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익숙하지 않다면 ‘김용사(金龍寺)’는 대번 ‘금용사’로 읽기 십상이다. 본래 운봉사(雲峰寺)였으나 김용이란 이름의 어느 부자로 인해 사찰명이 바뀌었다는 전설이다. 그의 아버지는 죄를 짓고 운봉사 아래 있는 용소(龍沼) 근처에 숨어 살았다. 못 앞에서 지성으로 부처님에게 속죄한 덕분에 용왕의 딸을 아내로 얻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용은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마을(김용리)과 마을에서 가장 큰 절의 명칭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꿀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모양이다. 아낌없는 시주와 지원으로 얻은 인심 덕분일 것이다. 18세기의 일로 추정된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자손들은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기억하기엔 주인공의 이름이 너무 흔하고 전설의 줄거리도 단조롭다. 자수성가한 사내는 마을과 절의 이름에 힘입어 가까스로 역사에 매달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죽은 역사다. 세상을 바꿀 힘은커녕 세상에 왜 있는지도 애매한 흔적인 탓이다.
흉물 안에도 순리와 욕망은 뒤섞여있다
차라리 산세로 보면 구름에 닿은 봉우리란 의미의 옛 사명(寺名)이 더 어울린다. 문경에서 김용사로 들어가는 길은 시골길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문경 간 고속버스 요금의 3배를 택시비로 치렀다.
전국 각지에 창궐한 터널에 일절 상하지 않은 길은 자유분방한 곡선으로 내달리며 인간의 읍리를 장악했다. 기세등등한 운달산이 깔아보는 아래로 길은 끊임없이 열리며 닫히고 굽으며 뻗었다. 구렁이 등에 올라탄 듯 두렵고 희한하고 조심스럽다.
<사진설명> 김용사로 들어가는 홍하문 입구.
길들의 과격한 결절(結節)은 순식간에 쌓이는 미터기 요금처럼 살아 움직였다. 김용사 홍하문(紅霞門)이 보이는 길 끝자락에서야 직선을 만난다. 차에서 내려 걸었다. 여기는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라며 한파주의보가 온몸 구석구석을 뒤졌다. 까마득한 겨울나무 숲 사이로 홍하문이 깨진 병 조각처럼 빛났다.
나뭇잎은 자국도 남지 않았지만 나무들은 몸통만으로도 기를 죽였다. 홍하문 이전의 길이 길이와 질감으로 위용을 드러냈다면 여기부터의 길은 부피와 양감에 주눅이 든다. 절 주변은 온통 거칠거나 질박한 것들뿐이다. 이래저래 막막한 이 길을 성철스님도 서암스님도 서옹스님도 걸었을 것이다. 김용사는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선지식들의 주석처로 명성이 높다. 뭐 하나 기댈 것 없는 자연은 끝내 기댈 것은 자기 자신뿐임을 뼈저리게 가르친다. 머무르면 깨달을 수밖에 없는 김용사는 굳이 ‘김용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절답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길은 똥을 만들어내는 몸속의 길이다.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어둡고 더럽다.
모두가 외면하고 혐오하는 길이지만
우리의 몸을 몸답게 만드는 길이다.
모든 것은 흘러야 산다는 걸 일깨우는 예덕(穢德).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리이자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욕망.
악취를 풍기는 흉물에서 본다. 무너지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운봉사는 서기 588년 운달조사가 사찰을 창건하며 붙인 이름이다. 김용사는 일제강점기 31본산 가운데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렸다. 한때 전각의 수만 48개동이었으며 소작미는 2000석을 넘었다. 경흥강숙(憬興講塾)이란 강원(講院)이 1937년까지만 해도 존재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방이라는 재미난 이력을 갖고 있는 설선당(說禪堂)은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었다. 성철스님이 팔공산 성전암에서 10년 무문관을 마친 후 1965년 대중에게 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곳이다.
경내에서 마주친 신도는 “20년 전 만해도 부처님오신날이면 등을 달러 온 불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말했다. 오늘날은 숲 속에 깊숙이 박힌 절의 형국처럼 사찰의 위상도 후미진 편이다. 김천 직지사(제8교구본사)가 본사 역할을 대신했으며 김용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편입됐다. 강원도 사라졌다. 1997년 실화로 설선당과 범종루, 해운암이 소실되는 화를 입기도 했다. 건물은 모두 원상 복구됐지만 김용의 운명이 스쳐 일견 씁쓸했다. 절에서는 화재 당시 흉측하게 타버린 무쇠솥을 한동안 그대로 보존했다. 사람들에게 무상(無常)을 가르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교보재(敎補材)는 없겠다는 뜻에서였다. 지금은 누군가 치워버렸다.
<사진설명> 3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김용사 해우소.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전락한다는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는 표식 가운데 똥만한 게 있을까 싶다. 김용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풍물은 지은 지 300년 된 해우소다. 토속적인 목조건물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요즘도 실제로 사용하는 화장실이다. 직사각형으로 뚫은 구멍 아래로 똥과 흙이 반쯤 얼어서 뒤엉켰다. 발밑에 ‘지옥’이 들끓고 있으니 한발 한발 딛는 데 정성이 실린다. 나무 바닥이 삐걱대기라도 하면 괜히 움찔하지만 기우다. 부안 내소사에도 전설적인 해우소가 존재한다. 1633년 중창불사 기록이 있는데 해우소도 당시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1882년에 지어진 영월 보덕사 해우소는 2003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등록됐다. 전통적인 해우소의 재질인 소나무는 그 자체로 단단하다. 더욱이 오랜 세월 배설물에 함유된 염분 등의 화학물질과 상호작용을 일으켜 웬만한 충격엔 균열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튼튼한 목재를 얻기 위해 소금물에 절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배설물을 처리하기도 쉽다. 자연의 정화에 맡겨두다가 양이 좀 많다 싶으면 쌀겨나 톱밥 등속을 덮어준다. 특별히 관리하고 손볼 필요가 없다는 무위성이 영구성을 보장해준 셈이다. 전소(全燒)와 중수(重修)의 지난한 반복으로 점철된 것이 우리나라 고찰들의 하나같은 역사다. 한반도를 훑고 간 숱한 전란들도 김용사 해우소는 건드리지 않았다.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백년을 건강하게 장수한 비결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몇몇 위인에게나 국한된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유명해지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은 똥을 눈다. 똥을 치우는 문제는 인류사의 오랜 화두였다. 기원전 2400년 고대 바빌로니아 유적에서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고 걸터앉는 방식의 수세식 변소가 확인됐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똥에 대한 관점도 진화(?)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페스트에 대처할 방편으로 대.소변을 이용하기도 했다. 대변을 모은 주머니를 목에 걸었고, 소변으로 목욕을 했다. 지독한 냄새가 병균을 쫓아낼 것이란 믿음에서였다. 이러한 선의의 오남용과 신에 대한 죄의 상징이라는 인식은 화장실 문화의 쇠퇴를 불러왔다.
가정의 화장실이 일반화되지 않은 19세기 초만 해도 시민들은 금방 배출한 따끈따끈한 똥을 창 밖으로 내던졌다. 남자가 여자의 바깥쪽으로 걷는 미덕은 똥 세례로부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거리에 낭자한 똥을 덜 밟기 위해 고안된 것이 하이힐이고 이 때는 남자들도 하이힐을 신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뒷간이라도 갖고 있었던 고대인들이 좀더 개명했던 격이다. 농작물의 거름으로 배설물을 사용할 줄 알았던 이들은 똥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갖고 있었다. 더럽지만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고 제대로 쓰면 이익을 낳는 물질이라는 것. 그들은 똥을 똥으로 인정했다.
파종하기 전 온 들녘은 비료 삼아 뿌린 똥의 냄새로 풍성하다. 결국 밥은 똥의 자식들이다. 똥은 인간이 맨몸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다. 사람이 사는 곳엔 반드시 똥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길은 똥을 만들어내는 몸속의 길이다.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어둡고 더럽다. 모두가 외면하고 혐오하는 길이지만 우리의 몸을 몸답게 만드는 길이다. 모든 것은 흘러야 산다는 걸 일깨우는 예덕(穢德).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리이자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욕망. 악취를 풍기는 흉물에서 본다. 무너지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문경=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398호/ 2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