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 |
조선말의 사상가인 혜강(惠岡) 최한기(1803∼1879)의 글 중 ‘지형을 본다(見得地形)’라는 것이 있다. 그는 그 글에서 “산천을 유람하다가 훌륭한 경치를 만나게 되면 안계(眼界)가 활짝 트여 신기(神氣)가 화창하나, 만약 험하고 황폐한 곳을 만나면 안계가 쓰라리고 괴로우며 신기가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대상을 접하거나 대할 때에 감응하여 일어난 잠깐 동안의 일이다. 이삼 일 지나면 안계가 화창했던 것이나 쓰라리고 우울했던 것은 차츰 소멸되며, 열흘 내지 달포가 지나면 보이는 대상이 모두 예사롭게 보이고, 온몸의 신기는 본래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나 내금강을 다녀 온지 벌써 보름이 지났건만 나는 아직도 몽유금강(夢遊金剛)이다. 삼존불 여래입상 반가사유상 같은 바위군群 ‘장엄’ 혜강은 다른 글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없으며, 설사 동시에 하더라도 두루 다 잘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꿈결인 양 마음은 만폭동의 불적을 헤매고 있으면서도 몸은 충북 증평군 남하리로 향하고 있으니 이 무슨 불량한 걸음인가. 하지만 다행이었다. 그나마 짙은 안개 탓에 느려터진 고속도로 위에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증평읍을 지나 좁은 마을길을 굽이돌아 염실마을에 다다를 즈음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내금강의 장면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사진설명 : 남하리 마애불상군의 삼존불이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오른쪽 모서리 부분에 여래입상이 새겨져 있으며 왼쪽 앞의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잎 넓은 담배가 싱그럽게 자라있었고 실한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른 새벽임에도 당신들의 밭이 밤새 안녕한지 서둘러 나온 농투성이 노부부가 김을 매는 참깨 밭은 하얀 꽃으로 뒤덮여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붉은 기운을 잃어버린 해가 안개 속으로 하얗게 떠올랐지만 저만치 빤히 보이는 부처님에게로 선뜻 향하지 않았다. 대신 노부부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참깨 밭을 괜히 기웃거리며 비도 잦은데 올해 농사는 어떤지 말을 던지자 돌아오는 답이 의외였다. “이 땅이 부처님 땅인데 농사가 안 될 리가 있겠소. 해마다 크게도 안 되고, 안 되지도 안하고 그저 고만고만하다네. 근디 이 새벽에 여기 온 걸 보니 부처님 뵈러 온 모양이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보나마나지 뭐, 여게까정 올라오는 타지 사람들은 열에 열이믄 전부 부처님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지. 그래도 새벽에 오는 사람들은 드문데 부처님한테 뭐 기도하러 왔소.” “아뇨, 그저 주유천하로 부처님 찾아다니는 사람인데 오늘은 발길이 이쪽으로 왔네요.” “그려, 김삿갓 일세.” “근데 이 밭이 부처님 땅이라니 그건 무슨 말이래요.” “아! 여게가 전에는 절이 있었던 자리거든.” “그래요, 어르신은 절이 있던 거를 보셨어요.” “그럼 내가 어렸을 때지, 전쟁 끝나고 그때까지도 있었어.” “절이 컸던 모양이지요.” “아녀, 저게 탑 있는데 저 옆으로 한 두어 칸 있었나, 부처님 앞에 묵밭 자리에도 한 칸 있었고, 그게 전부여.” “난 또 절이 이 밭까지 아주 크게 있었는 줄 알았네.” “그래도 이 길을 안 통하믄 절에 가질 못하니 이 땅도 부처님 땅이지 뭐. 안 그려.” “예, 물론이지요.” “저 부처님한테 뭐라도 빌어 본 적은 있으신가 어쩐가.” “몰러, 나는 한 번도 그래 해 본 적은 없는데 우리 할마이가 간혹 댕겨 오고 그래.” “할머니는 뭐 빌러 다니셨대요.” “빌긴 뭐 빌게 따로 있나. 자슥들 잘 되게 해 달라는 거 하고 우리 내외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는 거 그거뿐이지 뭐.” “매일 가세요.” “촌살림에 매일은 못 댕기지, 아무리 집 뒷동산이라도 그래 댕기지는 못혀, 내 시집오고 나서부터 댕기는데 초하룻날 하고 보름날 하고 새벽에 잠깐 다녀오는데 그래도 그 때문인지 아직 집안에 우환이 없으니 그게 다행 아니오. 그만하믄 됐지 뭐 더 바랄게 뭐 있나.” 수더분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답을 해 주시던 노부부는 “그런 건 알아서 어데다 쓸라고, 우린 그런 거 필요 없네. 어서 볼일이나 보러 가시게”라며 기어코 이름은 말하지 않으셨다. 다만 올해 일흔 여덟이라는 할아버지는 염실마을에서 태어나 군대 간 것 3년을 빼고는 여태 마을을 벗어 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조사된 바로는 1954년까지 암자가 남아 있었다고 하니 그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새벽 땀을 흘리면서도 길손의 말동무가 되어주신 노부부를 위해 내가 보태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쉬엄쉬엄 하시라는 말 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1954년까지 암자 있던 곳 … 노부부 농사 지으며 ‘불공’ 보일듯 말듯 미소 아름다워 … 반가사유상 형체 ‘어렴풋’ 발길을 돌려 100m 남짓이나 걸었을까. 왼쪽으로 탑이 우뚝하고 탑 오른쪽에 제법 큰 바위 덩어리가 있었다. 부처님은 그곳에 계셨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다다라 예를 갖추기도 전에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말았다. 문제는 그 미소에 취해 예를 올리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부처님의 미소가 조금 전 만난 할아버지가 싱긋싱긋 웃으시던 미소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할아버지가 닮은 것이겠지만 그만큼 부처님의 모습은 소박 했다. 마치 빛바랜 치색(緇色) 가사 한 쪽만을 걸치신 채 일체의 화려한 장엄을 마다하신 것만 같았다. 새벽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일 듯 말듯 옅은 미소를 머금고 계신 부처님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말이다. 그저 고졸(古拙)하다는 말로는 무엇인가 부족한 표현이 되고 말 것 같아 사용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부터 올해만도 네 차례, 이미 이곳을 다녀간 터여서 이제는 그 미소에 익숙해졌을 법도 하건만 앞에 설 때 새롭기만 하니 무슨 일일까. 바위 질이 다른 곳 보다 뛰어 난 것도, 조각이 섬세하거나 유려한 것도, 그렇다고 양감이 풍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진설명 : 삼존불과 마찬가지로 목의 삼도는 생략된 여래입상이다. 그것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이 앞에 섰을 때 보기 드물게 단순하여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것은 이십 년에 가깝도록 화려하게 장엄 되거나 빼어난 조각 수법을 자랑하는 불적(佛跡) 앞에만 서 왔던 나의 익숙함이 빚어 낸 결과였다. 그리하여 단순한 것들 앞에서는 마음이나 생각을 일으킬 궁리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볼 것이 없다며 힘겹게 찾아 간 발걸음조차 가볍게 되돌리는 우를 저지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모습이 단순할수록 오히려 더욱 더 그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화려한 것은 그것대로 단순한 것 또한 그것대로 제각각 훌륭한 것이련만 어느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편견을 모두 털어버리고 되새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마애불들 중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마애불들이 그가 존재하는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은 것 또한 없다는 것도 말이다. 지금 내 앞의 부처님 모습이 조금 전 만났던 농투성이 노부부의 얼굴을 닮아 있듯이 부처님은 민초들을 그러안고, 민초들은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믿으련다. 이른 새벽에 누군가 다녀 간 듯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고 볼품없이 초라한 향합에서는 향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다녀 간 것일 터 따로 향을 덧보태지 않고 삼존불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이곳에는 삼존불을 포함 모두 다섯 구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고 했지만 삼존불 오른쪽 모서리에 저부조로 새겨진 입상은 쉽게 찾을 수 있을 뿐 삼존불의 우협시불 앞 외딴 바위에 선각으로 새겨졌다는 반가사유상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네 차례 모두 보지 못했으니 오늘은 볼 수 있으려나 했지만 점심 무렵이 되자 하늘이 금세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북향이어서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읽을 책이며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서 올라 왔건만 오늘도 틀렸다. 마애불 뒤 석굴 같은 곳에서 비를 피하며 한 시간 가량 기다렸건만 도무지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둘려 내려오는데 그 노부부도 비설거지를 하느라 분주했다. “제가 뭐 좀 거들어 드릴까요.” “아니 아직도 안 내리갔소, 벌써 간 줄 알았더이, 인자 다 했어, 고만 내리가야지.” 노부부가 따 놓은 풋고추 망태기 하나를 둘라메고 내려오면서 할아버지에게 말을 던졌다. “그런데 어르신 웃는 얼굴하고 부처님 얼굴하고 꼭 닮았던데요.” “허허, 그랴. 좋은 소린가, 나쁜 소린가. 내가 부처님 닮았시믄 좋은 소릴세.” 굳이 그 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에 다다른 어르신은 풋고추와 강냉이를 싸 주신 것이 말이다. 먹을 만큼만 주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가져가서 혼자만 먹지 말고 이웃들과 나눠 먹으라고 말 그대로 듬뿍 담아 주셨다. 그리고는 돌아서는 나에게 “낼 모레가 초하룬데 그날은 나도 마누라하고 부처님한테 한번 가 봐야 것네”라며 너털웃음을 날렸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특징 / ‘삼도’생략…9세기 후반 또는 10세기 조성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은 충북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 3구 산 35-2 염실마을 뒷산인 남대산 기슭에 있다. 마애불은 절터에 남아 있는 고려 후기의 삼층 석탑 근처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유형 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설명 : 남하리 마애불상군은 절터에 있다. 절터에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1954년까지 암자가 존재했다. 마애불상군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삼존불과 함께 여래입상 그리고 반가사유상이 같은 바위군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중 삼존불과 여래입상은 같은 바위에 방향만 달리 새겨졌으나 반가사유상은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와 붙어 있는 독립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여래입상이 새겨진 바위의 크기는 높이 352cm, 너비 470cm, 두께 320cm이며 반가사유상이 새겨진 바위의 크기는 높이 300cm, 너비 350cm, 두께 215cm이다. 삼존불 중 본존불은 높이가 3m에 이르며 좌우 협시불은 각각 230cm, 246cm이다. 본존불은 법의를 통견으로 걸쳤으며 왼손은 가슴께에 들어 올려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오른손은 분명하지 않으나 복부 근처에서 법의 속으로 감추어진 모양이다. 이곳 삼존불의 특징은 목의 삼도(三道 : 목에 난 세 가닥 주름)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독립된 여래입상의 목에도 삼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조성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조성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9세기 후반으로 보는 견해와 10세기로 보는 견해가 있어 단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애 반가사유상은 뚜렷하지 않다. 연화대좌에 걸터앉아 상체를 굽힌 채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대고 손등이 얼굴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재 확인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마저도 희미할 뿐 더러 완전히 불상이 조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형태이다. 그렇지만 도상적인 측면에서 미루어 보건대 반가사유상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많다. 만약 이 조상이 반가사유상이 확실하다면 9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며 삼존불과 여래입상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가는 길 / 중부고속도로 증평 나들목으로 나가서 510번 도로로 우회전해 연탄사거리를 지나 만나는 삼거리에서 다시 우회전 한다. 증평읍 시가지를 빠져 나가면서 540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 오른쪽으로 마애불상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독도라는 음식점 옆길로 우회전해 마을길로 들어가 염실마을을 찾으면 된다. [불교신문 2351호/ 8월1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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