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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보 아육왕사의 500나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문화대재앙이었다. 광기와 우연이라는 세계사의 속성을 여실하게 드러낸 근현대 초유의 사건이다. 문혁(文革)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됐다. 마오는 경제부흥책인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인자와 후배들의 득세에 입지가 갈수록 줄어들자 그는 농민과 노동자를 꼬드겨 대반전을 도모했다. 관료와 지식인 계급의 위선과 부정으로 중국이 낡은 중국, 썩은 중국으로 회귀하고 있다며 순수 프롤레타리아들의 결집을 역설했다. 사회 최하층의 인생역전에 대한 기대감과 ‘있는 놈’들을 향한 적개심을 등에 업고 여론은 급속도로 불이 붙었다.



금빛 옷 휘감은 오백응진들


文革 잊으려는 몸짓 보는듯


<사진> 중국 닝보 아육왕사에 있는 500나한상의 일부.

거사는 스무살 남짓한 홍위병들의 손에 맡겨졌다. 마오의 대중연설에 감복한 광신도들은 1100만 명에 육박했다. 그들은 3000년 중국사를 교주 이후부터 새로 쓰고 싶어 했다. 덤으로 학창시절 자신을 벌한 선생님을 혼내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나이와 법도에 대한 부담을 벗겨주자 젊은이들은 악마로 다시 태어났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무리를 짓고 지역의 당 간부와 촌장, 교사들을 마구 공격했다. ‘구시대적’이라는 한 마디에 걸리면 장사가 없었다. 주변국들이 찬탄해마지 않았던 전통사상과 유적 역시 단칼에 갈아 마셔버렸다. 불교도 뿌리 뽑아야 할 악으로 지목됐다. 수많은 사찰이 철부지들의 전쟁놀이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됐다. 도시의 홍위병들이 대학교수들을 일개 ‘공돌이’로 전락시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스님들의 승복을 벗겼고 강제로 장가와 시집을 보냈다.

사실 불교와 공산주의는 불구대천지간은 아니었다. 신과 영혼을 부정하고 변증법적 논리를 따르는 등 사상적 공통점이 적지 않다. 스님들이 재산을 일절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승가의 공동생활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동경했던 사회의 원형에 근접한 편이다. 이러한 유사성과 더불어 국민들의 오랜 친불교 정서로 말미암아 중국불교는 공산정권과 공공연히 밀월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식하고 즉흥적인 홍위병들에게 오래된 건 무조건 나쁜 것이었다.

명청대의 쇠퇴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의 거듭된 전란으로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중국불교는 문혁으로 회심의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홍위병들은 사실상 1년 만에 중국 전역을 초토화했다. 나라도 어쩌지 못할 만큼 성장했고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였다. 산업생산은 중단되고 도시는 지옥으로 변했다. 급기야 정규군의 투입으로 겨우 질서가 잡혔다.

어쨌든 마오는 청년들의 광분에 힘입어 공산당 내부의 정적을 제거하고 독재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악스런 만행에 종지부를 찍은 건 하늘이었다. 1976년 마오가 사망하자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고 공식적인 평가를 내렸다. 정부가 반성하고 주동자들은 숙청됐지만 불교는 생환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사찰 복원과 승려 양성으로 중국의 불교인구는 4억 명을 바라본다. 그러나 ‘사찰 27만7000곳, 승려 70만명’이라는 1930년대의 통계가 돌아올 날은 요원하다.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절들도 외형만 복구한 관광지에 불과한 형편이다. 무엇보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 법등을 전할 사람과 정신이 단절됐다.

중국에서 60대 이상의 노승이나 20대의 젊은 승려는 많지만 40~50대의 스님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단적인 예다.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불교인재개발원이 주최한 중국 간화선 순례단에 동참해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국에서는 선종을 표방하는 사찰의 경우 ‘○○선사(禪寺)’라고 불렀다. 그런 곳엔 허술하나마 선방이 있었다. 관광객들의 눈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너 명의 선승들이 평상에 앉아 좌선에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민망하게도 졸고 있었다.

휘황한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오백응진 내부는 몽환적이다.

육중한 몸집의 나한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참배객들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그들은 웃고 울고

협박하고 비는 얼굴로 희로애락의 인간 군상을 흉내내고 있다.


중국인들은 양자강을 ‘창지앙(長江)’이라고 부른다. 중국 최장의 강이자 세계 3대 강이다. 중원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르는 장강을 기준으로 남북의 기후와 역사가 갈린다. 강의 아득한 길이와 깊이는 그대로 요새가 됐고 국경이 됐다. 전국시대의 초, 삼국시대의 오, 남북조시대의 남조가 그랬다. 금나라의 공세로 화북을 빼앗긴 북송이 남송이란 이름으로 연명할 수 있었던 것도 장강의 은덕이다. 강남 지방의 창공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도 밀가루를 엷게 바른 것처럼 뿌옇다. 장강이 밤낮으로 생산한 습기가 하늘을 뒤덮은 결과다.

저량성(浙江省)의 항구도시 닝보(寧波)도 강남에 속한다. 닝보의 아육왕사(阿育王寺)는 중국 선종 5산 가운데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 동진(東晋) 시대에 창건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두개골뼈)를 봉안한 보탑이 있어 유명하다. 서기 281년 혜달이라는 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당도했다.

땅 밑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이상하게 여긴 혜달은 3일 동안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5층 4각의 사리보탑이 지하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이곳에 절을 짓고 수행을 했다. 이후 탑정(塔亭)과 전당(殿堂)이 연이어 생겨났고 양무제가 아육왕이라는 사명을 하사했다. 인도의 성군 아쇼카왕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사진> 아육왕사 입구.

송나라 때 소동파와 친분이 두터웠던 운문종계 대각회련 선사(大覺懷璉, 1009~ 1090)가 주석하며 법을 펼치면서 만방에 이름을 알렸다. 고려 초기 고승이었던 천태종 16세 의통조사(義通, 927~988)는 아육왕사 승려들의 청으로 법문을 설하기도 했다. 일본 임제종의 종조 에이서(榮西) 스님도 이 절에서 수행했다. 그는 불교공부 외에도 차를 연구해 일본에 중국의 차나무를 심었다. <흘다양생기(吃茶養生記)>를 저술한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다조(茶祖)로 칭송받는다.

아육왕사의 방사는 600칸이며 200명의 승려가 상주한다.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법당내 7층 석탑 속 보탑 안에 안치돼 있다. 사리는 암홍색이며 탑의 좁다란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홍색으로 금색으로 흑색으로 달리 보인단다.

중국의 사찰에서 과거의 영광을 목격하기란 무너진 숭례문에서 옛 조선의 목재를 고르는 일처럼 막막하고 어리석다. 물론 90년대 이후 대대적인 복원으로 대륙인 특유의 웅장한 건축스타일을 만나볼 순 있다. 아육왕사의 500나한은 오백응진(五百應眞)이란 전각에 모셔졌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 ‘Arhat’의 한자 음역인 ‘아라한(阿羅漢)’을 줄여서 부르는 단어다. 마땅히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의미로 응공(應供).응진(應眞)으로도 번역된다. 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은 제자로 초기불교 수행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果)를 얻은 성자를 뜻한다. <오분율(五分律)>에는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 중인도 마가다국(摩伽陀國) 왕사성(王舍城)의 칠엽굴(七葉窟)에서 500명의 나한이 모여 불전(佛典)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곧 500나한은 최초의 교단을 상징한다.

휘황한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오백응진 내부는 몽환적이다. 육중한 몸집의 나한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참배객들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그들은 웃고 울고 협박하고 비는 얼굴로 희로애락의 인간 군상을 흉내내고 있다. 한편으론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에 비견될 중국의 경제성장을 의인화한 듯싶다. 자본주의적 근육과 완력으로 무장한 현대는 지나간 궁핍과 굴욕을 애써 망각하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중국 닝보=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11호/ 3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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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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