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금강 묘길상 마애불좌상 |
내금강으로 향하는 길은 한 치 앞도 가늠하지 못할 만큼 드센 빗줄기와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만물상은 얼핏얼핏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차창 밖으로 설핏 지나가는 모양만으로는 내가 그것을 봤다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산 속으로 발을 들여 놓을수록 기절(奇絶)과 웅혼(雄渾) 그리고 장엄(莊嚴)하다는 말의 진면목을 깨닫고 우울해 지고 말았다. 그동안 나의 얕은 식견으로 사용했던 그 말들의 풍경을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견주니 너무도 초라해 모두 거둬들여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계삼소 버금가는 ‘만폭삼소’…내금강의 진면목 북한당국 국보급 문화재 제46호 지정 전형적인 고려시대 마애불 특성 갖춰 40여m 넘는 바위에 감실 파고 봉안 높이 15m 손가락 길이 2~3m 巨佛 눈에 비치는 풍경을 두고 사람마다 제각각의 깜냥으로 바라보고 그 감흥을 말하는 것이야 어쩌겠느냐 마는 금강산만큼 언거언래(言去言來)가 무성했던 곳도 드물었지 싶다. 누구는 금강산을 다녀 온 후 ‘본 것이 들은 것만 못하다(見不如聞)’고 투덜거렸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들은 것이 본 것만 못하다(聞不如見)’고 했으며, ‘눈으로 본 풍경을 붓이나 혀로써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風景難以筆舌盡記)’고 까지 했으니 말이다. 사진설명 : 묘길상 마애불좌상은 내금강의 만폭동 계곡 가장 깊숙한 곳에 계신다. 법기보살이 상주하는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오르려면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윽고 온정령(857m)을 넘자 골기(骨氣)가 형형하던 산은 금세 굼실거리는 육산(肉山)의 모습으로 바뀌어 차창 너머로 펼쳐졌다. 들과 논을 지나 40여분이나 달렸을까. 내금강역이 있었던 금강읍에 다다라 내강리로 접어들자 왼쪽으로 장연사(長淵寺) 삼층석탑이 가물거리듯 보이고 이내 길은 컴컴해졌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언덕에 피어난 망초꽃 사이로 부도가 설핏 보이는가 싶더니 왼쪽으로 비석군과 부도밭이 나타나자 이내 장안사터였고 내처 표훈사 주차장에 다다랐다. 그러나 절집은 건성건성 훑어 볼 뿐 걸음은 금강문을 지나 만폭동으로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그렇게 서둘러 비 내리는 만천골로 나선 까닭은 만폭팔담을 보기 위함도 아니었고, 더구나 봉래(蓬萊) 양사언이 썼다는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和洞天)’이라는 각자를 보기 위함도, 또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보덕굴이나 그토록 넓었다는 마하연 선방터를 찾아보기 위함도 아니었다. 다만 묘길상암터에 남아 있는 마애불 앞에 누구보다 먼저 서서 지긋하게 오래도록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온 산은 안개에 휩싸이고 비는 거세졌다간 잦아들기를 되풀이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어찌 아름답기 그지없는 만폭팔담을 모른 체 지나칠 수 있었을 까. 이미 젖은 몸이려니 아무리 비바람 몰아치는 반석 위 일지라도 잠시 앉았다가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이 어떤 길이던가. 그 많은 유자(儒者)들이 앞 다투어 이곳으로 찾아들 무렵, 스님들은 그들을 편히 모시기 위해 어깨에 남녀(藍輿)를 멘 교꾼으로 전락하여 걸었던 길이 아니던가. 선정에 들어 공부를 닦기는 커녕 가파른 돌길과 나무다리를 무시로 건너며 유람을 도왔건만 더러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1672년 7월24일부터 8월24일까지 금강산 일대를 두루 유람한 백호(白湖) 윤휴(1617~1680)의 기행문인 <풍악록(楓岳錄)>은 그 꼼꼼한 기록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 또한 스님들이 멘 남여를 타고 8월6일 만폭동 유람에 나섰다. 양사언의 글씨가 있는 금강대에 이르러 용문석(龍門石)이라는 글씨를 남기고 만폭팔담을 차례로 올라 화룡담(火龍潭)에 다다라 만폭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시를 한 수 짓고 그것을 다시 바위에 썼다. 그리고는 묘길상 옛터에서 그는 말한다. “바위 사이에다가 장육상(丈六像)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나옹(懶翁)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 불도(佛徒)들이 허황한 짓들을 하여 이 명산의 맑은 운치를 모두 더럽혀 놓았으니 가탄스러운 일이다.”라고 말이다. 무리지어 오르는 길이어서 백호가 썼다는 만폭동 시가 그 후에 새겨졌는지는 미처 살펴보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들 지금의 만폭동을 오르며 바위마다 빼곡하게 새겨진 각자들이 정신을 산란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안 그래도 어지럽게 흩어진 선비들의 각자에 더해 주체사상을 선동하며 고양하는 각자까지 굵게 새겨졌으니 말이다. 추사(秋史)가 그와 긴밀한 교류를 했던 권돈인(1783~1859)이 금강산 유람을 떠나게 되자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그 내용이 되새겨 둘만 하다. 추사는 금강산을 즐기는 방법으로 신선의 놀이(仙遊)와 선가의 놀이(禪遊) 그리고 유자의 놀이(儒遊)는 서로 다르지만 산이란 본디 다르지 않으므로 산중에서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느끼고 돌아오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경계해야할 놀이로는 명성을 탐하여 노니는 명유(名遊)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설명 : 삼불암의 뒤로 돌아가면 왼쪽 측면에 관음보살이 뒷면에는 약합을 들고 있는 여래불, 그리고 60구에 이르는 작은 불상들이 조각 되어 있다. ‘여산의 진면목’이란 진(晉) 나라 때 여산 동림사(東林寺)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도연명, 육수정과 같은 사람들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서로 유쾌하게 종유(從遊)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그 아름다운 장면을 떠 올리며 해동의 유마거사라 불리던 추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에 화엄학을 되살린 연담(蓮潭) 스님으로부터 이어지는 화엄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와 종유했던 초의(草衣) 의순스님(1786 ~1866)은 연담의 법손인 완호(玩虎) 윤우스님(1758~1826)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또한 다산(茶山)과 교유했던 아암(兒庵) 혜장스님(1772~1811) 또한 연담으로부터 이어지는 법손이며 초의스님과는 도반이었으니 그들 모두와 더불어 예(藝)와 학(學) 그리고 불(佛)을 논했던 추사는 결국 숨을 거두기 직전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아 ‘여산의 진면목’을 이루지 않았던가. 나 또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여산의 진면목’, 그 언저리에라도 가 닿을 수 있을까. 마음을 다잡으며 마하연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는 삼거리를 지났다. 내리막을 잠시 걸었을까. 순간 묘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바람 한 점 없이 내리는 비 탓이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팔뚝에 소름이 돋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곳이었다. 묘길상 부처님이 계신 곳이 말이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고개를 들자 부처님은 멀리 하늘에서부터 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만 같았다. 불현듯 만물상을 넘을 때 느꼈던 감흥이 부처님 앞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곳까지 다다르는 길이 기절했다면 부처님은 웅혼했으며 그리고 장엄했다. 그 크기에 압도당하고 섬세하고 또렷함에 위축되었지만 입가에는 이제야 왔느냐며 곧 터뜨릴 것만 같은 파안일소(破顔一笑)를 머금고 계셨으니 발길은 절로 그 앞으로 나아갔고 머리 숙여 예를 갖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경탄해 마지않았던 만폭동의 모든 아름다움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려 한 가닥 터럭만큼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의 아름다움이 너무도 형형하고 거세어 이미 스쳐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 볼 틈이 없었던 것이다. 때로 머릿속이 하얗게 백짓장이 된다더니 이것을 두고 이르는 말인가 싶었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조차 사라졌지만 얼굴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여전했다. 굵지도 않은 빗방울이 눈에 스며든 것인가. 한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 온산을 뒤덮은 안개는 물론 부처님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부처님은 내 속에 한 줄기 빛을 남겨 놓았으니 나는 황홀하고 또 황홀하여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부처님은 나에게 공(空)을 선물 한 것이다. <화엄경>을 두루 살펴 참으로 깨닫는다면, 눈의 막(?)이 사라져 없어지고, 마음의 꽃이 피어난다고 하더니 그 꽃이 잠시 고독한 순례자의 마음을 다독거리려 피었다가 진 것만 같았다. 그만 눈을 떴다. 안개는 먼 산으로부터 내 곁으로 쉬지 않고 휘돌아들고 부처님은 그 자리에 여여(如如)했다. 그러나 계속 머물 수만은 없었다. 어느덧 모두 산 아래로 내려가고 나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북측이나 남측의 안내원들이 서둘러 내려가기를 종용하는 것 같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미련이 남을 것만 같아 휙 속절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발길을 되돌리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비바람의 법문을 들으며 향연(香煙)과도 같은 안개를 벗 삼아 만폭동을 되짚어 내려오며 묘길상 부처님에게 기원을 올렸다. 남과 북을 회통하여 서로 거리낌 없는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이 한반도에 한 송이의 아름다운 화엄의 꽃이 피어나게 하여 달라고 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아름다운 만폭동을 삼보일배가 아니라 삼배일보로 엎드려 당신을 찾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사진설명 : 문(問) 바위라고도 불리는 삼불암은 장안사터를 지나 표훈사에 이르기 전 계곡 건너에 있다. 나옹선사가 새겼다고 전하며 연화 족좌(足座)가 아름다우며 보물급 문화재 제41호다. 상념에 잠겨 내려오는데 어느새 내 곁에는 북측 안내원들이 다가와 있었다. 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백화암터를 지나 다다른 곳은 삼불암이었다.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졌지만 마음으로 세 분 부처님에게 예를 올리는 동안 북측 안내원들이 우산으로 받쳐 주었다. 생각지도 않던 일이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다시 그들과 계곡을 걸었다. 그들에게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렇게도 살 수 있느냐며 눈을 휘둥그레 뜨곤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장안사터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비록 전나무 빼곡한 길, 5리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걷는 내내 서로의 말에 놀라기도 하고 맞장구도 치면서 웃음소리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인가. 비록 만천교 앞에서 멈춰야했지만 내가 경험한 것은 ‘호계삼소’에 버금가는 부처님과 남과 북이 함께한 21세기의 ‘만폭삼소(萬瀑三笑)’였으며 ‘여산의 진면목’과 견줄만한 ‘내금강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특징 ‘파안일소’머금은 작은 입 매력 내금강 묘길상 마애불좌상은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46호이며 강원도 금강군 금강읍 내강리 만폭동에 있다. 천하절승인 내금강의 만폭동 계곡을 따라 펼쳐진 장안사와 백화암 그리고 표훈사와 보덕굴 마지막으로 마하연을 차례로 지나면 그 끝에 있다. 불상은 40여m가 넘는 바위벽에 바위 면을 거칠게 감실처럼 파내고 그 안에 새겼으며 높이는 15m, 양 무릎의 끝은 9.5m, 손가락 하나의 길이만도 2~3m나 되는 거불(巨佛)이다. 사진설명 : 묘길상 마애불의 상호는 바라보는 사람조차 웃음을 머금게 한다. 상호는 고부조로 새겼지만 어깨 아래로는 저부조로 새긴 전형적인 고려시대 마애불을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머리는 민머리이며 이마에는 백호,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으며 수인은 아미타구품인이며 결가부좌하고 앉은 발은 오른발만 밖으로 내 놓았을 뿐 왼발은 군의 속에 묻혀 있다. 또 대개의 마애불에 표현되는 연화대좌가 생략되어 바위 위에 털썩 앉은 것 같이 보인다. 묘길상 마애불만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상호에 있다. 살집이 풍부하고 두툼하여 후덕하게 생긴 얼굴 모양은 물론 거불에서 풍겨 나오는 권위를 상쇄시키는 것은 단연코 입이다. 눈이나 코에 비해 작게 표현된 입의 크기는 물론 이제 곧 웃음을 터뜨리거나 사부대중들을 향해 법문이라도 하시려는 양 벙긋거리는 입 초리의 표현은 묘길상 마애불이 지닌 매력이다. 그러나 묘길상(妙吉祥)이라는 것은 문수보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래불인 이 마애불의 존명으로는 적합하지가 않다. 물론 마애불 앞에 묘길상암이라는 암자가 있기도 했으며 마애불 곁에 직암(直庵) 윤사국이 쓴 ‘妙吉祥’이라는 글씨 때문에 그렇게 불렀지만 이제 존명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마애불 앞에 있는 석등은 국보급 문화재 제47호이다. 가는 길 / 누구나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금강산 관광의 내금강 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표훈사까지는 버스로 이동하며 표훈사에서부터 마애불 까지는 만폭동 계곡 사이로 오른다. 대략 3.6km가량, 왕복 두 시간쯤 걸리는 거리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표훈사에서 장안사터 까지도 걸을 수 있다. 이지누/기록문학가 [불교신문 2348호/ 8월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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