닝보 아육왕사의 500나한 |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문화대재앙이었다. 광기와 우연이라는 세계사의 속성을 여실하게 드러낸 근현대 초유의 사건이다. 문혁(文革)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됐다. 마오는 경제부흥책인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인자와 후배들의 득세에 입지가 갈수록 줄어들자 그는 농민과 노동자를 꼬드겨 대반전을 도모했다. 관료와 지식인 계급의 위선과 부정으로 중국이 낡은 중국, 썩은 중국으로 회귀하고 있다며 순수 프롤레타리아들의 결집을 역설했다. 사회 최하층의 인생역전에 대한 기대감과 ‘있는 놈’들을 향한 적개심을 등에 업고 여론은 급속도로 불이 붙었다.
나이와 법도에 대한 부담을 벗겨주자 젊은이들은 악마로 다시 태어났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무리를 짓고 지역의 당 간부와 촌장, 교사들을 마구 공격했다. ‘구시대적’이라는 한 마디에 걸리면 장사가 없었다. 주변국들이 찬탄해마지 않았던 전통사상과 유적 역시 단칼에 갈아 마셔버렸다. 불교도 뿌리 뽑아야 할 악으로 지목됐다. 수많은 사찰이 철부지들의 전쟁놀이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됐다. 도시의 홍위병들이 대학교수들을 일개 ‘공돌이’로 전락시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스님들의 승복을 벗겼고 강제로 장가와 시집을 보냈다. 명청대의 쇠퇴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의 거듭된 전란으로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중국불교는 문혁으로 회심의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홍위병들은 사실상 1년 만에 중국 전역을 초토화했다. 나라도 어쩌지 못할 만큼 성장했고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였다. 산업생산은 중단되고 도시는 지옥으로 변했다. 급기야 정규군의 투입으로 겨우 질서가 잡혔다. 중국에서 60대 이상의 노승이나 20대의 젊은 승려는 많지만 40~50대의 스님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단적인 예다.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불교인재개발원이 주최한 중국 간화선 순례단에 동참해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국에서는 선종을 표방하는 사찰의 경우 ‘○○선사(禪寺)’라고 불렀다. 그런 곳엔 허술하나마 선방이 있었다. 관광객들의 눈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너 명의 선승들이 평상에 앉아 좌선에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민망하게도 졸고 있었다. 휘황한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오백응진 내부는 몽환적이다. 저량성(浙江省)의 항구도시 닝보(寧波)도 강남에 속한다. 닝보의 아육왕사(阿育王寺)는 중국 선종 5산 가운데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 동진(東晋) 시대에 창건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두개골뼈)를 봉안한 보탑이 있어 유명하다. 서기 281년 혜달이라는 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당도했다. 땅 밑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이상하게 여긴 혜달은 3일 동안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5층 4각의 사리보탑이 지하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이곳에 절을 짓고 수행을 했다. 이후 탑정(塔亭)과 전당(殿堂)이 연이어 생겨났고 양무제가 아육왕이라는 사명을 하사했다. 인도의 성군 아쇼카왕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 ‘Arhat’의 한자 음역인 ‘아라한(阿羅漢)’을 줄여서 부르는 단어다. 마땅히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의미로 응공(應供).응진(應眞)으로도 번역된다. 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은 제자로 초기불교 수행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果)를 얻은 성자를 뜻한다. <오분율(五分律)>에는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 중인도 마가다국(摩伽陀國) 왕사성(王舍城)의 칠엽굴(七葉窟)에서 500명의 나한이 모여 불전(佛典)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곧 500나한은 최초의 교단을 상징한다. |
'이런저런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주 골굴사의 원효 (0) | 2008.09.09 |
|---|---|
| 강진 백련사의 동백 (0) | 2008.09.05 |
| 김해 모은암의 가야 (0) | 2008.09.03 |
| 삼보스님 ‘할복’ 시도 충격 … (0) | 2008.09.02 |
| 고령 반룡사의 대나무 (0) | 2008.08.29 |
<사진> 중국 닝보 아육왕사에 있는 500나한상의 일부.
<사진> 아육왕사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