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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호압사의 호랑이


“저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주시오.” “걱정할 것 없소, 장군. 호랑이란 본디 꼬리를 밟히면 꼼짝도 못하는 짐승이오.” 호랑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맹수다. 예전 비디오테이프의 불법복사 근절 경고문에서 보듯 호환(虎患)은 인간에게 전쟁 못지않은 비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에 관한 언급이 총 635회 나온다. 광해군은 임지로 떠나는 평산(平山) 부사에게 지역에 호환이 심해 파발(擺撥) 길이 끊어질 지경이니 온힘을 다해 호랑이를 잡으라고 명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야산에서 왼팔만 나뒹구는 사냥꾼의 시체를 목격하기도 했고 온 가족이 호랑이의 먹이로 진상돼 절규하는 아낙을 위로하기도 했다. 구한말 무력폭동을 우려한 일본이 조선인들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면서 식인호(食人虎)에 의한 피해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 난세를 위로하다



100년전 만 해도 산골 주민들은 동구 밖 외출조차 저어하는 형편이었다. 형제애나 복수심은 극강(極强)의 공포 앞에서 비굴하고 무력했다. 민초들은 이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를 영물(靈物)로 섬기면서 안녕을 빌었다. 인간이 아직 먹이사슬의 꼭짓점으로 등극하기 전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대대적인 포획작전이 시작됐고 호랑이밥들의 후손들은 천적을 멸종시키는 데 기어이 성공했다. 기아 타이거즈의 호랑이는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호랑이의 화려한 줄무늬 거죽이나 용맹이라는 이미지만 쏙쏙 빼먹으며 조상의 원수를 갚았던 기억을 곱씹는다.

<사진설명> 호압사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불상.

호압(虎壓)은 호랑이의 기세를 누른다는 뜻이다. 호압사가 위치한 호암산(虎巖山)은 관악산의 지류로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약사전(藥師殿) 뒤로 ‘돌호랑이’의 질펀한 엉덩이가 보인다. 조선을 건국한 위정자들은 이것이 나라의 앞날을 망친다고 믿었다. 호압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시흥현의 현감을 지냈다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나온다.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또 다른 전설은 태조 이성계가 주인공이다.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도읍을 한성으로 옮긴 조선왕조는 경복궁 축조에 나섰다. 전국의 이름난 장인들을 동원해 착수한 궁궐 공사는 걸핏하면 화재와 붕괴사고에 시달렸다. 상반신은 호랑이고 하반신은 그나마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까지 나타나 왕궁을 박살내고 유유히 사라지는 파국을 경험하기도 했다.

거듭되는 액운에 망연자실한 태조에게 어느 날 범상치 않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라면서도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산세로, 흉조였다. 태조가 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노인은 호랑이의 꼬리 부분에 절을 세우라 했다. 그렇게 호압사가 생겼다. 노인은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일 것이란 추측이다. 놀라운 예지를 발휘하는 스님을 폄훼하기 위해 유생들이 고의적으로 신상을 은폐했다는 주장이다.

밤길에 뒤를 노리던 야수의 위세는 오늘날 치한과 퍽치기,

음주운전차량이 대체했다. 역사가 반복되듯 호랑이도

재림하는 셈이다. 어느 절이든 절을 찾는 사람들은

호압사의 약사여래불이 그러하듯 부처님이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주길 원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런 마음이다.

골치 아픈 현실을 막연한 은유로 처리하는 게 전설의 속성이다. 서울 금천구 시흥 2동의 호압사는 조선시대 시흥현 권역이었다. 시흥현은 서울 영등포구.관악구.금천구.구로구.동작구, 경기도 안양시.광명시.군포시 일대를 장악한 옛 고을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주(衿州)란 지명을 하사했으며 조선 성종 재위 때 시흥(始興)으로 개칭됐다. 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예로부터 경기도 토호들의 근거지였다.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 이방원이 마지막으로 포섭한 세력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병(私兵)을 길러 만만치 않은 세를 과시했다.

이방원이 시흥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의 습격으로 군사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성계의 호랑이나 이방원의 호랑이나 동일범으로 풀이된다. 고조선의 정기를 계승한 조선의 건국이 신화라면 이씨에 의한 왕위 찬탈은 현실이다. 자신들의 소행을 따라해 누군가 또 다른 역성(易姓)을 시도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새로운 사직에게, 독자적인 입지를 굳힌 시흥 호족들은 충분히 호랑이가 될 만 했다. 결국 호암산 중턱의 호압사는 반은 적군이고 반은 아군인 이들의 동정을 살피는 기지였으리란 짐작이다.

조선이 표방한 국가 이데올로기는 유교였지만 국가지대사는 으레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라 결정했다. 큰일일수록 공자보다는 천지의 신명에 기댔다. 인문학은 고금을 막론하고 평시에나 대우받는 학문이다.

성현의 말씀은 한가할 때 들으면 심금을 울리지만, 정작 난세일 때 칼이나 군사를 만들지 못한다. 일례로 숭례문(남대문)의 현판은 세로로 놓여 있다. 불이 나는 모양이 연상되는 숭(崇)엔 오행 상으로 화(火)의 열기가 서려 있다.

<사진설명> 호압사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호암산 자락. ‘호랑이’의 엉덩이 부분이다.

현판을 가로로 뉘어 불길을 누그려 트려야 수도의 안전을 기약할 수 있지만 뜻밖에도 세로로 세웠다. 기름을 부은 꼴이다. 서울 남쪽의 관악산은 풍수지리상 도성을 감싸는 외백호(外白虎)다. 남쪽이란 방위 역시 화(火)에 해당한다. 화기가 강한 관악산 기운의 1차 저지선이 한강이다. 한강으론 불안하다는 생각에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맞불’ 작전이다.

호압사는 철저하게 음양오행의 산물이다. 호암산. 호랑이는 십이지 가운데 인(寅)으로 목(木)의 문자다. 목생화(木生火). 상생 관계인 불과 나무가 만나면 불바다가 된다. 불바다는 상극인 금으로 막을 수 있다. 금극목(金剋木). 광물질인 돌은 금의 일종이다. 이런 연유로 조성된 것이 호압사 석조약사여래불상이다. 불상은 고려 말기 양식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돌덩이로 만든 탓에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복장유물을 넣지 못했고, 국보나 보물로 지정받을 수 있는 증거가 없다. 금천구 문화재자료 제8호다.

조선은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서쪽의 진관사, 북쪽의 승가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호압사 역시 주술 차원에서 세운 비보(秘寶) 사찰이다. 삶이 차고 넘쳤던 왕족들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부정했던 교조의 가르침을 거역하면서까지 초과학적인 부처님의 가피를 좇은 이유는 무엇인가. 감추기 어려운 꼬리가, 마음대로 다스리기 힘든 꼬리가 막막해서일 것이다. 병고와 죽음이란 절대적 약점 말이다.

어제의 아픔과 오늘의 아픔은 이유와 배경이 다르다. 그러나 아프다는 점에선 같다. 같아서 괴롭고 같아서 희망이 없다. 호암산의 호랑이는 정적(政敵)의 비유만이 아니라 관악산에 실재했던 맹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태초부터 골육을 뜯기고 가족을 잃은 사람의 수는 헤아리지 못한다. 밤길에 뒤를 노리던 야수의 위세는 오늘날 치한과 퍽치기, 음주운전차량이 대체했다. 역사가 반복되듯 호랑이도 재림하는 셈이다.

어느 절이든 절을 찾는 사람들은 호압사의 약사여래불이 그러하듯 부처님이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주길 원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런 마음이다. 호랑이와 사투를 벌인 흔적(?)인지 개금한 석조불상의 오른쪽 어깨가 피로 흥건하다. 피는 아니겠지만 피로 보인다. 사라졌지만 죽지 않는 호랑이처럼.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396호/ 1월26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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