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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부인사의 포도밭

대구 부안사 입구에 있는 포도밭. 왼쪽의 돌덩이는 부인사의 옛 당간지주로 추정된다.



현실의 땅에 파묻힌 화려한 5백년 고려史



일전에 어느 희곡에서 ‘증거가 있으면 거짓이요 증거가 없으면 진실’이라는 대사를 본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현실을 꼬집는 역설이다. 물론 진실 규명에 있어 증거만큼 강하고 착한 수단도 없다. 누명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정증거주의는 온당하다. 다만 증거가 법적 진실을 넘어 삶의 진실까지 간섭할 때 문제는 복잡하고 답답해진다. 증거를 얼마나 많이 수집했느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진다. ‘신정아 사건’이 비근한 사례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데 거의 성공할 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직과 노력이 눈에 보이는 종이쪼가리 한 장을 못 당한다. 증거가 지배하는 세상은 이토록 허술하다.

부인사(符仁寺)는 팔공산 중턱에 자리했다. 동화사와 파계사의 중간 지점이다. 절 입구는 포도밭으로 무성하다. 비타민이 많아 피로회복과 신진대사 활성화에 좋은 과일은, 대구를 대표하는 명물인 폭염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포도밭은 절과 맞닿아 있지만 절 땅은 한 평도 없다. 과거의 성세를 보여주는 부인사의 당간지주가 포도밭 한쪽에 방치됐다. 얼핏 보면 그냥 돌덩이다.

<고려사>는 “명종 10년(1180) 6월 큰 비가 내려서 부인사가 있는 북산에서 큰물이 솟구쳐 나와 물에 잠기고 떠내려간 절간이 80여 칸이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9명이었다”고 적었다. 당시 홍수를 막기 위해 설치한 대수로의 일부도 지상으로 튀어나와 있다. 개인 소유지여서 추가적인 발굴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사찰의 경내지는 역대 주지 스님들의 꾸준한 불사로 원상 복구됐다. 그러나 포도밭에 묻힌 역사는 속수무책이다. 사찰에선 부인사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증거는 연약하고 증거가 발 디딘 땅은 남의 것이다. 힘든 싸움이다.

고려와 불교의 멸망은 운명적이었다.

부인사의 영광도 이때까지다.

물론 이것은 <고려사>에 기초한 사실이다.

… <고려사>는 조선왕조가 편찬했다.

고려를 무너뜨린 자들의 기록이다.

고의적인 폄하와 누락이 빤히 보인다.

역사 밖의 역사, 역사가 무시한 역사를 알 도리가 없다.

부인사의 역사적 의의는 초조대장경이 봉안됐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거란(요, 遼)의 침략을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막아보고자 조성한 6000권 분량의 경판이다. 거란에 개경이 함락된 이듬해인 현종 2년(1011)에 착수해 선종 4년(1087)에 끝낸 대작불사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장경이자 당시 한역(漢譯) 대장경 가운데 동양 최대였다.

왕실의 돈독한 불심과 목판인쇄 문화의 개가였던 대장경판은 개경 흥왕사에서 보관했다. 부인사로 옮긴 때는 인종 10년(1132)이다. 나라의 대보를 굳이 지방으로 이관한 까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수도의 불안한 정세 때문이었다. 거란의 침략은 3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와 3차 침입은 서희와 강감찬이라는 영웅 덕분에 대재앙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의 황제가 직접 거병한 2차 침입 때는 왕궁까지 점령됐다. 거란이 쇠하자 여진이 흥했다. 이자겸의 난(1126)이 지나가고 묘청의 난(1135)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명분을 지키려다 잿더미를 만드느니 국가 제일의 호국사찰인 부인사에 두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중악(中岳)이다. 중악신(中岳神)이 관장하는 성산(聖山)이었다. 어느 날 신라의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을 발원하며 중악에서 기도를 올렸다. 중악신이 나타나 비로봉 기슭에 원당(願堂)을 지으면 소원이 이뤄질 것이라 계시했다. 부인사를 짓고 난 뒤 여왕은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을 기리는 원당으로 정했다. 부처님의 권속을 기린 공덕으로 신력을 상속받아 통일국가의 제왕이 되고 싶다는 꿈이었을 것이다. 서기 644년의 일이다. 오늘날 사찰에선 지역민과 함께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고 있다.

<사진> 불사로 새롭게 거듭난 부인사 전경.

대장경을 부인사로 옮긴 데에는 국민총화의 목적도 깃들어 있다. 팔공산은 후삼국 시절 고려와 후백제가 패권을 다투던 격전지였다. 왕건이 견훤에게 참패해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았던 공산성 전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피와 원한이 들끓는 산이었고 화해와 용서를 기다리는 산이었다. 결국 대장경의 이운은 나라 안의 세력끼리 뭉쳐 나라 밖의 세력에 저항하자는 대의를 수행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리란 추측이다.

한편 현종은 아버지가 조카딸과 간통해 세상에 태어난 인물이다. 어머니는 그를 몰래 낳고 죽었다. 개경 함락 당시 그의 피난길에 따르는 신하는 너덧 명이 고작이었다.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의 호족이 무서워 나주까지 더 내려갔던 사실은 서글프다. 개인사는 비참했고 왕권은 우스웠다. 따라서 장경불사는 부모의 명복을 빌고 왕권의 정통성을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가설이다. 거기엔 왕권에 대한 신권(臣權)의 존중이 선행돼야 했다. 대장경의 조성도 대장경의 이운도 가장 절실한 목적은 화합이었다.

고려의 통일 이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금성(경주)에서 개경(개성)으로 바뀌었다. 나라의 물자를 개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도로가 생기고 도시가 섰다. 공산 지역은 개경과 금성을 있는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지나간 권력의 부를 새로운 권력으로 옮겨다 놓는 선봉으로 나섰고 개발의 혜택을 톡톡히 봤다. 극성기일 때 부인사는 39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렸고 거주하는 스님은 2000명이었다. 절에는 전국 유일의 승가시(僧伽市)가 서기도 했다. 지역의 상업을 부인사가 이끌었음을 시사한다.

부인사 소장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불타버렸다. 그러나 방화의 장본인이 몽골군이 아닌 고려의 백성이었으리란 설도 있다. 승장(僧將) 김윤후의 공격으로 지휘관 살리타가 전사하면서 몽골군은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부인사의 대화재는 몽골군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외려 대장경 인쇄를 위한 종이와 피륙를 얻고자 지역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전가됐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대장경의 소실은 난민과 승병 간 전투의 희생양이란 이야기. 고려 말기의 대찰들은 가람(伽藍)이 아닌 장원(莊園)이었다. 깨달음을 향한 열정이 아닌 자본을 향한 탐욕이 결집하는 공간이었다. 국가와 결탁한 불교는 불심을 왜곡하고 민심을 등졌다. 고려와 불교의 멸망은 운명적이었다. 부인사의 영광도 이때까지다. 물론 이것은 <고려사>에 기초한 사실이다. 고려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에 비해 자료가 부실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있어도 <고려왕조실록>은 없다. <고려사>는 조선왕조가 편찬했다. 고려를 무너뜨린 자들의 기록이다. 고의적인 폄하와 누락이 빤히 보인다. 역사 밖의 역사, 역사가 무시한 역사를 알 도리가 없다.

책 속의 진실은 눈앞의 진실보다 못 미덥다. 그러나 눈앞의 진실은 책 속의 진실에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 체험은 권력이 되기 어렵다. 장씨가 술을 마셨는데 이씨가 취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둡고 습한 삶의 근본을 견디지 못한다. 뚜렷한 정답을 확보해 더 나은 자아를 움켜쥐려 분투한다. 인정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니까.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는 삶은 가난하다.

대구=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46호/ 7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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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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