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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두 점의 범종은 모두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 범종으로 현존하는 고려시대 후기 소종 가운데 정교한 세부 장식 면에서 단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려 후기 종의 가장 두드러진 양식적 특징은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의 정착과 작은 소종의 제작이 크게 늘어난 점이다. 이러한 고려 후기 소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두 범종은 고려 제작 당시에도 탁월한 외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어느 시기쯤 일본에 건너간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성 때문에 두 점 모두 일찍부터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 관리되어 왔다.

▶ 시카노우미진자 소장 범종

음통과 용뉴 주변의 구름장식

하늘로 승천하는 용 모습 표현

갑옷 입은 신장 사천왕상 추정

우선 후쿠오카시 소장 범종은 일본 국보인 금인(金印)이 출토된 장소로 유명한 시카노시마(志賀島)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의 시카노우미진자(志賀海神社)에 소장된 작품이다. 오랜 기간 신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9년 후쿠오카 시립박물관이 건립되면서 현재는 박물관에 기탁 보관되고 있다. 

종의 높이는 52.8cm이며 명문이나 그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전래 경위는 분명치 않다. 종신에 비해 용뉴와 음통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된 감이 없지 않지만 용뉴는 그 머리를 천판(天板) 위에서 완전히 떼어 전면을 바라보고 있다. 입은 크게 벌렸으나 보주는 물고 있지 않다. S자형으로 굴곡진 용의 몸체 좌, 우로 뻗은 양 발 가운데 왼쪽 발의 상단부는 현재 절단되어 남아 있지 않다. 목 뒤에서 뻗어 나온 불꽃 장식(焰翼)은 음통 위로 역동적으로 크게 표현되었고 음통은 그 전체를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당초문과 음통의 상부에는 6개의 작은 보주가 부착되어 있다. 특히 이 음통과 용뉴 주위를 타원으로 돌아가며 구름을 돌기시켜 놓아 마치 구름 위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이러한 천판 위의 장식된 구름 모습은 일본 스미요신 진자(住吉神社) 소장 고려 초기 범종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종신의 상대 위로는 전형적인 입상연판문대가 높게 돌기되어 있다. 오각형으로 구성된 각각의 화문대에는 상부마다 작은 구슬(小珠)을 부착하였고 내부에는 화형의 장식을 첨가하여 한층 화려하게 꾸몄다. 상, 하대는 동일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넝쿨형태의 당초문과 그 안팎 부분에 활짝 핀 모란 문양을 시문하였다. 상대 아래 붙은 4개의 연곽대에는 상, 하대보다 간략화 된 당초문으로 꾸미고 내부에는 화문좌(花文座) 위에 낮게 돌기된 연뢰를 9개씩 배치하였다. 특히 이 종은 종신 전체를 돌아가며 다채로운 모습의 여러 장식 문양을 부조시킨 점이 돋보인다. 종신의 각 면을 크게 상, 중, 하의 3단으로 나누어 각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상단에는 삼각형 구도를 이룬 유려한 형태의 구름문과 그 아래 중단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이중의 원광(圓光)을 두른 여래상을 표현하였다. 다시 이 여래상의 좌, 우측으로는 천의가 묶여져 바람에 날리는 비파(琵琶)와 박판(拍板)으로 보이는 주악기(奏樂器)가 장식되었다. 

여래상 하단부의 좌, 우편으로 각각 활과 창을 들고 몸을 옆으로 돌려 마주보는 자세의 신장입상(神將立像)이 2구씩 부조되었다. 이 1조씩의 신장입상은 갑옷을 입은 모습과 지물로 미루어 사천왕상을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작은 크기 임에도 매우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이 신장 입상사이마다 국화형으로 테두리를 두른 자방(子房)과 원권(圓圈) 없이 16엽의 연판으로 구성된 당좌가 4곳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당좌의 모습은 부안의 내소사종(來蘇寺鐘)과 크기만 다를 뿐 거의 동일한 구성 요소를 보이고 있어 이 종 역시 그와 유사한 13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려 전기 쇼텐지(承天寺) 소장 계지사종(1065)이나 효고현(兵庫縣)의 오노에진자(尾上神社) 종과 같은 고려 11세기 후반 범종에 주로 나타났던 악기를 천의로 묶어 날리는 문양이나 불좌상 밑에 사천왕을 배치한 모습에서는 이른 시기의 도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종은 전기의 고려 종을 계승하면서도 화려한 용뉴와 입상연판문대의 정착, 당좌와 같은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복합적인 양상을 지닌 13세기 전반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종에는 종신 군데군데와 당좌 부분에 도금(鍍金)의 흔적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현존하는 범종의 명문에 기록된 금종(金鐘)의 문구가 미사여구로 알려져 왔지만 이처럼 실제로 종신에 도금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 만타라지 소장 범종

피리처럼 세장해진 음통마디

보주처럼 돌출 장식해 독특

연곽사이 영락연결 매듭장식

이 종보다 약간 뒤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소종이 만타라지(曼陀羅寺) 소장 범종이다. 시가노우미 진자 소장 종보다 작은 45.8cm 정도이지만 화려함이 더욱 강조되었다. 용뉴의 목은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루고 입 안에는 보주를 물었다. 피리처럼 세장해진 음통의 마디마다 연판과 함께 화문의 자방 부분을 보주처럼 돌출 장식한 점이 독특하다. 천판의 외연에는 직립된 입상연판문대를 둘렀고 상, 하대는 서로 다른 문양을 표현했다. 유려한 연당초문이 시문된 상대와 달리 하대에는 내부에 연화문을 새긴 능화형(菱花形) 문양을 연속 배치하고 별 모양의 엽문으로 장식한 점에서 약간의 도식화된 문양 표현이 느껴진다. 연곽대는 넝쿨형의 당초문으로 시문하였으며 각 연곽 안에는 연봉우리 형태의 연뢰가 9개씩 돌출 장식되었다. 특히 이 연곽과 연곽 사이를 영락(瓔珞)으로 연결하고 영락 아래로 매듭 모양의 장식과 긴 수식이 표현되어 전체를 화려하게 꾸몄다. 

영락과 수식 아래로는 보살좌상을 1구씩 부조하였고 보살상 아래의 운형 대좌 옆으로 유려한 비운문(飛雲文)이 장식되어 보살상을 에워싸고 있다. 보살상 아래로는 지물을 든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을 시문하여 종신 전체가 한편의 불화를 보는 것 같다. 한편 종신에 비해 크게 묘사된 당좌는 각 연곽 아래마다 1개씩 도합 4개가 배치되었는데, 1+8개의 연과가 장식된 중첩의 화형 자방을 중심으로 간엽과 8엽의 중판(重瓣)으로 이루어진 연판문으로 두른 뒤 이를 연주문의 원형 테두리(圓圈)로 감싼 모습이다. 이러한 당좌의 형태는 대흥사 소장 탑산사명(塔山寺銘) 범종(1233)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며 이 시기 쇠북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한 구름 위에 표현된 연화좌에 앉아 몸을 옆으로 약간 돌려 합장한 보살좌상과 두광 위에 표현된 구름의 모습도 탑산사종의 보살좌상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따라서 이 범종의 제작 시기는 다른 고려 후기 범종의 양식적 특징과 비교해 볼 때 대체로 13세기 전반에서 중엽 경으로 비정할 수 있다. 

현재 종신에는 원래의 명문이 새겨 있지 않다. 그러나 독특하게 종구(鐘口)의 밑면을 돌아가며 음각 명문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이를 판독한 츠보이 료헤이(坪井良平)는 명문 중에 보이는 ‘이십일갑오(二十一甲午)- -’에 주목하여 이 종의 제작시기를 고려 고종(高宗)의 갑오년(甲午年)인 1234년의 제작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키 요시기(瀧 喜義)에 의해 ‘천정이십일갑오이월일(天正二十一甲午二月日), 일륜사금종 동량부문통감문○(日輪寺金鐘 棟梁副門通監門○), 이천광인국토중평(二千光仁國土中平), 일일남○○○○○(日日南○○○○○), 일광월광범천가대칠(日光月光梵天可大七), 대본례납(大本納)’란 내용으로 다시 판독되었다. 이를 통해 이 명문이 주조 당시의 원명이 아니라 일본에 건너온 추각명(追刻銘)임이 밝혀졌다. 명문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고려 범종은 종신에 명문을 기록한다는 점과 이처럼 구연의 저면 과 같이 잘 보이지 않는 장소를 택해 기록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수긍이 간다. 여기서 ‘천정이십일갑오(天正二十一甲午)’의 천정(天正)의 연호는 일본에서도 19년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21년은 문록(文綠) 2년인 1593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이 한창 치열했던 시기에 아마 어느 절에서 약탈되어 이곳에 기증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 점 모두 원래 원래의 봉안 장소가 분명치 않아 아쉬움을 주지만 우리나라 범종이 고려 후기 왜구의 약탈 뿐 아니라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에도 탈취의 대상이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깊다.

[불교신문3381호/2018년4월4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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