다. 부처님 바로 앞에 불쑥 솟아 오른 소나무에 가려 빛은 골고루 비쳐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른 새벽에 솟아오르는 태양의 속도는 아니 가는 듯 보이지만 한 눈 팔다가 뒤돌아보면 저만치 가 있는 세 살 박이 아이들의 걸음걸이와도 같지 않은가. 어느새 지나쳤는가하면 다시 어느새 비쳐 들기를 반복하며 장엄한 파노라마는 이어졌으니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질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에 흠뻑 젖었다가 문득 고뇌에 찬 법공(法空) 법흥왕(?~540)의 외침을 떠 올렸다. “아! 어찌하리오. 천하에 나 혼자이니,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키고 법을 남기리오. (呼! 奈何 天下獨吾 攀誰爲伴建釋遺法)” 그 말을 들은 이차돈은 “보잘 것 없는 제가 생각하건대 왕께서 큰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무꾼에게도 자문한다 하였으니, 제게도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왕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차돈은 비록 자기가 죽어서 왕의 뜻인 불법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리 하겠노라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당시 22살의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성사 이차돈이 왕에게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거침없이 드린 것은 무엇일까. 육체일까,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다. 오늘 내가 이 부처님 앞에서 무수히 보고 있는 뭇사람들이 베풀고 가는 그것과도 같은 것이다. 형체가 없어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거대한 마음이 몸을 움직인 것이지 그의 몸이 마음을 움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 산의 그 많은 바위들은 잘려진 성사 이차돈의 머리와 함께 날아 온 그의 마음이 굳은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먼 훗날, 그 중 가장 크고 편편한 면을 지닌 어느 한 바위에 그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부처님을 새겨 그 은공에 보답하려 했던 것이 이 삼존불은 아닐까. 비록 솜씨가 야무지지 못하고 맵시가 서툴면 어떤가. 먼발치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곤 정오가 가까워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꽃이 흐드러진 어디로 가야만 성사 이차돈이 참수 당하던 그날 내렸다는 꽃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자동차를 몰아 불국사 언저리로 다가가자 ‘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는 듯 마는 듯 바람이 지나가자 난분분 날리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굵은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꽃비가 황홀한 장면을 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성사 이차돈이 마음을 움직여 몸을 던진 날, 그날도 이랬으리라. 그날로부터 신라는 불국토가 되었으니 어찌 꽃다운 청년의 마음이 이 꽃비보다 아름답지 않겠는가. 무수히 많은 억 겹의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져도 그 아름다운 마음을 모두 덮지 못하리라. 무작정 거닐다가 어느 덩치 큰 꽃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잠시 앉았을 뿐인데도 몸은 꽃잎으로 덮였다. 내 몸을 덮은 꽃잎을 조심스레 모으고 주섬주섬 주변의 꽃잎을 긁어모아 한 움큼, 꽃잎을 두 손 가득 쥐고는 먼 하늘로 뿌렸다. 그것은 내가 성사 이차돈에게 드릴 수 있는 마음이었다. 기록문학가 ■ 특징 얼굴은 얕은 부조로 몸은 선각으로 처리 유형문화재 제 194호로 지정된 동천동 마애삼존좌상은 소금강산 정상 동쪽 아래에 있다. 동북쪽을 향하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은 본존은 아미타불이며 우협시는 관음보살, 좌협시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우협시는 얼굴이 떨어져 나가고 전체적인 모습을 추정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마멸되었지만 본존불과 우협시는 그런대로 알아 볼 수 있다. 얼굴은 얕은 부조로 새겼으며 몸은 선각으로 처리해 통일신라 후반에 조선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은 민머리이며 두 겹의 광배가 둘러싸고 있다. 어떻게 보면 머리에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에는 삼도가 남아 있으며 상호는 전체적으로 투박한 느낌을 준다. 좌협시는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데 희미하게나마 부처님이 새겨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바닥 오른쪽 무릎에 올려놓은 오른 손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협시는 보관과 두 겹으로 된 두광과 어깨 아래로 희미하게 옷 주름이나 몸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협시불들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부처님을 향해 몸을 돌리고 않은 형태이다. 또 양쪽 협시불의 머리 위로 사각형의 홈이 파진 것으로 봐서 처음 부처님을 새겼을 당시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성사 이차돈을 모셨던 자추사의 위치는 확인된 것이 없다. 현재의 백률사가 그 자리라고 하며 백률의 율(栗)과 자추의 추(楸)가 같은 과의 열매임을 전제로 백률사가 곧 자추사의 옛 자리라고 하기도 한다. 백률사에는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 또는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이라고도 하는 석당기(石幢記)가 모셔져 있던 곳이 기도 하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으로 나가서 포항 방면으로 줄곧 직진을 하면 된다. 배반지하차도를 지나고 다시 고운교를 건너 1km 남짓, 오른쪽으로 탈해왕릉을 지나면 곧 백률사 입구를 일리는 표지판이 있다. 그곳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100m 남짓이면 굴불사지 사면불을 만난다. 사면불 뒤로 보이는 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백률사이고 대우전 뒤 삼성각 옆으로 난 등산로로 5분 정도 오르면 산 정상이다. 정상의 체육시설이 끝나는 부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30m 정도에 마애삼존불이 있다. 경주 나들목에서 백률사 주차장까지는 7km 정도이다. [불교신문 2319호/ 4월18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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