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갑사의 불족적 |
‘부처님 발자국’은 숭고함 드러내는 ‘聖物’
<사진> 갑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족적 목판. 부처님 역시 이 쓸모 있는 흉물에 힘입어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했다. 최초의 전법은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를 교화한 바라나시까지 걸었던 200km다. 발걸음마다 제자를 거두고 말씀을 남기며 교단을 세웠다. 결국 당신의 멍들고 부르튼 발이 없었다면 팔만대장경도 존재할 수 없었다. 불제자들은 부처님이 살아있을 당시 그분의 발을 씻기는 일은 최상의 예경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 오랜 기간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입멸(入滅)을 통해 육신을 버리고 아무런 형태도 남기지 않는 절대 공허로 승화했다. 교도들은 설령 예배를 위해서라도 교주의 몸을 형상화하는 일은 모독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깨닫고 도통했다 쳐도 끊임없이 먹이고 자주고 배설해줘야 하는 몸뚱이를 달고 사는 한 죽을 때까지 앓아야 하고 싸워야 하고 견뎌야 한다. 결국 불상은 궁극의 질곡마저 벗어던진 부처님에게 다시 멍에를 씌우는 ‘훼불’이었다. 불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 대중이 모신 성물(聖物)은 부처님의 발자국 곧 불족적(佛足跡)이었다. 불족적은 부처님의 숭고함을 상징하는 매개다. 성현들의 업적을 조사할 때 발자취를 좇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인도의 꼴카타 박물관,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소장된 불족적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관불삼매해경> 권1과 권6은 “불족적을 보고 존경하고 기뻐하면 한량없는 죄업이 소멸된다”고 했다. 최근에 만들었다고 해도 넙죽 믿을 만큼 선명하고 깨끗하다. 세로 1미터 남짓의 목판에 양발에 걸쳐 ‘釋迦如來遺蹟圖(석가여래유적도)’라는 제목이 쓰였다. 그 아래로 조각한 부처님의 발에는 천폭륜상.보검.물고기.연꽃무늬 등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천폭륜상(千輻輪相)이란 부처님의 발바닥에 있는 천개의 바퀴살 모양의 인문(印紋)으로 모든 이치를 꿰뚫고 주관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엄지발가락엔 연꽃 문양이 나머지 네 발가락에는 만(卍)자가 두드러진다.
철제 솟대는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이어 올렸다. 1893년 벼락을 맞아 철통 4개가 부서지면서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15m의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마귀를 쫓기 위한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한다. 당간을 지탱하는 돌덩이는 지주(支柱). 계룡산의 정기를 수호하는 산신에게 발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웅을 겨뤄야할 라이벌이었다. 외지에서 고행 중이던 가섭은 부처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부처님의 법구는 이미 입관된 뒤였다. 아난은 법구를 친견하고 싶다는 가섭의 청을 거부했다. 가섭은 하는 수 없이 다비를 위해 장작더미 위에 놓은 관 앞에 대고 통곡했다. 그때 별안간 관 속에서 부처님의 발꿈치가 튀어나왔다. 교단의 실권은 가섭에게 돌아갔다. ‘그냥 그런 걸’ 가지고 정치로 읽고 복심으로 해석하고 흑심으로 왜곡하는 건 오로지 중생들의 꿍꿍이일 뿐이다. 선가에서는 삼처전심을 깨달음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모범으로 친다. 가섭이 최고의 반석 위에 오른 까닭도 부처님이 진정으로 원했던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면 허사라는 것. ‘바로’ 깨치고 ‘발로’ 깨쳐야 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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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물 제256호인 갑사 철당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