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부인사의 포도밭 |
대구 부안사 입구에 있는 포도밭. 왼쪽의 돌덩이는 부인사의 옛 당간지주로 추정된다. <고려사>는 “명종 10년(1180) 6월 큰 비가 내려서 부인사가 있는 북산에서 큰물이 솟구쳐 나와 물에 잠기고 떠내려간 절간이 80여 칸이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9명이었다”고 적었다. 당시 홍수를 막기 위해 설치한 대수로의 일부도 지상으로 튀어나와 있다. 개인 소유지여서 추가적인 발굴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사찰의 경내지는 역대 주지 스님들의 꾸준한 불사로 원상 복구됐다. 그러나 포도밭에 묻힌 역사는 속수무책이다. 사찰에선 부인사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증거는 연약하고 증거가 발 디딘 땅은 남의 것이다. 힘든 싸움이다. 고려와 불교의 멸망은 운명적이었다. 부인사의 영광도 이때까지다. 물론 이것은 <고려사>에 기초한 사실이다. … <고려사>는 조선왕조가 편찬했다. 고려를 무너뜨린 자들의 기록이다. 고의적인 폄하와 누락이 빤히 보인다. 역사 밖의 역사, 역사가 무시한 역사를 알 도리가 없다. 왕실의 돈독한 불심과 목판인쇄 문화의 개가였던 대장경판은 개경 흥왕사에서 보관했다. 부인사로 옮긴 때는 인종 10년(1132)이다. 나라의 대보를 굳이 지방으로 이관한 까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수도의 불안한 정세 때문이었다. 거란의 침략은 3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와 3차 침입은 서희와 강감찬이라는 영웅 덕분에 대재앙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의 황제가 직접 거병한 2차 침입 때는 왕궁까지 점령됐다. 거란이 쇠하자 여진이 흥했다. 이자겸의 난(1126)이 지나가고 묘청의 난(1135)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명분을 지키려다 잿더미를 만드느니 국가 제일의 호국사찰인 부인사에 두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현종은 아버지가 조카딸과 간통해 세상에 태어난 인물이다. 어머니는 그를 몰래 낳고 죽었다. 개경 함락 당시 그의 피난길에 따르는 신하는 너덧 명이 고작이었다.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의 호족이 무서워 나주까지 더 내려갔던 사실은 서글프다. 개인사는 비참했고 왕권은 우스웠다. 따라서 장경불사는 부모의 명복을 빌고 왕권의 정통성을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가설이다. 거기엔 왕권에 대한 신권(臣權)의 존중이 선행돼야 했다. 대장경의 조성도 대장경의 이운도 가장 절실한 목적은 화합이었다. 부인사 소장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불타버렸다. 그러나 방화의 장본인이 몽골군이 아닌 고려의 백성이었으리란 설도 있다. 승장(僧將) 김윤후의 공격으로 지휘관 살리타가 전사하면서 몽골군은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부인사의 대화재는 몽골군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외려 대장경 인쇄를 위한 종이와 피륙를 얻고자 지역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전가됐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대장경의 소실은 난민과 승병 간 전투의 희생양이란 이야기. 고려 말기의 대찰들은 가람(伽藍)이 아닌 장원(莊園)이었다. 깨달음을 향한 열정이 아닌 자본을 향한 탐욕이 결집하는 공간이었다. 국가와 결탁한 불교는 불심을 왜곡하고 민심을 등졌다. 고려와 불교의 멸망은 운명적이었다. 부인사의 영광도 이때까지다. 물론 이것은 <고려사>에 기초한 사실이다. 고려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에 비해 자료가 부실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있어도 <고려왕조실록>은 없다. <고려사>는 조선왕조가 편찬했다. 고려를 무너뜨린 자들의 기록이다. 고의적인 폄하와 누락이 빤히 보인다. 역사 밖의 역사, 역사가 무시한 역사를 알 도리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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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사로 새롭게 거듭난 부인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