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32026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삿포로 중앙사의 마지

일본 삿포로에 위치한 중앙사의 본당 내부.



‘찬란한’ 불단 ‘초라한’ 공양

아름다움과 아쉬움의 공존



근대 이전 일본인들은 홋카이도(北海道)를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렀다. 원주민인 아이누족(族)의 땅이라는 뜻이다. 아이누에겐 입말만 있었을 뿐 글말이 없었다.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았다. 자연을 제압했다는 증거로 삼을 만한 유적도 변변하지 않다. 그들은 곰 한 마리 연어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렸고, 필요한 만큼만 취했다. 체제는 온순했고 본토인들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마츠마에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정부로부터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교역권을 인정받고 번주(藩主)가 됐다. 착취는 순조로웠다.

<사진> 중앙사 본당 불단에 놓인 ‘마지’.

홋카이도가 일본사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때는 메이지유신 이후다. 마츠마에 번주는 천황을 신봉하는 신정부에 반대해 에조 공화국을 세우고 항전에 돌입했다. 에조는 1869년 5월 고료카쿠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6개월 만에 멸망했고 섬은 제국 품에 안겼다.

천황의 특명을 받은 개척사(開拓使)들은 가오리처럼 생긴 섬의 면면을 살피며 이용가치를 셈했다. 본토처럼 불안한 화산지대였지만 3모작이 가능한 농토가 있었고 황금어장이 있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사할린과 마주해 북벌의 거점으로 삼기에 좋았다. 황군의 홋카이도 점령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일본의 극성(極盛)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개척사들은 섬을 서울의 강남과 같이 철저한 계획도시로 꾸몄다. 바둑판을 본떠 땅을 갈랐고 유럽과 미국의 건물을 베껴 지었다. 붉은 벽돌로 휩싸인 삿포로맥주 공장과 옛 도청 청사에서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극복하고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제국의 문명이 이식되면서 사찰도 들어왔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본산인 중앙사(中央寺)는 메이지 7년(1873)에 창건됐다. 조동종의 종무원으로 사용했으며 1887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삿포로 도심 한복판에 있는 절이다. 중앙사는 본당(本堂)과 요사가 복도로 연결된 구조다.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가옥과 가옥을 옮겨 다닐 수 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를 반영한 조치다. 법당은 일본인들이 없으면 못 사는 다다미방이다.

도심에 위치한 탓에 일본 사찰에 필수적인 정원은 좁고 허술한 편이다. 본당의 불단은 화려함의 절정을 이룬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법구(法具)의 운집은 실내를 불국정토로 옮겨다 준다. 반면 불단 중앙 위쪽에 놓인 불상은 무척 작은 편이다. 손바닥 네 개를 겹쳐놓은 정도의 크기인데, 휘황찬란한 법구와 섞여 식별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색(色)들의 범람은 아름답다. 다만 불단과 불상의 착종(錯綜)에 사찰에 온 진정한 이유를 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든다. 그냥, 아름다웠다.

불단엔 부처님께 공양하는 밥인 마지(摩旨)가 올려졌다. 여기서도 마지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큼지막한 놋그릇에 밥만 수북하게 담아 진상하는 우리의 풍습은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부처님의 법력을 경배하고 보시의 애틋함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일본의 마지는 실제적이다. 소반에 밥 한공기와 너덧 가지의 찬을 낸다. 금방이라도 먹을 수 있다. 맛은 없어 보인다. 볼품은 없지만 솔직한 공양이다. 본당 한구석에 마련된 흡연실은 가부키나 스모를 보는 것처럼 생경하다.

패전 후 맥아더 원수라는 강한 인간 앞에서

인간임을 실토하기 전까지

천황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실체는 완벽하게 은폐됐고 말씀과 장식으로만 대중 앞에 섰다.

찬란한 불단에 놓인 초라한 밥상처럼,

일본은 아름다운데도 아쉬운 나라다.

1192년 가마쿠라 막부(幕府)가 성립되면서 일본은 무인정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무라이(武士)들의 세상에서 조정의 힘은 약해졌다. 무사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를 원했다. 호넨(法然)이 연 정토종(淨土宗)이 대표적이다. 호넨은 ‘나무아미타불’을 외기만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사의 아들이었다. 단순하고 소탈한 논리는 학력도 경제력도 없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호넨의 제자 신란(親鸞)은 승려의 대처를 금하던 관습을 깼다. 경건한 부부생활이 성불을 가져다준다고도 믿었다.

무사들은 선(禪)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특히 중국에서 임제종을 수입한 에이사이(榮西)를 좋아했다. 도겐(道元)은 제도권과 떨어져 오직 좌선에만 힘쓰는 ‘시칸타자(只管打坐)’를 설법하며 조동종을 개창했다.

가마쿠라에서 무로마치로, 무로마치에서 군웅할거를 거쳐 도쿠가와로, 막부의 주인은 때때로 바뀌었지만 무(武)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견고했다. 무사들은 윗사람을 보호하고 아랫사람을 살육하는 방식으로 지위를 세습했다.

살인은 일상이었고 합법이었다. 무사들은 복잡한 사유와 형식을 거부하고 단박에 깨우치려는 선사와 자신들을 동등한 수준의 인격으로 포장했다. 일거에 깨닫게 하는 말과 행동인 선가의 활인검(活人劍)을 근거로 잔인을 꾸몄고 무식을 가렸다.

왜곡의 기술은 꾸준히 진화해 태평양전쟁 시대에 절정을 이뤘다. 선승이었던 이시다 고쿠류(石田黑龍)는 1942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선(禪)과 전(戰)이란 글자에 공통된 것은 단(單)이다. 단은 한겹, 하나, 오직으로 읽는다. 어떤 경우에도 두 개의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된 일억일심(一億一心)인 것이다. 이 일억일심으로 돌아가 인과필연을 선용하는 선은 대동아전쟁의 필승의 법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란다.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선승도 일개 신민(臣民)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은 일본 전체를 뿌리째 갈아엎은 혁명이었다. 조세제도의 개편과 함께 국민징병제가 도입됐다. 전국의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했다. 성주들은 땅을 빼앗겼고 무사들의 칼은 힘을 잃었다. 작은 지배자들은 모조리 숙청됐다. 억조창생은 천황이라는 단 하나의 지배자를 위해 엎드렸고 움직였다. 전략은 성공했고 천황의 귀환은 놀라웠다. 온 국민이 개방과 개혁을 군말 없이 따랐다.

문물은 봇물 터지듯 성장했고 순식간에 열강의 국력을 따라잡았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긍지는 폭력을 만나 광기로 번성했다. 신정부의 목표는 일본의 입지를 천신(天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후손인 신무천황의 성세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기원전 7세기의 일이었다. 중간의 모든 치욕과 모순과 만행은 덮고 부정하고 누락시켰다. 패전 후 맥아더 원수라는 강한 인간 앞에서 인간임을 실토하기 전까지 천황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실체는 완벽하게 은폐됐고 말씀과 장식으로만 대중 앞에 섰다. 찬란한 불단에 놓인 초라한 밥상처럼, 일본은 아름다운데도 아쉬운 나라다.

일본 삿포로=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36호/ 6월21일자]

'이런저런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양주 묘적사의 연못  (0) 2008.10.03
논산 관촉사의 미륵  (0) 2008.10.02
상주 남장사의 이백  (0) 2008.09.30
남원 실상사의 석장승  (0) 2008.09.26
함안 장춘사의 불두화  (0) 2008.09.25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