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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천동 마애지장보살상

풀 향기 속 푸른 하늘 바라보며 1500년 세월 지켜



원효대사와 같은 시기 살았던 ‘사복’은 대안대사와 같은 인물

저자거리서 ‘대안’ 외치던 신라 十聖 ‘사복’을 기려 새긴 듯…


염촉(厭觸), 곧 이차돈에게 꽃비로 마음 공양을 드리고 난 후 발길은 잼처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염촉과 더불어 신라 십성(十聖) 중 한 분인 성사(聖師) 사복(蛇福)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발, 한발 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꽃그늘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잎은 절로 떨어져 작은 연못은 꽃잎으로 뒤덮여 늪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곳으로 돌을 던지면 꽃잎이 잠시 열렸다가 이내 닫히고 마니 그곳이 곧 사복이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다는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이런가. 하염없이 돌을 던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서 금강산 언저리에 닿았다. 이곳 어딘가에 사복을 기리던 사람들이 그를 위해 도량사(道場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절을 세운 곳이 산의 동남쪽 기슭이라고 했으니 굴불사 사면불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탈해왕릉을 지난 곳쯤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곳쯤이 금강산의 기운이 다하여 스러질 뿐 더러 마애지장보살이 있기 때문이다.


상호는 눈, 코 그리고 입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하반신은 파묻힌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앞으로 넓은 터가 있긴 하지만 그곳이 절터라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더구나 지장보살은 후대에 모신 것이어서 〈삼국유사〉에 기록조차 없으니 난감한 것이다. 하지만 산 기운이 다한 동남쪽 기슭에 부처님의 자취라고는 이곳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곳이 도량사 옛터이거니 하고 짐작하는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느새 지장보살에게 다다르자 그는 갓 피어난 노란 민들레 한 송이와 바람결에 마구 흔들리는 냉이꽃 공양을 받고 있는 것을….

찾는 이가 드물었을까. 아니면 바람처럼 그저 아니 온 듯 다녀 간 것일까. 바위 앞은 새벽녘에 다녀 온 동천동 마애삼존불과는 너무도 달랐다. 안내판은 커녕 주위도 매만지지 않아 앞에 놓인 작은 불상이나 향합마저 없었더라면 무심코 지나치게 생겼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키 낮은 지장보살상 앞의 풀을 뽑지 않았다. 겨울가고 봄이 왔으니 그이 또한 꽃향기에 더해 싱그러운 풀 향기를 흠씬 맡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곤 그 앞 맨 땅에 퍼질러 앉았다. 영상 20도를 웃도는 날씨인 때문인지 바닥은 푸근했고 풀밭에 기댄 등 또한 따뜻했다.

그렇게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사복을 떠 올렸다. 사복은 또 다른 십성 중 한 분인 원효대사(617~686)와 같은 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는 열두 살이 될 때 까지 제대로 일어나 다니지도 못했으며 말조차 하지 못했으니 〈삼국유사〉에도 ‘사복불언(蛇福不言)’이라고 했다. 그의 말문이 터진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었다. 지금은 덕동호수 안으로 사라져 버린 고선사(高仙寺)로 원효대사를 찾아가 불쑥 말을 토했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혹시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묵언, 말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짐작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첫마디는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때 내가 풀지 못한 숙제였다. 사복이 고선사로 찾아가자 원효대사가 그에게 예를 갖추었지만 사복은 본체만체 했다. 그리고는 원효대사에게 “그대와 함께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다”고 했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했던 것이다. 아무리 무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어찌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암소라고 비유하겠는가. 더구나 원효대사가 예를 갖추었다니 도대체 사복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 그 대답은 〈송고승전(宋高僧傳)〉 제4 의해편 ‘신라국 황용사 원효전’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책에 따르면 본디 〈금강삼매경〉은 동해(東海)의 용궁에 있었는데, 용왕의 셋째 딸인 신라 왕비가 앓고 있던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영해용왕(鈴海龍王)이 신라에 보낸 것이라고 한다. 용왕은 경전을 보내며 덧붙이기를, 대왕 스스로 성자(聖者) 대안(大安, 571~644)에게 명해서 전체 8장(章)으로 순서를 맞추어 차례대로 간추려 편집하게 하고, 원효대사에게는 그 경에 대한 소(疏)를 짓게 하라고 일렀다. 이어 원효대사가 지은 해설서로 대궐에서 가르침을 펼치면 왕비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낫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원효라는 인물 이외의 강석(講釋)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그 후, 대안대사가 정리한 경을 받은 원효대사는 각승(角乘)과 우차(牛車)를 준비하여 소(牛)의 뿔과 뿔 사이에 책상과 필연(筆硯)을 놓고 소(疏) 다섯 권을 지었으니 그것이 곧 〈금강삼매경론〉이다. 당시에 처음 지었던 다섯 권은 모두 잃어버려 급히 사흘 만에 세 권으로 줄여서 쓴 것이 지금껏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백부(百部)의 논사(論師)인 원효대사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 중 소(牛)와 함께 경(經)이 연관된 이야기가 이것 말고 또 있을까. 그러니 사복이 말하는 ‘그대와 함께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는 원효대사가 〈금강삼매경론〉을 지을 당시 타고 다니던 소를 일컫는 것은 아닐지 궁금하기만 한 것이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어 피모지장보살로 추정하는 마애불이다. 또한 이 마애불 근처가 〈삼국유사〉 사복불언 조에 나오는 도량사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사복은 대안대사라는 말이 된다. 곧 날마다 저자거리에서 동발(銅鉢)을 치며 “대안, 대안”이라고 노래 불렀다는 대안대사가 사복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만난 이에게 ‘그대와 함께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라는 말을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대안대사가 원효대사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분명하거니와 법력이 뛰어난 스승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사복이 고선사로 찾아가자 원효대사가 예를 갖추어 맞이했던 것이리라. 〈삼국유사〉의 ‘사복불언’ 조를 곰곰이 되짚어 읽어보면 원효대사는 사복을 따를 뿐 원효대사가 사복을 부리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사복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출생의 배경부터 이적(異蹟)을 보이는 기이한 인물이다.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살던 한 과부의 몸에서 지아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나지 않았던가. 또 사동(蛇童), 사파(蛇巴) 혹은 사복(蛇卜), 사복(蛇伏)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니 두말 할 것 없이 천민계층의 사람이었으리라. 그것이 곧 사원을 버리고 저자거리를 배회하며 ‘대안’이라고 외치고 다닌 대안대사의 이미지 위로 오버랩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리라. 그런가하면 원효대사의 기행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원효대사의 각승과 우차는 당나라의 삼차법사(三車法師, 632∼682), 곧 자은대사(慈恩大師)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는 현장법사(玄法師)에게로 출가할 당시부터 아예 여색(女色)을 즐기고 술을 마시는 것을 조건으로 했으며 나들이를 할 때에는 생애주(生涯酒)와 여자 그리고 경전을 실은 3개의 수레를 동반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가하면 대안대사 또한 〈임제록〉에 나오는 보화선사(普化禪師, ?~861)와 많이 닮아 있으니 기이한 일이다. 전신탈거(全身脫去)의 공안으로 널리 알려진 그 또한 저자거리를 다니며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으로 치고, 사방팔면에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치고, 허공 속에서 오면 도리깨로 친다”는 노래를 하며 다니지 않았던가.

물론 보화선사는 대안대사보다 후세의 인물이다. 그렇지만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할 당시 이미 그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의도적으로 인물들을 대립시킨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안대사와 원효대사 그리고 현장법사(玄法師, 602~664)와 자은대사라는 관계를 설정하면서 말이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현장법사와 자은대사의 유식(唯識) 법상종(法相宗)을 배우려 입당을 꿈꾸지 않았던가. 결국 원효대사는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곧, 처음에는 흠모했지만 당나라로 향하는 동안 삼계가 오직 마음(三界唯心)일 뿐이며, 만법이 오직 인식(萬法唯識)일 뿐임을 깨닫고 이내 마음을 돌렸다는 말과도 같다. 무사독오(無師獨悟)인 것이다. 그 어떤 교학을 공부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본성과 일심으로 돌아가야 한다.(會相歸性, 會歸一心)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그 내용을 집대성하며 한 때 스승으로 삼으려던 현장법사와 자은대사의 유식 법상종을 오히려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복과 원효대사 두 사람이 함께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으로 장사를 지내러 간 다음에는 암소는 사라지고 지혜의 범이 등장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그 지혜의 범을 지혜의 숲에 묻어주자고 하고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지혜의 범은 곧 금강경을 뜻하는 것이며 사복이 어머니를 업고 들어갔다는 지혜의 숲은 청정한 한 송이 연꽃 위에 펼쳐진 불국토를 뜻하는 것이리라.

아무래도 나는 사복을 원효대사와 함께 〈금강삼매경〉을 매만진 것이나 다름없는 대안대사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문드러진 마애지장보살상이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새긴 것이라 믿으며 그 앞에서 사복을 위한 천도재를 올려 주고 싶었다. 마침, 어디선가 때 이른 나비 한 마리 너울너울 춤을 추며 지장보살상 앞을 날아가니 곧 사복을 위한 나비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발길을 되돌려 점심나절에 지나왔던 연못을 찾았다. 비록 연꽃잎은 아니지만 꽃으로 뒤덮인 연못, 사복이 지혜의 숲 뗏장을 들어내듯이 긴 나뭇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꽃잎을 헤쳐 봤다. 그러나 바람 한 줄기 지나가자 흩어졌던 꽃잎은 그만 문을 닫고 말았다. 꽃잎 아래 청허(淸虛)한 저곳, 아! 정녕 내가 본 것이 불국토일까.

기록문학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보물 제655호 낭산 마애삼존불의 본존불이다.



■ 특 징



바위 가운데 지장보살 상호 볼 수 있어

문화재 지정 안돼 … 앞에는 넓은 공터



마애지장보살상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동천동 중리 마을에 있다. 도량사터는 마애지장보살상 앞으로 있는 넓은 공터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3월14일이면 도량사에서 점찰회(占察會)를 열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또한 사복불언에 나오는 만선복리나 활리산이라는 지명 또한 어느 곳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정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바위의 가운데에 새겨진 지장보살은 상호만 확인이 가능할 뿐 그 외에 다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존명을 지장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는 보물 제 665호로 지정된 경주 배반동의 낭산 마애삼존불의 본존불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성 시기는 대략 나말여초로 파악되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불상의 크기는 너비 50cm, 높이 60cm 가량이다.

신라 십성(十聖)은 〈삼국유사〉 흥법편에 기술되어 있으며 흙으로 빚은 아도와 염촉, 혜숙, 안함 그리고 의상은 흥륜사 금당의 동쪽 벽에 서향으로 앉았으며 표훈, 사복, 원효, 혜곡 그리고 자장은 서쪽 벽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고 했다.


가는 길


굴불사 사면불에서 내려오면 큰 길로 나아가지 않고 자동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농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면 탈해왕릉에 이른다.

왕릉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150m 남짓 걸어 작은 사거리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가야 한다. 150m 가량 오르면 오른쪽으로 유치원이 보이고 그 왼쪽의 개울 건너 작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길 높이 보다 낮게 있을 뿐 더러 바위가 아주 작아서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니 건너가야 하며 안내판은 전혀 없다.



[불교신문 2321호/ 4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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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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