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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벽송사의 미인송

벽송사 대웅전 위쪽 공터에서 자라는 미인송(오른쪽)과 도인송.




“행여 상할까”…‘천년 깨달음’의 기운 보듬다



비가 내렸다. 비는 묵직했다. 성난 물들은 하늘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허공은 젖으면서 엉망이 됐다. 하늘은 땅의 자리를 가로챘고 땅은 살점이 뜯긴 채 더 낮은 곳으로 밀려났다. 발밑이었다. 검은 풍경은 몸속으로 들어와 비를 피했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였다. 그래도 사람 사이에 빗발치는 불운에 비하면 이 고통은 너무 단순하다. 물과 물들은 숲을 사이좋게 갈라먹었고, 투명한 빗금의 틈에 끼어 시간이 너덜거렸다. 물줄기의 한쪽은 하늘이 다른 한쪽은 땅이 잡고 같이 걸었다.

벽송사(碧松寺)는 하늘이 간택한 절이다. 절이 기댄 땅은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의 풍수다. 지리산 천왕봉을 정점으로 중봉과 하봉을 거친 두류봉 밑에 자리했다. 갈고리 모양으로 굽은 산맥이며 절은 갈고리 안쪽에 안긴 형세다. 예로부터 이를 본 지관(地官)들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며 좋아했다. 첩첩산중 안에 박힌 절, 그러니까 ‘연꽃이 활짝 핀 모양새와도 같다’며 부용만개형(芙蓉滿開形)이라 부르기도 했다.

명당은 깊었고 길은 박했다. 그러나 간만에 사람이 들면 그는 부처가 되어 하산했다. 길한 땅의 신세를 진 납자들은 깨달음으로 하늘에 보답했다.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 선사 이후 청허휴정 환성지안 등 108명의 스님이 여기서 견성대오했다는 전설. 놀라긴 이르다. 깨달을 사람은 아직도 892명이나 남았다. 벽송사 선원은 지금 하안거 중이다.

벽송사 대웅전 위쪽 공터엔 1000년 묵은 소나무가 자란다. 이른바 도인송(道人松)이다. 나이에 걸맞은 굵고 반듯한 줄기에 잎들은 원뿔 모양으로 뭉쳤다. 어느 노승이 주장자를 심었고 그게 소나무로 승화했다는 이야기가 여태껏 구전된다. 그는 50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공언한 뒤 열반했다. 귀환한 시기는 아마도 1520년 무렵일 것이다. 도를 깨친 벽송지엄 선사가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하는 해다.

벽송지엄은 함양 산골에 선지식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벽계정심(碧溪正心, ?~?) 선사다. 그는 조선조 강제 환속을 피해 쫓겨 다니던 신세였다. 일찍이 명나라로 유학, 임제종 총통(摠統) 화상에게서 법을 계승한 뒤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재위 시 귀국했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면서 고승이란 신분은 죄가 됐다. 조선 3대 임금 태종 대의 대대적인 검거작전 탓에 김천 직지사에서 은거했다. 발각되자 지리산까지 도망쳤다. 움막을 짓고 광주리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벽송은 벽계를 시봉하며 꼬박 3년을 살았다.

진정 깨달았다면 언젠가는 번뜩이는 무언가를 보여 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스승은 선기(禪氣)를 단 한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밤에 잠깐 좌선을 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지루하고 허접한 장삼이사의 삶 그대로였다. 낙담한 제자는 성불을 포기한 채 움막을 박차고 나왔다. 입에 무어라도 넣어주어 달래야 할 순간이었다. 개울 위의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문득 스승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벽계는 두 팔을 번쩍 쳐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지엄아아! 법(法) 받아라아아아!”

미인송(美人松)은 환성지안 선사의 죽음과 사랑이 서린 나무다.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구부러졌다.

대웅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서면 미인송이

도인송을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는 미인송은 행여 비를 맞을까

불볕에 탈날까 도인송을 위해 중력을 견디고 섰다.


말 한마디에 오해가 풀렸고 공부도 끝났다. 벽계의 법을 이어받은 벽송은 도인송 밑에 좌선대를 설치했다. 앞으로도 자신 이외에 999명의 부처가 더 나올 것이라 예언했다. 깨달음은 사람의 몸을 바꿔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졌다.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 경성일선(敬聖一禪, 1488~1568), 청허휴정(淸虛休淨, 1520~ 1604),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 송운유정(松雲惟政, 1544~1610),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 1623),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 회암정혜(晦庵定慧, 1685~1741), 호암체정(虎岩體淨, 1686~ 1748), 경암응윤(鏡巖應允, 1743~1804), 서룡상민(瑞龍祥玟, 1814~1890), 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 …. 벽송사는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다. 108명의 조사가 배출돼 수행과 전법에 몸담은 사찰이란 뜻이다. 가히 한국 선의 조정(祖庭)으로 받드는 까닭을 알 만하다.

<사진> 108명의 선지식이 배출됐다는 벽송사.

청허휴정과 송운유정은 귀에 익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본명이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도총섭으로서 제자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을 지휘했다. 벽송사는 승병 출정식을 거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화엄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치던 환성지안 선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벽송사는 강원과 선방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절이 됐다. 강원에 100명, 선방에 50명의 스님이 살았다. 엄혹한 억불의 체제에서도 국찰(國刹)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공 수훈자에 대한 왕실의 배려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불사의 주체자였던 환성지안 선사의 됨됨이가 대단했던 것 같다.

스님은 <화엄경>의 대가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전통을 확립한 고승으로 평가된다. 1690년 직지사에서 처음으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인연이 화근이 된 모양이다. 어느 날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는데 무려 1400명의 대중이 모였다. 나라 인구가 500만에 불과했던 시대다.

엄청난 숫자에 겁을 먹은 유생들은 법회를 역적모의로 몰아 관헌에 신고했다. 물론 집요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계산된 착오였을 것이다. 옥에 갇힌 스님은 곧 무죄로 판명돼 풀려났다. 그러나 고을을 좌지우지하던 고관(高官)의 입김으로 끝내 제주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스님은 귀양 간 지 일주일 만에 입적했다.

미인송(美人松)은 환성지안 선사의 죽음과 사랑이 서린 나무다.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구부러졌다. 대웅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서면 미인송이 도인송을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는 미인송은 행여 비를 맞을까 불볕에 탈날까 도인송을 위해 중력을 견디고 섰다. 부용낭자는 남몰래 스님을 연모하던 여자였다. 스승이자 정인의 억울한 죽음을 접한 그녀는 천년학이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는 유언을 했다. 벽송사에서 스님의 정령을 수호하겠다는 서약이었다. 그렇게 미인송은 이름과 사연을 얻었다. 미인송의 우듬지 부분은 학이 앉아 있는 형상처럼 생겼다는데,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에 젖은 벽송사는 죽음이나 사랑과 같은 극적인 사건과 무관해 보인다. 얼룩덜룩해진 숲은 허연 숨을 몰아쉬었고 숨 속으로 몸을 감췄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지자 눈은 그다지 쓸모가 없어졌다. 마음이 닫혔고, 편안했다. ‘머리는 희어져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 사람들 일찍이 말했다. 닭 우는 소리 듣는 순간, 장부가 해야 할 일 다 마쳐버렸네(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 서산대사의 오도송이다.

살면서 발 딛는 모든 곳이 비 맞은 벽송사 같다면, 심심할지언정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슬프지 않고 설레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물먹은 인생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함양=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42호/ 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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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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