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언론과 선수행 '화두'는 같나 |
문 : 신문이나 방송에서 ‘올해의 화두’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불교의 선 수행에서 사용하는 화두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까? 유래는 같으나 뜻.방향은 달라 답 : 유래는 불교의 화두(話頭)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뜻이나 방향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에서 체계화된 공안(公案) 또는 화두는 큰 의심을 촉발시키는 함축적인 말입니다. 이 화두라는 형태는 비록 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근본은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싯다르타태자는 당시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였고 모든 사상을 접했으나 삶의 근본에 관한 의문이 풀리지 않자 결국 출가를 하게 되었고, 명상수행에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선정에도 도달하였지만 의심이 풀리지 않자 6년이라는 고행을 하였으며,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자 역시 고행마저도 버립니다. 고행으로 쇠잔해진 몸의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 자리를 옮겨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 정좌하셨고, 바로 거기에서 깨달음을 이루시게 됩니다. 보리수 아래의 수행이 지금 선수행의 시작이 되고 부처님이 품으셨던 의심이 화두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화두라는 용어는 대개 ‘주된 초점, 풀어야할 숙제, 목표’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풀어야 할 숙제’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화두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관문과 같은 것이니까, 깨달음을 목표로 한 사람에게는 평생의 숙제와 같다는 점에서는 통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 그 자체가 초점은 아니기 때문에 ‘주된 초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래의 화두에는 맞지 않습니다. 또 화두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기에 ‘목표’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흔히 인용되는 말이지만, 부처님께서 하셨던 표현대로 교(敎)나 선(禪)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지요. 화두는 비유컨대 인공위성의 발사대나 다이빙의 도약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발사대와 도약대에 머물고 있다면 인공위성도 다이빙도 아니듯이, 화두에 머물고 있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며 결코 불교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간화선이 생기게 전의 옛 스님들은 정형화된 화두를 참구한 것이 아닙니다. 화두의 생명력은 맹렬한 의심에 있는 만큼 정형화된 화두를 들어도 의심이 없으면 깨달을 수 없고, 비록 정형화된 화두를 들지 않아도 근본 문제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계속 참구하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화두가 의심이라고 했지만, 현상적 문제의 해결에 대한 의문을 계속한다고 해서 그것이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부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계속한다고 그것이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깨달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깨달음이 생의 본질을 깨치고 더 이상의 고뇌가 없는 삶이라면, 부자는 가난한 것보다는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고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에서 사용하는 화두는 그 지향점이 고정관념 등을 깨뜨리고 버림으로써‘없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번뇌로 인한 고통이 없는 평화로움인 적멸의 깨달음에 드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요즘 언론 등에서 사용하는 화두는 그 지향점이 모으고 이룸으로써 ‘있음’으로 가는 것이며, ‘있음’에 대한 집착은 고뇌의 요인이 되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어는 같으나 내용은 다른 것입니다.송강스님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399호/ 2월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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