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조선실록으로 김일성대학과도 인연 있는 화합의 가람

묘향산 史庫 보관 ‘실록’ 이관 받아
조선 300여년 간 史庫 사찰로 기능
6·25 전쟁 때 북이 강제로 반출해가

사고 수호하던 호국사 전쟁 중 소실
수몰 위기 벗어나 대가람으로 변모

 

안국사 전경

무주 안국사는 진기한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버스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해발 1,092미터에 자리하고 있다. 그토록 높은 곳에 버스가 올라가는 이유는 특이한 풍경 때문이다. 산 정상에는 넓은 호수가 있다. 산 꼭대기에서 만나는 호수는 경이롭다. 산 아래에서 물을 끌어올려 저장했다가 낙하하면서 얻는 운동력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양수발전이라는 사실을 알면 사람들은 더 놀라워 한다. 산 아래를 조망하는 탑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 정상 양수 발전 경탄

안국사를 품은 적상산(赤裳山)은 사면이 암벽으로 둘러 쌓인 천연 요새 형세다.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적상산이다. 안국사 가는 길은 포장도로가 일반적이다. 하늘로 오를 듯 굽이 굽이 돌아가는 도로를 따라가면 터널이 나오고 갑자기 넓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왼쪽의 호수를 따라난 도로를 더 올라가면 적상산 사고(史庫) 복원구역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안국사(安國寺)다.

등산로도 운치 있다. 지난 11월28일 안국사로 걸어서 갈 수 있는 두 길 중 서창(西倉) 탐방로를 통해 올랐다. 최영장군이 칼로 내리쳤다는 전설이 서린 암벽에다 백제시대부터 있었다는 산성터, 낙엽이 쌓인 고즈넉한 길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동국여지승람〉은 “사면이 곧추 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여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그 이름이니,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 두 갈래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솟아난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라,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근방 수십 고을을 참략해 들어왔을 때도 백성들이 모두 여기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했다.”고 적었는데 묘사한 그대로다.

사고 수호 사찰 되며 중흥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창건하고 무학대사가 삼재가 들지 않는다 하며 중창한 안국사는 광해군 6년(1614)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면서 다시 한번 변화를 맞는다. 고려와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정에서 일어나는 동정을 모두 기록했다. 실록이 편찬되면 별도의 장소에 보관을 했는데 이를 사고(史庫)라고 한다. 사고에는 실록전(實錄殿)과 왕실 족보를 기록한 서책을 두는 선원전(璿源殿)을 두었다. 임진왜란 이전 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충주 성주 전주 4곳에 사고를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탔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은 전주본을 원본으로 삼아 1603년(선조 36)부터 3년 간 다시 편찬했다. 이 과정에서 교정본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던 전주사고의 원본과 원본을 새로 편찬한 정본 3부, 교정본 1부 등 모두 5부의 실록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시내가 아닌 전란을 맞아서도 화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중이나 섬에 보관했다. 원본인 전주 사고본은 강화 마니산에 두었다가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정본 가운데 1본은 예전처럼 서울의 춘추관에, 나머지 2본 중 하나는 태백산 사고와 묘향산 사고에 두었다. 교정본은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사고와 실록 수호를 위해 수호 사찰을 지정했다. 정족산 사고 전등사, 태백산 사고 각화사, 묘향산 사고 보현사, 오대산 사고 월정사 등이다.

그런데 남쪽 바다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 북쪽에 사고를 설치했는데, 이번에는 만주 땅에서 후금(後金)이 일어나 북쪽 국경이 불안해졌다. 이에 묘향산 사고를 옮기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나 1610년(광해군6)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적상산의 지형을 살피게 했다. 그리하여 1614년 적상산 실록전을 창건하고 1618년 ‘선조실록’을 봉안했다. 그리고 1634년(인조 12) 묘향산에 보관하고 있던 실록을 적상산 사고로 이관했다. 1641년 선원전을 세우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락’을 보관하면서 사고로서 면모를 완전히 갖추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적상산 사고는 사고 12칸, 선원 6칸, 수사당 6칸, 승장청(僧將廳) 6칸, 군기고(軍器庫) 7칸, 화약고 1칸이 들어서고 이 곳에 실록 824책, 선원록 1,446책, 의궤(儀軌) 260책, 잡서 2,984책으로 총 5,515책을 보관했다.

사고는 스러져도 사찰은 영원

다른 외사고가 그렇듯 적상산 사고를 수호한 것은 조선에서 가장 천대받던 스님과 불교였다.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왕실 기록과 족보를 국가가 가장 천대하던 불교에 맡긴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유학자의 나라 조선은 자신들의 철학과 뿌리가 담긴 서적을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그들이 가장 천시하던 자들에게 맡겼다. 이는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진정 조선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면 조선의 혼과 다름없는 실록과 선원록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권한은 행사하면서도 책임은 아래에 떠넘기고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임무 까지 남에게 전가했기에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불교와 스님들은 달랐다. 이유나 배경과 상관없이 스님들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다. 사고 설치에 앞서 절을 증축하고 덕웅(德雄)스님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이 사고를 지켰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상훈(尙訓) 스님이 사고본들을 거두어 산 정상의 안렴대(按簾臺)아래 바위굴에 숨기기도 했다. 묘향산에 보관돼 있던 실록이 모두 옮겨오고 선원각이 들어서면서 사고의 면모를 모두 갖춘 뒤 승병들의 거주처 호국사를 세웠다. 1771년(영조 47)에 사고 옆 수직승의 기도처였던 사찰을 확장하고 법당을 다시 짓고 이름도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사찰이라는 염원을 담아 안국사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적상산에는 승병이 머무는 수호사찰인 호국사와 사고를 보호하는 안국사가 호국도량으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옛 선원 건물이 천불전으로 남아 이 곳이 사고를 수호하던 사찰임을 보여준다

사고(史庫)는 조선이 망하면서 그 명을 다한다. 적상산 사고 뿐만 아니라 전국의 사고가 같은 운명에 처한다. 일제는 전국의 사고본을 서울로 가져갔다.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옮기는데 현재 정족산 사고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태백산 사고본은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에 보관 중이다.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했던 오대산 사고본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남은 일부가 도쿄대학에 있는 것을 확인한 불교계의 노력으로 지난 2006년 93년 만에 귀환했다. 적상산 사고본은 조선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창경궁 장서각에 소장돼 있다, 6,25 때 북한이 퇴각하면서 반출해 김일성대학에 보관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북은 1980년 조선실록 한글본을 편찬했다. 남쪽은 그보다 한참 늦은 1994년 온라인 검색이 가능한 한글본을 내놓는다. 1997년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했다.

실록을 빼앗긴 사고는 언제 어떤 연유인지 모르게 스러져 폐허로 남았다. 그러나 사찰은 여전히 남아 찬란히 빛난다. 사찰은 한 왕조의 흥망과 관계 없이 늘 민족과 함께 했다. 적상산의 두 사찰도 마찬가지다. 사고사(史庫寺) 역할을 하던 호국사는 여순 사건 당시 빨치산 근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당시 무주 사찰주임이 불태우는 바람에 사라졌다. 안국사는 금산사 말사로 등록돼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워낙 산세가 험해 임명장을 받고 산을 올라오다 중간에 사표를 내고 줄행랑치거나 절에 도착했다 해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내려갔다. 참을성 없는 스님의 허물을 경책하는 듯 안국사에는 ‘인욕바라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설화가 전해온다. 안국사 주불을 모신 극락전을 학이 단청 했는데 주지스님에게 100일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궁금함을 참지 못한 주지가 99일 째 약속을 어겨 극락전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 순간 단청을 하던 학이 날아갔고 지금도 우측 창방 쪽에 그 때 마치지 못한 하루 치 분량의 목재가 남아있다.

 

극락전 창방에 남은 하루 치 단청 분량

총무원장 스님 원력, 번영 맞아

1990년대 들어 안국사는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는다. 수직으로 곧추선 절벽을 이용한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안국사는 수몰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나라를 평안케 한다는 사찰 이름처럼 나라의 명운과 함께 해온 사찰이 사라지는 것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상산을 중심으로 30여 자연마을에 분포된 안국사 신도들이 나서 수호 기도를 올리고 각고의 노력을 펼쳐 한국전력으로부터 안국사 이전 복원 약속을 받아냈다.

1993년 옛 호국사터로 이전한 안국사는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당우를 짓고 가람을 정비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어간에서 동쪽으로 살짝 내려앉은 극락전 앞마당에 서면 덕유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오고 마치 구름 위에 서있는 듯 황홀한 광경을 마주한다.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영험이 서려있는 보물 제1267호 괘불을 비롯하여 범종 극락전 등 많은 성보를 간직해 참배객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왕조가 버린 선원전을 품어 천불전(千佛殿)으로 삼으면서 안국사는 이제 사고 수호 사찰이 아니라 왕조의 역사 마저 품은 사찰로 위상이 달라졌다.

겨울이 찾아온 안국사는 참배객들로 붐볐다.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삼도(三道)가 만나는 경계에 자리한 안국사는 이제 한반도 평화시대를 맞아 남북 평화 화합의 도량으로 기대를 모은다. 묘향산 보현사가 품었던 조선실록을 인계 받았으니 안국사는 한반도 평화의 가교로 제격인 셈이다.

인내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경책하던 극락전 학의 전설은 이제 전설로 남는다. 험난한 자연 지형에다 정부와 관의 방해와 비협조 등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참아낸 주지 스님 덕분에 안국사는 창건 후 가장 번창한 시절을 맞았다. 그 스님은 지난 가을 적상산 단풍이 물들어갈 무렵 조계종 총무원장 소임을 맡았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