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용미리 마애석불입상도성 오가던 나그네들의 길동무 된 ‘두 부처님’ |
얼마만인가. 먹구름이 물러간 새벽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멀리 북한산은 바위 능선들을 뽐내고 누런 황토 물로 변해 버린 한강은 유장하게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달이며 공부방 깊숙이 들어 온 햇살을 만끽하다가 홀연히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워낙 변덕스러운 날씨여서 또 언제 먹구름이 밀려와 소나기를 퍼부을지 모를 일이니 서둘러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500~6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본 용미리 석불입상이다. 망원경이 있으면 가지고 가면 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왼쪽 부처님의 상호에 구멍은 한국전쟁 당시 맞은 총탄 자국이다. 지난번에 다녀 온 북한산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도 그랬지만 지금 향하고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석불입상도 마찬가지이다. 공부방에서 나서면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지만 늘 지방으로만 다니느라 언제 가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기억을 되살리며 찾아 가는 길, 벽제를 지나자 들판에 작렬하는 햇살은 눈부시도록 찬란했으며 한 걸음 떼어 놓으면 땀 한 방울이 날 지경으로 뜨거웠지만 궂은 날씨 끝이어서 그래도 좋았다. 이윽고 올라 선 혜음령, 조선조를 장식한 숱한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던 곳이건만 고갯마루에는 골프장 안내판만이 멀뚱할 뿐이었다. 한양에서 개경을 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고개, 그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려 왔을까. 멀리 보였다. 언제나 이 길을 지날 때 마다 그랬듯이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마치 숲 속에서 솟구치듯이 부처님이 우뚝했기 때문이었다.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이 말이다. 큰 바위 벽에 두 부처님의 몸을 조각 불두는 다른 돌 다듬어 불신 위 모셔 마침 길 가에 있는 어떤 공장에 지어 놓은 팔각정이 부처님을 바라보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 팔각정으로 올랐다. 과연, 더할 나위 없었다. 여느 정자보다 유난히 높다 싶었지만 이만한 곳 또 어디 있을까. 정자에 오르자마자 삼배를 올리고 앉았다. 그리곤 꼼짝도 않은 채 부동이었다. 그늘 짙고 바람 솔솔 불어대며 눈앞에 바로 부처님 두 분 계시니 무에 그리울까. 아예 부처님도 놓고 생각마저도 놓아버렸다. 그렇게 두어 시간, 무척이나 오랜만에 나 스스로를 놓아 버린 채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고개 들어 바라보는 부처님의 존재는 머리 숙이는 정도로 그 감사함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부처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무렵 몸을 움직여 그 앞으로 나아갔다. 팔각정에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여서 터덜터덜 걸었다. 이내 닿은 곳은 용암사, 마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우람하며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으며 그 바위 전체가 부처님의 상체와 하체였다. 높이가 17m에 이르러 가까이에서 보기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명문의 흔적 그리고 위로 올라가 합장한 투박함 손에 새겨진 손톱이며 연봉을 꽂았을 오른쪽 부처님의 연봉대를 살피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팔각정에서 본 모습은 두 분 부처님의 머리 부분이었으며 석불입상과도 같은 모습이었건만 가까이 다가와 보는 모습은 마애불이다. 곧 큰 바위 하나에 선각과 부조로 법의와 손 그리고 지물이 새겨졌으며 머리 부분은 다른 돌을 환조로 새겨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안동 제비원 석불입상이나 봉화 봉성리의 석조여래입상과 같이 더러 찾아 볼 수 있다고 선뜻 판단을 내리기에는 섣부르다. 왜냐하면 다른 곳들은 머리 부분을 환조로 새기긴 했지만 뒤까지 새기진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규모에 있어서보면 다른 곳들은 하나의 돌을 깎았을 뿐이지만 이곳은 모자 윗부분까지 합하면 모두 4매의 돌을 깎아 조립하다시피 정교하게 맞추어 놓았다. 목, 상호 그리고 이마와 모자 이렇게 말이다. 원형의 모자를 쓴 부처님과 사각형의 모자를 쓴 부처님의 머리 부분의 크기는 어슷비슷하여 원형의 모자를 쓴 부처님은 대략 2.5m, 사각형의 모자를 쓴 부처님은 2.4m에 달한다. 그러니 불두 부분만으로도 웬만한 마애불의 크기와 맞먹는가 하면 불신 부분은 15m에 이르니 전체 높이가 무려 17.7m에 가깝다. 나라 안 마애불 중 그 크기로는 으뜸과 버금을 다투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거불(巨佛)의 양식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사찰도 없던 이곳에 이처럼 큰 불상을 무슨 까닭으로 세웠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합당한 설화가 전해져 오기는 한다. 대각국사 의천의 형님인 고려 선종(宣宗)은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3번째 비로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마애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다. 나라 안에서 흔치 않은 이불병립(二佛竝立)이면서 보물 제97호인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과 같이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의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형상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위는 실제로 갈라져 있으며 그 안에 살던 두 고승이 밖으로 나와 현신한 것이니 이는 마애불이란 바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님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아직도 설왕설래되고 있는 삼존불이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설화는 믿으면서도 굳이 ‘두 도승’이라는 부분을 간과해 버리는 자가당착이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후대에 우협시를 세웠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애불이 새겨지던 당시에 이미 삼존불이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여전히 남는 궁금증은 이 거대한 부처님의 존재이다. 나는 그 답을 남한강 물길을 오가는 뱃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던 충주의 창동이나 여주 계신리의 마애불에서 찾는다. 한양에서 개경을 향하거나 중국으로 사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무사안전을 빌어주며 동시에 랜드마크(land mark)적인 역할을 하던 부처님이라고 믿고 싶다. 그것은 이 길을 무수히 오가고 난 다음이라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미련스럽게도 혜음령에서 부터 내려오는 길을 되풀이해서 다니고서야 먼 곳에서 나타나는 부처님의 존재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선뜻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먼 곳에서 두어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키가 큰 사람일지라도 부처님 앞에서는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올려다봐야 하기에 적어도 부처님을 향한 예경의 장소로는 지금의 용암사 마당쯤은 되어야 그나마 부처님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부처님이 눈에 들어오는 먼 곳에서부터 예경의 마음을 사그라트리지 않은 채 다가오는 것이다. 짐작해 보라. 고려와 조선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과객들이 마애불 앞을 지났을 것이다. 길은 경의대로(京義大路)라고 불렀으며 연행로, 관서대로, 의주로라고도 했다. 서대문을 나와 무악재~고양 삼송 덕수원~신원동 새원~고양동 벽제역~파주 혜음원~광탄~임진나루를 거친 뒤 개성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마애불이 있는 용미리라는 곳은 고려의 국립호텔과도 성격이었다는 혜음원을 제외하면 번성한 마을이라기보다 더러 사대부들의 묘들만 존재하는 허허벌판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니 혜음령의 혜음원을 떠난 사람들은 석불입상의 존재야 말로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을 것이며, 개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는 석불입상만 지나면 혜음원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존재였지 않았겠는가. 김부식이 지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따르면 혜음사는 혜음원 곁에 있었으며 허물어진 당우를 1120년 2월에 새롭게 불사를 시작하여 1122년 2월에 마쳤다고 되어 있다. 그 글 앞부분에 당시 일대의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이 있다. “봉성현(峯城縣, 경기 파주) 남쪽 20리쯤에 작은 절이 하나 있었다. 허물어진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석사동(石寺洞)이라 부른다. 동남쪽 모든 고을에서 개경(開京)으로 올라오는 사람과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 이 길로 다니기 때문에, 사람은 어깨가 스치고 말은 발굽이 닿아, 분주하여 인적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서, 범과 이리가 떼 지어 살면서 편안하고 이로운 곳으로 여기고는 숨어서 엿보고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쳤다. 이뿐 아니라, 간혹 도둑의 무리가 그곳이 숲이 우거져 숨기 쉽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빼앗기 쉽기 때문에, 여기 와서 간악한 짓을 하였다. 양쪽의 행인이 주저하며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여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한 뒤라야 지나갔다. 그런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자가 한 해에 수백 명이나 되었다.” 어떤가. 이러한 길가에 부처님이 계시며 그 모습 또한 거대하여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면 그 존재감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달 밝은 밤이면 길 나서보라. 혜음령을 넘어 가면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나는 부처님 두 분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일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기록문학가 ■ 특징 갓 쓰고 합장…전형 벗어난 독특한 불상 파주 용미리 마애석불입상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의 용암사 경내에 있다.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었으며 큰 바위벽에 불신을 조각하고 불두는 다른 돌에 조각하여 불신 위에 올려놓았다. 불상은 모두 두 구가 조성되었으며 손의 모양 그리고 머리에 쓴 모자만 다를 뿐 같은 양식이다. 부처님 뒤로 오르면 불두의 크기에 우선 놀라고 목에 깃을 만든 것에 또 놀란다. 반드시 뒤편으로 올라 보기 바란다. 두 구의 불상 중 좀 더 커 보이는 오른쪽의 불상은 둥근 갓(圓笠)을 썼으며 왼쪽은 사각형 갓(方笠)을 썼다. 상호 또한 갓 모양에 맞게 둥근 갓을 쓴 불상은 계란형이며 사각형 갓을 쓴 불상은 투박한 느낌의 사각형이다. 이는 모두 불상의 전형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또 손은 왼쪽은 가슴께에 모아 합장을 했으며 오른쪽 불상은 양손에 걸쳐 지물을 들고 있다. 지물의 끝에는 연봉이 있었을 법 하지만 대개의 연봉이 구리와 같은 금속으로 되어 있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떨어져 나간 것이라 보여 진다. 양쪽 불상 모두 목에 삼도가 있으며 백호는 왼쪽 불상에만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모두 가슴의 띠 매듭이 아름답다. 이승만 정권 당시 이 마애불을 삼존불을 만들 요량으로 오른쪽 부처님 어깨 위에 전혀 비례도 맞지 않는 석불입상을 올려놓았다가 마을 주민들이 철거해 지금은 사라졌다. ● 가는 길 지하철 불광역에서 광탄행 시외버스(703번) 이용, 용암사 앞 하차 / 10분 간격운행 (버스 하차후 도보 약 100m) 승용차로는 구파발 - 문산방면 1번 국도로 6.4km - 대자동 3거리 - 벽제역 - 39번 국도 - 용미리 서울시립공동묘지 방향 311번 지방도 - 벽제교(삼거리)에서 왼쪽 방향 - 5km쯤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석불입상 [불교신문 2355호/ 8월2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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