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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멀리하면 국가 멸망 교훈 보여주는 가람

고구려 불교 지키다 망명한

보덕화상 정신 계승한 사찰

 

열반종 8대 사찰 대표 가람

연중 참배객 관람객 방문 명소

 

전북 진안 마이산(馬耳山)은 년 인원 수 십 만 명이 찾는 명소다. 생김새가 말 귀를 닮았다하여 조선의 마이산이라 이름 붙였다. 이 산이 유명한 이유는 다른데 있다. 탑사(塔寺) 때문이다. 돌로 쌓아올린 탑을 보기위해 전국에서 사시사철 참배객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 특이한 모양새의 바위산과 돌탑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그러나 마이산을 대표하는 사찰은 금당사(金堂寺)다. 마이산 공원 초입에 자리한 금당사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金山寺) 말사로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찰이다. 이 곳은 열반종의 본찰로 고대 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장소다. 전쟁으로 인해 전소돼 대찰의 면모가 많이 약화됐지만 역사적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았다. 금당사 주변은 물론탑사 주변을 포함 마이산 일대 50여만 평이 금당사 소유라는 사실에서 마이산이 곧 금당사이며 금당사가 마이산임을 알 수 있다.

 

마이산 대표하는 사찰

 

이 절에는 삼국시대 후반기의 복잡했던 역사가 서려있다. 금당사 창건주로 알려진 무상(無上)과 제자 금취(金趣)는 고구려 고승 보덕(普德)화상의 제자다. 보덕은 원래 고구려 고승으로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아들이고 숭상하자 이에 반대해 백제로 망명했다. 보덕은 당대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 보인다. 스님에 관해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직책의 인물이 기록을 남겼다. 신라 말 중국에 까지 명성을 떨친 유학자이며 말년에 해인사에서 입적한 최치원이 보덕의 전기를 남겼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와 의상이 보덕에게서 <열반방등경>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이 그의 행적을 기록했다. 이러한 사실은 보덕이 고구려는 물론 통일신라 고려대 까지 영향을 끼친, 불교사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 역사에서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한 수행자에 관해 이토록 오랫동안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기록을 남기고 숭상한 사례가 없는데 왜 보덕은 남다른 대접을 받았을 까?

그 이유는 보덕을 최초 기록한 최치원에서 찾을 수 있다. 말년에 해인사로 들어가 고승전을 정리한 최치원은 보덕화상을 통해 불교를 멀리하는 나라는 멸망한다는 교훈을 남기고자 했다.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선택한 고구려는 얼마가지 못해 당나라에 무너졌다. 불교를 숭상하고 널리 편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하게 빛난 반면 불교를 멀리했던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점을 보덕화상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불행은 중국이 통일되면서 시작됐다. 천년 넘게 분열돼 다투던 중국은 6세기 말부터 통일왕조 시대를 연다. 628년 당이 수를 이어 중원을 차지하면서 북방의 강자 고구려는 위기에 빠졌다. 당과 전쟁과 평화의 기로에 놓였던 고구려는 화평을 택했다. 화평의 결과가 중국의 종교 도교 도입이었다. 고구려의 도교 수용은 624년과 625년, 그리고 643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624년 당고조는 고구려에서 오두미교(도교)가 성행한다는 사실을 듣고, 천존상을 보내고 도사를 파견하여 도교의 교법을 강의하게 했다. 625년의 도교 전래는 고구려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구려 왕실 차원의 도교 도입은 외교 정책이면서 국내 귀족세력과 불교 견제가 목적이었다. 고구려 영류왕은 도교를 통해 자신과 대립하던 귀족세력과 불교교단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당과의 화평은 실패했다. 오히려 갈수록 북방을 넘보는 중국의 공세만 더 거세졌다. 외교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국내 분열만 자초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의미 없는 당과 화평, 도교 도입을 더 확대 했다. 보덕은 도교를 받아들이는 연개소문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무력이나 화평 같은 외교정책이 아니라 『열반경』 강경을 통해 당시 불교교단 내부의 문제와 불교계의 위기상황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보덕이 연개소문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정의를 부르짖는 자가 탄압의 대상이다. 보덕이 귀족과 손잡고 적당히 정치에 편승했다면 탄압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연개소문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고구려를 위한 정책을 폈다면 보덕을 환대했을지 모른다. 아무런 뒷 배경도 없이 부처님 가르침으로 위기에 빠진 고구려와 불교를 구하고자 했던 보덕은 평양에서 쫓겨난다. 고구려내 불교 개혁과 계율강화를 통한 국가 부흥을 꿈꿨던 보덕의 시도는 좌절되고 보장왕 9년(650)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이주하였다. 보덕이 고구려를 떠난 후, 연개소문 가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고구려는 헤어날 수 없는 길로 더 깊숙이 발을 디뎠다.

 

수많은 문헌 통해 보덕 기려

 

비래방장을 묘사한 해인사 벽화

백제로 이주한 보덕은 완산 고대산에 비래방장(飛來方丈), 경복사를 창건했다. 완산은 백제 왕도와 떨어져 있지만 왕도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고 있는 지역인데다 무왕 이후 불교문화가 활발했다. 보덕은 완산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 나갔다. 보덕과 그 제자들의 활동으로 완산 지역에는 고구려 불교의 사상적 유풍이 형성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으로 유민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게 되었다. 어쩌면 보덕은 고구려 멸망을 예견하고 유민들이 정착할 땅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망명을 한 것인지 모른다. 백제 멸망 후에도 신라는 보덕이 활동했던 완산과 그 일대를 보덕국으로 설치해 특별 대우를 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과정이 여러 문헌에 잘 나와 있다.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기본 골격은 동일하다.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를 멀리하여 풍속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원망이 커져갔다. 고구려 고승들은 수행하고 교화하던 절을 도교에 빼앗기고 신라, 일본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보덕화상은 왕에게 나아가 간하였다.

“상감마마 이 나라는 처음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부처님의 자비, 화합정신이 보급되어 상하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들이 복되게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상감께서는 도교를 받아들인 후 불교를 박해하시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고승들이 나라 밖으로 떠나게 되어 민심이 분열되니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라고 하니 왕은

“듣기 싫소. 음식도 바꿔 먹어야 구미를 돋우는 법이고 의복도 새 것으로 바꿔 입어야 청신한 맛이 있는 법이요. 그러니 화상도 내가 하는 일이 못 마땅 하거든 이곳을 떠나면 될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보덕화상은 ‘나라가 어지러우니 임금의 눈도 흐려지는구나. 아무리 간하여도 소용이 없이 없으니 이것 역시 천운이다. 내가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는 절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일찍 이곳을 떠나야겠으니 모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너희들 중에 수도할 만한 좋은 도량을 보아 둔 사람이 없느냐?”하니 “몇 해 전에 찾아본 남쪽의 완산주 고달산이 좋아 보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 내일부터 그곳에 옮겨가서 살아야 겠으니 그리 알아라”했다. 그 이튿날 새벽에 한 제자가 일찍 일어나서 도량석의 염불을 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살던 절은 그대로인데 주위 산천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제자가 스승에게 쫓아가 말씀드렸더니, “간 밤에 내가 신통력으로 우리가 살던 평야의 반룡사를 이곳 완산주 고달산(高達山, 지금의 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옮겨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설화를 묘사한 벽화가 해인사에 남아 있다. 보덕화상이 열반종 본산으로 건립한 경복사는 터만 남았다. 그 제자들이 지금의 전주 주변 모악산과 전국에 열반종 사찰을 지었는데 이를 일러 열반종 8대 사찰이라 한다. 폐사된 곳도 있고 공주 신원사, 문경 대승사, 완주 대원사 처럼 가람을 잘 유지한 곳도 있다. 이 중에서 역사와 가람 규모 등에서 금당사가 보덕화상을 잇는 열반종 본찰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는다.

 

보물 지정 괘불, 고려 석탑 유명

 

지난 7월 말 평일인데도 마이산을 찾는 참배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 금당암은 제 면모를 갖추는데 한창이다.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탱화를 제대로 모시는 불사가 한창이다. 사찰 역사와 내력에 걸맞게 당호도 대웅전에서 극락보전으로 바꾸었다. 고려시대 탑도 제 자리를 찾았다. 열반종 본산임을 알리는 안내서가 사찰 입구에 서 있다. 금당사는 많은 역사와 인물을 자랑한다. 나옹 혜근스님(1320~1376)이 주석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금당에서 북쪽으로 500m거리에 있는 고금당은 나옹대사가 대각을 얻은 곳이다. 보물 1266호로 지정된 금당사 괘불에도 나옹스님과 얽힌 전설이 있다.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 봄 사람들은 금당사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어려운 사정을 들은 금당사 스님은 기우제를 올리라고 일러준 뒤 호랑이를 타고 사라진다. 사흘 뒤 돌아온 스님은 절의 뒷마당에 사람 형상을 그리고 그 자리를 파라고 말했다. 스님이 가리킨 곳의 땅을 파보니 한 폭의 괘불이 묻혀있었고, 이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올리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스님이 바로 공민왕 때의 고승 나옹스님이다.

 

금당사 보물 괘불탱

나라가 일제에 의해 패망했을 때 금당사는 항일 의병운동결사체 창의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당시 금당사 주지 김대완스님은 유림들과 의기 투합, 비밀장부인 `동맹록'을 제작 배포하는 한 편 사찰의 법고를 동원해 의병 운동을 전개했다. 임진 병자 호란을 거치며 폐사되고 일제시대 의병의 본거지였다는 이유로 탄압 받는 등 오랫동안 묻혀있던 금당사는 최근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중앙종회의장 원행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각종 소송을 해결하고 가람을 정비하면서 열반종의 본산이었던 그 명성을 회복 중이다.

 

한중일 다기 전시관도 명소

 

보덕은 왜 열반종을 택했을 까? 열반종의 핵심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실유불성(實有佛性)관, 즉 인간 평등성을 주창한다. 모두 불성이 있는 소중한 존재이므로 계율을 지키고 보살행으로 그 성품을 일깨워 영원한 행복과 안락을 누린다는 것이 열반종의 가르침이다. 보덕은 도교가 말하는 불노장생(不老長生)은 자연은둔, 신비한 약초 등이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깨우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자비행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해동의 성자로 추앙받는 원효와 의상이 보덕의 열반종을 계승했고 오늘날 한국불교가 원효 의상에 기대고 있으니 보덕은 여전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금당암이 그 정신을 올곧게 이어가고자 노력 중이다. 가을에는 금당암에 한중일 삼국의 다기(茶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 개관한다. 부처님 열반의 참 의미를 되새기고 마이산의 아름다운 가을 모습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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