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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세에도 수행하는 ‘장수도인’ / 내장사 조실 동성스님

불기2553 부처님오신날 특별인터뷰

願此鍾聲遍法界

合掌歸依入道場

願我一念何在處

端坐默言良久處

“원컨대 이 종성 법계에 울려 퍼지고/ 합장귀의하고 도량에 들어서니/ 원컨대 내 일념은 어디에 있겠는가? / 말없이 단정히 앉아 고요할 뿐이네.” (내장사 범종각 주련)

지난 4월6일. 아침공양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장선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출가수행자들은 세속의 생일을 챙기지 않지만 내장사 조실 동성스님이 중생으로 이 땅에 태어난 날(음 3.11)이다. 1909년 기유(己酉)생이니 세는 나이로는 101세다. 하지만 상좌 대원스님(내장사 주지)은 은사의 세수가 103세라고 한다. 당사자인 동성스님도 “책 만들 때 그렇게(己酉生) 됐다”고만 할 뿐 더 이상 확인해 주지 않는다. 표현으로 봐서 상좌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100세 이후 다시 ‘장좌불와’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생신상도 없고 도량은 안거기간의 어느 날 못지않게 고요했다. 생신상을 차려도 차리지 않아도 은사스님에게 누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원스님은 ‘엄명’을 따를 밖에 없었다. 사중은 평상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대원스님과 시자 무심스님의 안내로 들어선 조실에는 세 분의 스님이 앉아 있지만 인기척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기만 하다.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데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분의 스님은 매년 이맘때쯤 동성스님의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오는 부산 태종사 조실 영공스님과 김포 봉정사 회주 도일스님이다. 두 스님은 모두 세수가 80대 후반이지만 동성스님 앞에서는 노스님이 될 수 없었다.

대원스님의 소개로 인사를 끝내고 앉자 동성스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94. 주민등록증에는 94살이에요.”

100이라는 숫자를 보고 달려들었을 법한 기자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것인가 의심했지만 형식 또한 ‘있는 그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사진설명> 100세때부터 다시 장좌불와하고 있는 동성스님. 오직 부처님만을 생각하는 형형한 그 눈빛 이외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느 곳으로 가는가? 또 만물의 근원은 어디며 무엇이라고 하는가?’ 동성스님은 20대에 들어서면서 스님은 이 생각 저 생각 번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어만 갔다. ‘봄이 돌아오니 꽃은 왜 피며 새는 왜 우나?’ 뒷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며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는 것마다 의심이요, 근심뿐이었다. 나날이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걱정하며 바라보던 부모의 권유로 동성스님은 유람을 떠났다. 금강산 보덕굴에서 홍안백발(紅顔白髮)의 신선 같은 노스님과 인사를 나누게 됐다. 절에 한 번 가보지 않은 청년이었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스님들의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갔다.

“스님은 금강산에 계시기 전엔 어디 계셨습니까?” “자네가 부모태에 태어나기 전엔 어디에 있었나?”

“연세는 지금 몇입니까?” “전三三 후三三이니라.”

“우리 한국의 제일가는 도인은 누구십니까?” “방한암스님이시지.”

“방한암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오대산에 계시지.”

다음에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긴 청년은 유점사-반야암을 거쳐 오대산 상원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한암스님을 친견했다. 동성스님은 이와 같은 상황을 자서전 형식의 <보기출발록)>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부모 태에서 나기 전에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려 왔다고 하자 한암스님이 가까이오라고 하는 거야. ‘귀를 내게 대라’고 해서 스님의 볼에 댔어. ‘알겠느냐?’ 스님이 큰소리를 질렀어. 내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허, 둔한 사람이로군. 나가거라’ 하시는 거야. 쫓겨났지.”

동성스님은 ‘분한 마음’에 상원사에 눌러앉기로 마음을 먹고 부목살이를 시작했다. 낮에는 땔감을 구하고, 저녁에는 귀동냥을 하며 스승의 방 앞을 서성거렸다.

“참으로 엄격한 분이었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에 들어가 27년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로 유명하잖아?”

하지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스승은 얄밉고도 서운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동성스님에게는 약이 됐다. 3개월간 부목을 하고 곧바로 공양주, 채공, 원주살이를 하면서 속세의 때를 하나씩 벗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1년 신미년 10월15일 희봉(喜奉)이라는 불명을 받고 ‘봉(奉)’ 수좌로 그렇게 30년간 스승의 회상에서 수행자의 길을 차근차근 밟았다.

“어느 해인지 모르겠어. 서대가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쌀 서 되를 타가지고 올라갔어.”

보름간 물만 먹고 일체 곡식을 피하는 ‘수벽곡’을 하다 물이 넘어가지 않아 쌀을 먹었다. 다시 곡식만 먹지 않고 독기 없는 먹을거리만을 취하는 ‘벽곡’을 했다. 머루순, 솔잎 등을 먹으며 생체리듬만 감지할 정도가 됐다. 방에는 불을 때지 않고 상(床)을 하나 올려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밤낮으로 몸을 눕히지 않았다.

‘내어 놓으면 잡담뿐이 안 되는데 말할게 뭐가 있느냐’며 말을 아끼던 스님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푸는듯했다.

“하루는 밤에 갑자기 시루떡 냄새가 나며 어머님이 보고 싶은 거야. 화두는 어디가고 망상만 치밀어.”

스님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밖에 나와 산책을 한 후 방에 가서 단정히 몸을 정좌했다. “아, 과연 어렵고 어렵다. 가도 가도 끝이 없으며 해도 해도 진전이 없다. 나갈 수도 없으며 물러설 수도 없다. 앞에는 절벽이요, 뒤에는 맹수로다. 춥기로는 한빙지옥이요, 덥기로는 천만도의 불과 같다. 잡을래야 허공이요, 놓을래야 놓지도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머리를 깨우는 한가닥 소리가 있었다.

“‘꼬끼오’ 어디서 닭이 훼를 치며 울어. 또 밖에서는 ‘탕’하는 소리가 나. 마치 무서운 꿈을 깬 듯 칠흑 같은 밤에 백천일월이 쏘는 것 같더라고.”

말로만 듣던 ‘한 소식’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럴 때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스님들도 있던 데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스님?”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묵언’으로 돌아설 것 같던 스님이 눈을 살며시 뜨며 손을 들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새어나오는 눈빛은 ‘형형하다’는 그대로였다.

아, 어려움이여, 쉽고 쉬움이요

무엇이 어려우며 무엇이 쉬운고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도다

天地는 同根이요, 世界는 一家로다


“누울 시간이 어디 있나” 불자로서 수행하는 방편을 묻자 스님은 ‘말로 어떻게 다 할 수 있는가’라며 답답함을 표현하는 듯 했다.

“아, 어려움이여, 쉽고 쉬움이요. 무엇이 어려우며 무엇이 쉬운고,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도다. 천지(天地)는 동근(同根)이요, 세계(世界)는 일가(一家)로다.”

해석을 듣고 싶었지만 기다렸다.

“그 이튿날 부엌에 나가보니 무쇠로 만든 큰 솥이 깨져있더라고. 여름 내내 불 한 번을 때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솥이 깨졌을까? 누가 깰 사람도 없는데….”

조실스님이 궁금해 상원사로 내려오니 반갑게 맞이해주셨다고 한다. 잠긴 듯했지만 동성스님의 목소리는 힘찼다.

“얼른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니 조실스님도 역시 손가락을 하나 세우시는 거야. 재빨리 ‘천지동근(天地同根)이요, 세계일가(世界一家)로다’ 외쳤지.”

곧이어 조실 한암스님은 글을 한 줄 써 주셨다. ‘霹靂一聲曉天命 丈夫一喝惺宇宙’ 봉정(峯正)이란 법명과 함께.

동성스님은 성냥을 가지고 나와 불살라 버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벽력일성(霹靂一聲)에 효천명(曉天命)이요, 장부일할(丈夫一喝)에 성우주(惺宇宙)로다’라고 낭독한 후 동성스님은 방을 나섰다. 또 하나의 번뇌라고 생각했을까?

다시 70여년을 넘어 현실로 돌아온 스님의 방에는 그 흔한 휘호 하나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세상과의 경계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일까? 텔레비전 하나가 덩그러니 한 쪽 벽을 지키고 있다.

생식 6년, 장좌불와(長坐不臥) 7년. 스님은 여느 수좌들이나 다름없이 수행납자의 본분을 다지며 제방을 주유했다. 국내 제방선원은 물론 해외 만행도 스님에게는 큰 공부가 됐다.

노 수행자의 한 세기에 가까운 이력에 주의를 빼앗기다 보니 또 다른 선입견이 생긴 것일까. 80년 가까운 수행자에게서 빼앗아 갈 것을 생각해봤다.

“부처님오신날 즈음해 찾아뵈었으니 재가불자들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지 대원스님까지 나서서 지원했다. 하지만 동성스님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다. 1시간 가까이 스님은 차 한 잔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빼앗을 것일까. 스님 건강을 생각해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 떠올랐다. ‘묵언정진’으로 돌아갈 것 같던 동성스님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가 뭘 알아.”

“스님들께서는 모른다고 그렇게 사양하며 공부하지만 재가불자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아직 몰라. 모르니까 지금까지 이러고 있잖아.”

“무엇을 모르신다는 것인가요?”

“자아(自我),자성(自性)이지 뭔가.”

“… …”

“시간 없어. 그만 하고 가. 목말라.”

스님은 만 100세가 되던 날부터 눕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산문을 나오다 다시 돌아보니 일주문의 주련이 새롭게 다가온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사진> 상좌 대원스님과 동성스님.

동성스님은…

독립투사 아들…한암스님 제자

주민등록상 연령은 94세지만 실제 나이는 103세라고 한다. 법을 전해준 청우스님 문집과 ‘자서전’으로 보면 수행이력은 다음과 같다.

1909년 음력 3월11일 충남 논산에서 순흥 안(安)씨 연계(緣繼) 안중팔(安重八)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뻘이다. 속명은 치상(致商).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간도로 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곳에 한인촌을 짓고 수만명의 동포를 이주시켜 생활을 안정되게 도왔으며 임시정부의 독립항일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귀국해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오대산 도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발길을 옮겨 수행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1931년 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 영호(映湖)스님의 법을 이은 청우(聽雨)스님에게 입실했다. ‘身在金剛裏 慧得金剛藏 手執金剛 擲破一乾坤(몸은 금강 속에 두고/ 지혜는 금강장을 얻으며 손은 금강봉을 잡고 하나로 하늘 땅을 깨부셔 던질진저)’ 전법게와 함께 동성(東星)이라는 호를 받아 백파 선사의 법통을 이었다. 당호격으로 서주(西洲)도 함께 쓴다. 불교정화 때 강원종무원 재무부장을 역임했으며, 삼척 청련암, 고성 건봉사, 해남 대흥사 주지 등을 지냈다. 대천 배달정사 회주로 현재는 정읍 내장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저서로는 자서전인 <보기출발록(譜己出發錄)> 등이 있다.

간경은 ‘가는 길’ 참선은 ‘행함’

“복 · 지혜 함께 갖춰 수행하라”

은사 한암스님의 가르침

동성스님이 어느 날 조실 한암스님<오른쪽 사진>으로부터 강릉의 칠성암 개축 불사를 맡으라는 명을 받았다. ‘소질이 없어서 가지 않겠다’고 발을 빼려하자 조실스님은 ‘소질이 있고 없고는 관계없이 가서 집만 지키면 되는 일이니 가도록 하라’며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순(耳順)이 넘어 잠시 요양 중일 때 한 지인이 동성스님의 구술을 받아 옮겨놓은 것이 자서전격인 <보기출발록(譜己出發錄)>이다. 스님은 자서전 때문에 쓸데없는 말만 자꾸 만들어진다며 시큰둥해 하지만 귀중한 가르침을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됐다.

“중은 첫째로는 염불, 둘째 간경, 셋째 참선, 넷째 가람수호, 다섯째 삭발염의이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니 부처님을 믿지 못하면 어긋나기가 쉬우니 철저히 믿어야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 고로 평생을 잘 믿어야 하며 세세생생에 부처님 말씀을 의심치 말 것이며, 간경(看經)은 노정기와 같아서 길을 가려면 먼저 어느 곳으로 가며, 어떠한 곳을 거쳐서 가는지 잘 파악한 연후에 길을 떠나야만 고생을 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부처님도 처음에는 바라문을 따라 고행만 하다가 다시 발견하여 바로 길을 간 것이니 먼저 노정기를 바로 알아야 한다.”

“참선은 행함이니 부지런히 가야만 목적지에 도달하니 여념이 없이 행하여야 하며, 목적은 ‘지무생사(知無生死), 체무생사(體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니 생사가 없음을 알았으면 스스로 몸을 단련하여 몸에 배도록 연마할 것이며, 몸의 연마가 잘 되어야 자재할 것이니라. 장군이 칼을 쓰려면 많은 수련을 쌓아야 어떠한 적도 대치할 수 있듯이 몸으로 체득하여야만 될 것이며 많은 수행을 닦은 연후에 생사를 자유자재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더 많이 살 수가 있었지만 후에 중생을 위하여 와석종신(臥席終身)하여 생사의 근원인 사(死)를 중생에게 보여 주시느라고 가섭이 오기 전에는 몸이나 관에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려하였지만 타지 않고 가섭이 도착한 후 발을 관 밖으로 내보여서 죽지 않았음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달마대사는 9년 동안이나 소림석굴에서도 죽지 아니하고 몸으로 연마하여 법을 전한 후에 약기를 받고 근본의 사를 보여주었으며, 그 후 총영 도중에서 송운을 만나 신 한 짝을 주시며 나의 탑을 헐고 관 속의 신 한짝을 맞추어 보라 하시고 서역으로 가시어 생사의 용을 보여 주셨으며 고조사들도 모두 갔을 때에 법상에서 설하다 그대로 법상에서 가시고, 앉아 가고 또한 서서 가고 마음대로 가는 것이 공부로다. 심지어는 처사도 그러했다.”

“중국의 방 거사는 딸과 아들 둘과 부인과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갔으며, 진묵대사는 거꾸로 서서 가기도 하였다. 이것이 불교의 구경목적이지만 대들보 하나로 집이 될 수 없으며, 기둥과 서까래 하나라도 없으면 집이 아니 되는 것과 같이 모든 게 갖추어져야만 하는 법이니 공부를 하자면 가람수호도 하여야만 그 곳에서 공부도 할 수 있고 또 신도의 인연작복도 지어야만 하며 복과 지혜를 쌍수해야만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되며, 삭발염의로 중이 되었으면 모든 것을 구비하여 갖춰서 수행하라.”

<사진>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평소 가까이 하는 대중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대원스님, 동성스님, 도일스님, 무심스님, 영공스님(왼쪽부터).

곁에서 본 동성 노스님

자나깨나 부처님 생각 ‘일념’

“語默動靜 그대로가 본보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까? 60여년 틈틈이 곁에서 지켜 본 영공스님과 도일스님은 동성스님 그대로가 수행자의 참모습이라고 전한다.

“백수가 다 되어서도 ‘행주좌와’ 스님의 몸과 마음이 넘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표현을 거의 하지 않지만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적재적소에 꼭 맞는 게송(偈頌)입니다. 하지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니 저 또한 전할 수는 없지요. 오욕(五慾) 가운데 식욕 또한 자제하기 어려운 욕구 중에 하나인데도 식사량 한 번 변하지 않거니와 빠트리는 법도 없습니다.”

일상 그대로가 수행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감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세우는 일은 절대 없는 분이라며 영공스님은 조심스럽게 동성스님의 일상 그대로를 전했다. “여행하다 보면 흔히 찾게 되는 소화제 한 번 쯤 찾는 일이 없어요. 일상이 모두 그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동성스님의 그런 일상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는 이가 손상좌 무심스님이다.

“눕지 않으십니다.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아주 피곤하면 앉은 그대로 잠시 눈을 붙이는 정도입니다.”

동성스님은 찬바람을 막기 위해 방석으로 발을 덮고 앉은 그대로 하루 24시간을 보낸다. 달포 전부터는 조실(祖室)에서만 보내지만 함께 예불을 다녀올 때면 다짐을 받아낼 것같이 따끔하게 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예불할 때는 부처님을 그렇게 찾다가 법당만 나오면 부처님을 어디 다 팔아먹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면서 “저분은 왜 부처님이 됐을까? 왜 부처님으로 불릴까? 법당에서만 형식적으로 부처님을 찾지 말고 자나 깨나 그것만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가를 이룬 노년의 자식이라 해도 못 미덥고 걱정이 앞서는 것이 세간의 부모마음이라고 하지만 이는 출세간에서도 다르지 않다. 상좌 대원스님은 얼마 전 주차장을 옮겼다. 외출을 했다 늦게 들어올 때면 늘 마음을 졸일 것 같은 은사를 위해서다. “원래 은사 스님 처소 근처에 제 주차장이 있었어요. 어느 날 공무 때문에 꽤나 늦게 돌아와 주차를 하는 데 인기척을 하시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일만 하신다는 금산 태고사의 도천 큰스님 아시죠? 우리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90이 넘어서도 젊은 사람들도 견디지 못 할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도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겁니다.”

오가는 사람에게는 상하를 불문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고 주지스님과 대중들로 하여금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피게 하는 것 또한 은사의 영향이 컸다.

“겸손하고 근검, 절약하라. 어릴 때부터 50이 넘은 지금까지 제가 스님께 듣는 말씀입니다. 저보다 두 배 가까운 삶을 사셨지만 한 치의 소홀함이 없는 분입니다.”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는 표정을 짓다가 대원스님은 “최근 들어 ‘몸은 마음대로 못 하겠다’고 하신다”며 은사 스님이 좋아하는 글 두 점을 꺼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千災雪消 萬福雲興

(모든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중생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하고/ 많은 재앙은 눈과 같이 녹아 없어지고 많은 복은 구름과 같이 일어난다)

身康鐵石 命若泰山 萬事如意 圓滿成就

(몸이 쇠와 돌같이 건강하면 수명이 태산 같고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원만히 성취된다)

정읍=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522호/ 5월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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