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 좌상 |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모든 길은 시작만 있을 뿐 그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뭇없이 사라져간 길의 저 먼 곳에는 안개가 머물고 있었으며 그가 길의 끝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었다. 혼쭐이라도 낼 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지만 그는 저만치 있을 뿐 그와의 간격은 좀체 좁힐 수가 없었다. 망연하여 뒤돌아보면 내가 떠나온 곳으로 부터의 길 또한 스멀스멀 피어나는 안개가 삼켜버려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떠나온 곳으로부터 가서 닿아야 할 곳까지 길은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또렷한 곳이라고는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뿐이었다. “화엄법계 들어 법신法身 깨닫고 ‘반야의 배’ 항해” 산기슭 자연 암석에 새겨진 불상 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 고졸해 보이는 ‘눈 코 입’ 해학적 10세기후반 11세기초 조성된 듯 어디로 가야 할까. 더욱 짙어진 안개 때문인가. 태양조차 붉은 빛을 잃어버린 채 말갛게 떠오르는 들판을 거닐다가 문득 외로움에 휩싸여 버렸다. 한 치 마음속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느라 걸음은 허영허영 헐거웠고 머릿속에는 조선 후기, 철따라 수선(修禪)하러 찾아든 납자들에게조차 화엄학 강설을 쉬지 않았다는 연담(蓮潭) 유일(1720~1799) 스님의 시 한편이 선명했다. “화엄법계 중중무진한 설법(華嚴法界重重說) / 무수한 세계 조금의 틈도 없네.(刹刹塵塵無間歇) / 제비소리, 꾀꼬리 지저귐이 광장설일세(燕語鶯吟廣長舌) / 분별하지 말라(休分別) / 누런 꽃, 푸른 대가 비로자나불이라네.(黃花翠竹毘盧佛)” 사진설명 : 청주 정하리 마애비로자나불 좌상. 경북 봉화 동면리 미륵골의 마애비로자나불 입상에 비해 고졸한 느낌이 들며 그 둘은 입상과 좌상 이라는 점 그리고 지권인을 한 수인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찰진(刹塵)은 끝없이 이어져 한 치의 틈도 없으니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말하는 것이리라. 연담은 뭇 새들의 지저귐과 대지를 감싼 나무와 꽃이 곧 비로자나불이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고려의 유학자인 동산수(東山搜) 최자(1188~1260)는 개경의 왕륜사에 머물면서 “하늘과 땅, 해와 달, 뭇 별들이(乾坤日月與星辰) / 모두 다 비로의 법신(同是毗盧一法身)”이라고 노래했다. 이는 곧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니(一中一切多中一) /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一卽一切多卽一) /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一微塵中含十方) / 모든 티끌 속에도 또한 그러하다(一切塵中亦如是)”라고 노래한 의상(義湘, 625~702) 스님의 화엄일승법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토록 아름다운 화엄의 연화장세계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그가 곧 비로자나불이며 안개를 헤치고 이슬에 젖은 발로 길을 찾아 나선 외로운 순례자를 그윽한 미소로 맞이하는 저 부처님 또한 비로자나불이다. 나라 안 곳곳, 화려거나 수더분함을 가리지 않고 전각마다 비로자나불이 주존불(主尊佛)로 모셔진 곳은 흔하지만 산기슭 외딴 곳의 바위에 새겨진 그것은 드물기 짝이 없으니 그를 찾는 나의 마음 또한 순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작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매느라 이슬에 젖어버린 발로 그 앞에 섰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예경만 올렸을 뿐 여느 때와 같이 그 모습을 낱낱이 파헤치지 않았다. 고려 고종 10년인 1223년, 거란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모실 요량으로 장육비로자나불을 조성했던 학주(學珠)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스님은 불상이 완성되자 우선 진강공(晉康公) 최충헌(1149~1219)의 맏아들인 최이(崔怡, ?~1249), 곧 최우(崔瑀)의 별채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집은 호화롭기로 소문났으며 불상을 모실 감실이 따로 있는 집이었다. 장육비로자나불이 그 집에 안치되었다는 소문이 나자 개경에 거주하던 모든 사람들이 유불을 가리지 않고 참배하며 두 손을 치켜들고 엎드려 절을 하는 막배(膜拜)를 서슴지 않았고 앞 다투어 시를 지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찬탄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학주 스님이 또 다시 향산사(香山寺)에 장육비로자나불을 소상(塑像)으로 조성하고 백운거사 이규보에게 기(記)를 지어 달라고 청했다. 사진설명 :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께에 들어 올려 왼손의 검지를 감싼 전형적인 지권인이다. 그러자 이규보는 “비로대사 맑고 조촐한 몸(毗盧大士淸淨體) / 길이가 얼마인지 나는 모르네.(長甚許吾未知) / 그대가 또 장륙을 만들려는가.(子復以爲丈六耶) / 장차 무슨 자로 헤아릴 것인고(將甚尺而度之) / 눈 부릅뜨고 보면 더욱 가늘어서(目而視愈微) / 털끝이나 하루살이도 비교 안 되고(秋毫難與較) / 눈 감고 보면 너무도 커서(閉眼而觀斗巍大) / 천지나 육합도 오히려 작네.(天地六合尙爲小) / 만약에 자로 재고 길(丈)로 계산한다면(若以尺計丈以量) / 석녀나 목아가 손뼉치고 웃으리.(石女木兒撫掌笑)”라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외물에 치우치지 않으며 오히려 비로자나 법신이 머물고 있는 화엄의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동안 이산 저산, 골골샅샅 불적(佛跡)들을 찾아 헤매며 줄곧 눈에 보이는 것만을 헤아리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떠든 것이 부끄러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예술이란 각각의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경전에 그 바탕을 둔 것임에도 경전은 등한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지고 파헤치려 들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은 교학을 등한시하며 참선에만 몰두하는 것과 같을 것이며 또한 참선을 뒤로 한 채 교학에만 매달리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더구나 나를 미워하는 무리들을 그들과 똑같이 미워하며 상대하지 않으려했지만 그 반대인 사람들은 무턱대고 챙기며 그들과 무리지어 다니기를 즐겼으니 이 또한 꾸지람을 들어야 마땅할 일일 것이다. 애증이 같은 것이며 교와 선이 서로 이끌고 받쳐주지 않으면 결코 그 아름답다는 연화장세계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또한 경전과 예술의 표현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마애비로자나불 앞에서 다시금 되새기게 되니 유(儒)와 불(佛)의 차이는 또 어찌할까. 끊이지 않는 강설을 통해 화엄의 종지를 되살리고 다시 퍼트리며 부처님 앞으로 나아간 연담스님은 대희상인(大希上人)에게 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자유롭게 노니는 비구 (騰騰任運老比丘) / 성불도 천상에 태어남도 모두 구하지 않았네.(成佛生天摠不求) / 서축의 경전 백마에 실어 왔고(西竺仙經輸白馬)/ 동관의 노자는 푸른 소를 탔네.(東關夫子駕靑牛) / 삼생에 길이 있어 좋은 때에 와서(三生有路來時好)/ 만 가지 경계 마음 따라 가는 곳 그윽하네.(萬境隨心轉處幽) / 남화경을 얻어 이미 도를 알았고(記得南華曾解道) / 대붕과 메추라기 본래 함께 노니네.(大鵬斥本同遊)”라고 말이다. 불경과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남화경>을 말하고 있으니 남화는 곧 장자가 살던 마을 이름이며 당 헌종은 <장자>를 <남화진경南華眞經>으로 높여서 불렀다. 그 셋이 서로 습합(習合)되어 함께 노닌다고 했으니 원융무애로 회통한 또 다른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담 스님은 다시 노래한다. “어느 곳 어느 때 서로 만나지 못할까.(何處何時相對) / 대천세계 모두 한 선상일세.(大千都是一禪床)”이라고 말이다. 도시의 길 가 산기슭, 쉴 새 없이 오가는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은 물론 개울 건너 공장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를 가릉빈가의 울음인 양 듣고 계신 비로자나불 앞에서 나는 그만 숙연해 지고 말았다.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선학(先學)들의 밝은 혜안과 깨달음의 언저리조차 너무도 먼 곳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4시간이 넘도록 비로자나 부처님 앞을 떠나지 않았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길과 불과 한 뼘 남짓 떨어진 곳에서 머무르며 되짚어 보고 아무리 스스로를 후한 눈으로 보려고 애를 써도 나의 현재는 툭 불거진 마음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끝이 날카로웠으니 마치 가시 돋친 탱자나무와도 같았던 것이다. 단단하기는 말할 것도 없으면서 그것조차 모자라 가시까지 품은 탱자나무 말이다. 나의 단단함도 탱자나무의 그것에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집으로 똘똘 뭉쳐진 것일 뿐일 테니 흐르는 땀에라도 씻겨 나가기를 바란 것일까. 간혹 짙은 구름 사이로 송곳 같은 햇살이 얼굴에 꽂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 모난 것들 모두 버리고 화엄의 법계에 들어가서 비로자나불의 법신을 깨달으며, 반야(般若)의 배를 타고 대천세계를 바람처럼 떠 돌 수 있을까. 오늘 새벽, 짙은 안개가 그 길을 가르쳐 준 것 같았다. 시작도 그리고 끝마저도 사라지게 한 안개는 줄곧 내가 발 디디는 발밑만을 열어 주었지 않은가. 촉촉하게 안개에 젖어 끝이라고 여기던 곳에 다다르면 어느새 끝은 저만치 물러 나 있었으며 좀 전 까지 보이던 그 끝은 나에게 다시 현재였지 않은가. 끝없이 반복되던 새벽 길, 그 길이 순례를 핑계 삼아 떠난 구도행과 다를 것이 무엇 있을까. 그렇게 나의 현재가 확인될 때 마다 마음속에서는 ‘끙’ 하는 외마디 신음이 흘렀다. “아! 화엄이여”하고 말이다. 정오가 가까웠을 무렵 홀연히 행장을 챙겼다. 그리곤 세 번 절하고 뻔뻔스러움으로 무장했다.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어찌 가던 길 그칠 것이며, 아직 다다르지 못했다고 어찌 가던 길 되돌릴 것이냐고 말이다. 부족한 것 알았으니 메우면 될 것이고, 지나친 것 알았으니 덜어내면 될 것이다. 또 그릇된 것 알았으니 고치면 될 것을, 연담 스님의 꾸중과 같은 시 한 줄 위안 삼아 읊조리며 그만 돌아섰다. “우물을 파면 물을 보아야 하고(鑿井須及泉) / 불을 일으키면 연기가 나야 한다.(鑽火期出烟) / 도를 배우는 자를 위해 말하노니(爲報學道人) / 스스로 포기함은 불가한 일(自畵終不可) / 오늘의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으면(不經今日難) / 뒷날의 쉬운 일을 어떻게 얻나(安得後時易)/ 섣달의 매화는 찬 눈을 견디어(臘梅耐雪寒) / 봄이 오면 향기가 코를 찌른다네.(春來香撲鼻)” 이지누 / 기록문학가 ■특징 법의는 통견 백호흔적 뚜렷 나라 안에서 마애비로자나불을 보기란 쉽지 않다. 지금껏 알려진 것으로는 지난 8회에 연재한 경북 봉화군 재산면 동면 1리의 소내골에 있는 마애비로자나불 입상과 이번에 다녀 온 충북 청주시 정하리 마애비로자나불 좌상이 유일하다. 마을 사람들이 돌산이라고 부르는 산기슭의 자연 암석에 새겨진 정하리 마애비로자나불 좌상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되었으며 상호 부분은 저부조, 그 아래 상체는 선각에 가까운 얕은 부조 그리고 결가부좌한 다리와 연화좌는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께에 들어 올려 왼손의 검지를 감싼 전형적인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어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가락 전체를 감싼 봉화의 마애비로자나불 입상과 차이를 보인다. 법의는 통견이며 한줄기 두광에 쌓인 상호는 통일신라의 세련된 모습에서 벗어나 있으나 이마에는 백호의 흔적이 뚜렷하다. 마을사람들 이야기로는 움푹 파인 백호 자리에 금으로 만든 구슬이 박혀 있었는데 누군가가 빼 갔다고 한다. 백호 위 이마부분에서 선명한 조각은 끝이 나고 그 위로는 육계인 듯 희미한 조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를 두고 관모(官帽)를 썼다고도 하는데 분명치 않다. 만약 관모를 쓴 것이 맞는다고 한다면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석탑에 모셔진 두건을 쓴 비로자나불 좌상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고졸하게 보이는 눈, 코, 입은 해학적인 느낌마저 들며 코끝은 문드러지고 입은 삐뚤게 조각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오른팔의 팔목 근처가 깨져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로 선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디 바위의 생김이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조성시기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로 보는 것이 옳지 싶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의 크기는 전체높이가 3.23m 상폭 1.3m 하폭 2.82m 두께 1.09m이며 전면 전체를 활용하여 조각되었다. 사진설명 : 경북 봉화의 마애비로자나불 입상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가락 전체를 감싸 쥐고 있다. 가는 길 / 중부고속도로 오창 나들목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나들목에서 청주공항방면으로 나가 17번국도 청주방향으로 우회전, 4km 가량 직진하다가 율량교차로에서 버스터미널 방향으로 우회전 한다. 2km 가량 직진, 정하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300m 남짓 정하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불교신문 2346호/ 7월2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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