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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갑사의 불족적


발은 가장 학대받는 신체부위다. 광고사진으로 찍혀 화제가 된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만 볼썽사나운 게 아니다. 사람의 발은 누구의 것이나 패이고 갈라지고 허물어졌다. 인체의 맨 밑바닥에서 온몸의 하중을 통째로 떠안은 탓이다. 비좁은 신발에 싸여 끊임없이 땅에 비벼지는 고역도 녹록치 않다. 중력과 마찰, 천상과 지상이 저지르는 고통의 틈바구니에서 발은 평생이 욕되고 불우하다. 많이 걷고 많이 일할수록 발은 엉망이 된다. 그러나 못난 발이 있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 끼니를 때우고 돈을 벌고 친구를 만나고 정보를 주고받고 … 일상사는 전부 손과 입이 주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발의 힘듦과 아픔이 선행돼야 가능한 결실이다. 발은 인생이다.



깊게 파인 주름마다 ‘깨달음의 향기’ 그윽

‘부처님 발자국’은 숭고함 드러내는 ‘聖物’

갑사 목판본, 존경심 담은 후대 작품인 듯

<사진> 갑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족적 목판.

부처님 역시 이 쓸모 있는 흉물에 힘입어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했다. 최초의 전법은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를 교화한 바라나시까지 걸었던 200km다. 발걸음마다 제자를 거두고 말씀을 남기며 교단을 세웠다. 결국 당신의 멍들고 부르튼 발이 없었다면 팔만대장경도 존재할 수 없었다. 불제자들은 부처님이 살아있을 당시 그분의 발을 씻기는 일은 최상의 예경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 오랜 기간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입멸(入滅)을 통해 육신을 버리고 아무런 형태도 남기지 않는 절대 공허로 승화했다. 교도들은 설령 예배를 위해서라도 교주의 몸을 형상화하는 일은 모독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깨닫고 도통했다 쳐도 끊임없이 먹이고 자주고 배설해줘야 하는 몸뚱이를 달고 사는 한 죽을 때까지 앓아야 하고 싸워야 하고 견뎌야 한다.

결국 불상은 궁극의 질곡마저 벗어던진 부처님에게 다시 멍에를 씌우는 ‘훼불’이었다. 불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 대중이 모신 성물(聖物)은 부처님의 발자국 곧 불족적(佛足跡)이었다. 불족적은 부처님의 숭고함을 상징하는 매개다. 성현들의 업적을 조사할 때 발자취를 좇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인도의 꼴카타 박물관,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소장된 불족적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관불삼매해경> 권1과 권6은 “불족적을 보고 존경하고 기뻐하면 한량없는 죄업이 소멸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공주 갑사(甲寺)가 불족적 목판을 갖고 있다. 검게 옻칠한 나무판에 부처님의 발바닥이 찍혔다. 갑사 이외에도 서울 봉은사, 양산 통도사,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본이 있다고 전한다. 국내에도 무려 2500년 전을 살았던 성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물론 불족적은 나라 안의 것이나 나라 밖의 것이나 실제 발자국이 아니라 추상적 조형물에 가깝다. 사람의 발이라기엔 작위적일 만큼 거대하고 평평하고 반듯하다. 땅에 새긴 진리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 후대인들이 만든 선의의 위작(僞作)이라고 보는 게 걸맞다.

갑사의 불족적은 보물 제582호인 <월인석보> 판목이 있는 보장각에 함께 봉안돼 있다. 절에서는 이것을 누가 언제 판각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세상의 가장 하판 혹은 음지에 위치한 발의 운명이 겹쳐 꽤 쓸쓸했다. 하지만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최근에 만들었다고 해도 넙죽 믿을 만큼 선명하고 깨끗하다. 세로 1미터 남짓의 목판에 양발에 걸쳐 ‘釋迦如來遺蹟圖(석가여래유적도)’라는 제목이 쓰였다. 그 아래로 조각한 부처님의 발에는 천폭륜상.보검.물고기.연꽃무늬 등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천폭륜상(千輻輪相)이란 부처님의 발바닥에 있는 천개의 바퀴살 모양의 인문(印紋)으로 모든 이치를 꿰뚫고 주관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엄지발가락엔 연꽃 문양이 나머지 네 발가락에는 만(卍)자가 두드러진다.

한자 ‘갑(甲)’은 거북이의 등껍질을 본뜬 상형문자다. 새싹이 싹트면서 아직 씨앗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이라는 설도 있다. 무엇이 정답이든 단단하고 옹골찬 느낌이다. 십간(十干)이나 계약서상에서 갑과 을의 관계에서 보듯 ‘첫째가는, 우월한’이란 어의를 갖는다. 계룡산의 서쪽을 지키는 갑사도 최고의 절이란 취지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갑사는 서기 420년 창건됐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보물 제256호 철(鐵) 당간이 갑사의 장구한 역사를 증언한다.

<사진> 보물 제256호인 갑사 철당간.

철제 솟대는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이어 올렸다. 1893년 벼락을 맞아 철통 4개가 부서지면서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15m의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마귀를 쫓기 위한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한다. 당간을 지탱하는 돌덩이는 지주(支柱). 계룡산의 정기를 수호하는 산신에게 발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부처님은 발로도 가르쳤다. 부처님이 세 가지 상황에서 당신의 마음을 말없이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곽시쌍부(槨示雙趺). 아난과 가섭은 대표적인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부처님을 최측근에서 일생 동안 보좌했던 아난은 사(事)의 영역에서, 도저한 수행으로 부처님이 늘 눈여겨봤던 가섭은 이(理)의 영역에서 으뜸이었다.

언젠가는 자웅을 겨뤄야할 라이벌이었다. 외지에서 고행 중이던 가섭은 부처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부처님의 법구는 이미 입관된 뒤였다. 아난은 법구를 친견하고 싶다는 가섭의 청을 거부했다. 가섭은 하는 수 없이 다비를 위해 장작더미 위에 놓은 관 앞에 대고 통곡했다. 그때 별안간 관 속에서 부처님의 발꿈치가 튀어나왔다. 교단의 실권은 가섭에게 돌아갔다.

곽시쌍부는 영산회상거염화미소(靈山會上擧拈花微笑, 부처님이 대중 앞에서 꽃을 들어보이자 오직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웃어 보임),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부처님이 설법하던 중 늦게 도착한 가섭을 위해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 절반을 가섭에게 양보해 앉게 함)에 이어 가섭이 후계자임을 암시한 결정판이다. 관에서 돌출한 발은 한없이 정치적인 발인 듯하지만 한없이 비정치적인 발이다. 변형되거나 조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적 의미도 남기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걸’ 가지고 정치로 읽고 복심으로 해석하고 흑심으로 왜곡하는 건 오로지 중생들의 꿍꿍이일 뿐이다. 선가에서는 삼처전심을 깨달음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모범으로 친다. 가섭이 최고의 반석 위에 오른 까닭도 부처님이 진정으로 원했던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면 허사라는 것. ‘바로’ 깨치고 ‘발로’ 깨쳐야 한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 썩고 무너지고 악취를 풍기는 것이 육체성의 본질이다.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고려하면 몸은 그 자체로도 위태롭다. 인류는 이러한 육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맨발에 신발을 신었고 마차를 탔으며 자동차를 발명했다. 맨얼굴에 화장을 하고 맨몸에 최신 유행의 옷을 걸치는 행위도 비슷한 속셈의 소치다. 부에 대한 욕망의 근저에는 비루하고 허술한 육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한다는 생각. 가장 성스러운 만큼 가장 더러웠으리라 짐작되는 부처님의 발은 그렇게 가리고 꾸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넌지시 일러준 건 아닐는지.

공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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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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