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묘심사의 항구 |
묘심사가 위치한 수정산의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부산항 전경.
물길의 관문서 물질 범람의 세계를 엿보다
항구는 문명이 나고 드는 입이다. 인간이 하늘을 트기 전까지 바닷길은 별세계의 문물과 풍습을 받아들이는 주요한 통로였다. 평시의 항구는 무역의 요충이었지만 전시엔 바다 건너 적들이 맨 먼저 짓밟는 관문이었다. 국가는 정책적 판단에 따라 항구를 넓히거나 닫았다. 부산항은 1407년에 열렸다. 개항의 목적은 왜인과의 교역을 합법화해 왜구의 침탈을 막자는 것이었다. 왜인들의 동향에 따라 부산항은 폐쇄와 재개를 반복했다. 조선은 부산항의 위상을 수시로 조정하면서 왜와의 관계를 주도했다.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치욕을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산항의 주인은 조선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갑을’은 역전됐다. 서양과 자본이 부두 위를 질주했고 항구를 통제할 권리는 일본에게 넘어갔다. 부산항은 이때부터 나라의 국력을 송두리째 빨아들여 일본에 인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선진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없어도 되는 양화(洋貨)를 얻기 위해 없어선 안 될 쌀을 내다 팔았다. 사치는 필요를 압도했다. 그들은 일본을 보며 열등감을 느꼈고, 그 가운데 몇몇은 매국으로 열등감을 해소했다. 한국불교의 근대는 일본 진종(眞宗) 본원사(本願寺)가 부산에 별원(別院)을 세운 1877년 이후부터다. 수정산은 부산항과 맞닿은 산이다. 산의 중턱만 올라도 부산항의 전체를 볼 수 있다. 거대한 크레인과 컨테이너, 이런저런 건물들이 즐비하다. 항구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삶들이다. 바다를 파헤쳐 먹고사는 삶들은 바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경쟁에서 뒤쳐진 삶들은 수정산 쪽으로 차곡차곡 밀렸다. 목숨을 향한 의지는 산의 절반을 뒤덮었다. 수정산의 구조는 독특하다. 피라미드처럼 일정하게 층이 나뉘었고 층마다 민가가 조밀하게 형성됐다. 전형적인 서민주거지역이다. 블록과 블록 사이를 산복도로가 흘렀다. 묘심사(妙心寺)는 주택가와 어깨를 맞대고 섰다. 행정구역은 부산시 동구 수정동. 일반 주택과 그다지 구별이 되지 않는 규모다. 전통가옥의 형식만 조금 눈에 띈다. 예전엔 묘심사에서도 부산 앞바다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건너편 공원의 울창한 숲이 풍광을 가로막았다.
정산 주택가에 인접한 묘심사. 묘심사는 이름과 몸체가 분리됐던 절이다. 1888년 창건됐지만 본래 명칭은 대성사였다. 개항 이후 일본불교의 수많은 종파들이 부산에 별원(別院)을 설치하고 포교에 착수했다. 묘심사 역시 1912년 일본 임제종이 포교당 삼아 심어놓은 사찰이다.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에 따르면 광복 직전까지 국내엔 일본 진종 대곡파, 일련종 진언종 정토종 9개종 17개파 138개의 사찰이 있었다. 이 가운데 120여개의 절이 남한에 소재했다. 해방 이후 본토로 도주한 일인들이 남긴 건물과 토지는 적산(敵産)으로 분류됐다. 미군정은 이를 한국인들에게 헐값에 불하했다. 종교계 재산의 경우 불교계 적산은 한국 불교계에, 기독교계 적산은 한국 기독교계에 내준다는 것이 불하의 원칙이었다. 복음화를 통한 남한의 복속을 꾀하던 미군정이었다.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불교계 적산의 상당수가 아무 연고도 없는 단체나 교회로 넘어갔다. 묘심사도 이때 당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기독교인에 매각되는 곡절을 겪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운영하는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이트는 묘심사가 원래 서구 토성동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뜻있는 신도들이 팔린 절에 방치된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범종과 종각을 대성사로 옮겨다 놓았다. 간판도 새로 달았다. 대성사가 묘심사로 거듭난 순간이다. 1960년대의 일이다. 일본의 1만엔권 지폐에 도안된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국민적 영웅인 셈이다. 그가 죽었을 때 일본 국회는 애도를 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후쿠자와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다. 후쿠자와는 <서양사정>, <문명론의 개략>과 같은 저서를 통해 개인과 국가가 강해지려면 서양 문명의 도입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바라던 체제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였고 바라던 정신은 데카르트적 이성이었다. 서양의 이면엔 치열한 회의와 자유로운 탐구가 있다며 일본 역시 활발한 지적활동을 위해 봉건성을 청산해야 한다고 열변했다. 강해지려면 강한 것들의 체질을 빼다 박아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 반면 일본과 힘이 비슷하거나 약한 것들에 대해선 폄하와 저주로 일관했다. 그는 탈아(脫亞)의 선봉이었다. <시사신보>의 사설에다 “중국과 조선을 접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호색한이며, 조선은 그런 난봉꾼 따위에게 아양을 떠는 음탕한 여자라는 식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군중기피증이 있었던 그는 저열한 유색인종과 숨을 섞는 것조차 질색했다. 일본 내 혐한류와 극우세력의 이념적 뿌리다. 우리의 근대는 외세에 의한 근대였고 습격당한 근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라는 남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그러나 증오하고 거부하기에 외세는 너무나 아름답고 강했다. 열등감은 친일과 내분을 키웠다. 물 건너온 삶에 대한 동경은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갈려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는 유길준 박영효 등 국내 개화사상가들의 대부이기도 했다. 추종자들 가운데는 스님도 끼어 있었다.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은 근대 최초의 개화승이다. 범어사 출신의 이동인은 1879년 부산을 경유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는 본원사에 체류하며 일본의 발전상을 살피고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일본 스님의 주선으로 후쿠자와를 만난 것도 이 때다. 창씨개명을 하고 진종의 스님으로 계를 받았다. 채 1년도 안 되는 이 기간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귀국한 이동인은 개명한 일본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호조약을 위한 교섭 실무자로 그를 임명했다. 숭유억불의 체제에서 스님이 국가외교의 밀사로 발탁된 것은 획기적이었다. 일본의 선진 제도와 기술을 익히기 위한 신사유람단을 주도했고 신식군대의 창설을 위한 무기와 군함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책을 맡았다. 30세 남짓의 나이로 불과 8개월 동안 벌인 일이었다. 천재가 받아든 죽음의 형식도 극적이었다. 그는 고종을 배알하고 돌아가는 길에 행방불명됐다. 개화파들은 이동인이 거처하던 신촌 봉원사에 자주 들렀다. 그들은 이동인이 소개하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 물리와 화학에 감탄했고 그를 신세계의 주역으로 믿고 따랐다. 아무도 일본을 적이라 여기지 않았고 문명의 잔인한 이면은 관심 밖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의 위대함은 이성과 정의를 해체했다.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불교 시찰단이 최초로 파견됐다. <조선불교총보>의 기자로 동행했던 권상로스님은 도쿄의 정경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승강기로는 도솔천궁을 십분의 일이나 갔다 오고 비행선으로는 극락세계를 이분의 일이나 갔다 온 것 같다”며 얼얼한 기분을 표현하고 있다. 존재의 환(幻)에 취해 있던 한국 불교계의 단면이다. 우리의 근대는 외세에 의한 근대였고 습격당한 근대였다. 개화는 이동인의 삶처럼 삽시간에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라는 남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그러나 증오하고 거부하기에 외세는 너무나 아름답고 강했다. 열등감은 친일과 내분을 키웠다. 물 건너온 삶에 대한 동경은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갈려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항구는 유용하지만 미덥지는 않은 공간이다. 물질이 범람하는 세계는 본래 그렇다. 부산=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44호/ 7월1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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