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명운과 함께 한 흥망성쇠”1700년 한국불교 발자취 |
![]() 화엄학을 발전시킨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의성 고운사의 가운루.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때는 삼국시대다. 고구려(서기 372년)와 백제(서기 384년)는 비슷한 시기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했다. 그래서 ‘1700년 한국불교’다. 신라는 이보다 한참 늦은 6세기 초, 이차돈의 순교가 결정적이었다. 이즈음의 불교는 왕을 위한 불교였고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군왕들은 자신이 부처님과 맞먹는 자비와 지혜를 갖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논리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다. 미륵불이 강림해 고통의 사바세계를 용화세계로 승화시킨다는 미륵신앙이 성행했다. 자신들의 나라가 오래 전부터 불연(佛緣)을 맺고 호법신장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불국토 사상이 대표적이다. 삼국은 부처님의 가피를 비는 뜻에서 경쟁하듯 전국 곳곳에 절과 탑을 세웠다. ◆ 왕을 위한 불교…삼국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불교의 양상은 달라졌다. 맞서고 없애야 할 적국이 사라지면서 국민총화를 위한 통치이념으로서의 특징은 엷어졌다. 대신 ‘개인적인’ 불교가 득세했다. 자기수양의 방편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철학적이고 종교적 측면이 부각됐다. 민중은 부처님에게서 삶의 위안을 찾았다. 원효스님은 중생과 더불어 살면서 이들을 자연스럽게 불교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스님의 교화에 의해 미천한 사람들조차 불교를 알게 됐고 저자에서도 ‘나무아미타불’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서방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아미타신앙이 유행한 것이다.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에 의지해 삶의 좌절과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관음신앙도 주류였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스님을 비롯해 해외 구법승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화살은 저 멀리 신라로 날아갔다’는 <벽암록>의 선어(禪語)에서 보듯, 당나라의 선승들은 해동에서 온 납자들의 선기(禪氣)에 놀라곤 했다. ◆ 고려시대…적극적 숭불정책 8세기 중엽부터 교학 연구는 침체일로를 걷는다. 귀족들 간의 이전투구로 혜공왕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 150년 동안 임금이 20번이나 바뀌던 나라의 혼란과 궤를 같이 한다. 교학연구가 둔해진 대신 실천적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禪宗)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국사의 가지산문을 비롯한 구산선문의 출발. 830년에서 840년 사이 중국에서 돌아온 선승들이 여러 지역에 산문을 개창했고 제자들에 의해 번성했다. 선종은 번쇄한 경전을 읽지 않아도 오직 본성을 제대로 간파하면 깨달을 수 있다며 민중에게 다가갔다.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도 이즈음 유입됐다.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보듯 적극적인 숭불정책을 펼쳤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교종과 선종을 막론하고 많은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개인적 호감 외에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홍보하기 위해 그는 부처님의 은덕을 높이 샀다. 고위직 스님들을 선발하기 위한 승과제도를 시행했으며 최고위 승계인 수좌와 총통, 선사와 대선사는 임명 절차나 대우에서 재상과 동등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불교학은 다시 융성했다. 탄문스님과 균여스님을 주축으로 한 화엄종, 유식학을 기반으로 한 법상종의 발전이 눈에 띈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개창을 주도한 천태종은 왕실의 후원을 얻어 짧은 기간에 종파의 틀을 갖췄다. 교학이 발전하고 교단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불교계의 사상과 문화적 역량을 널리 확산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비근한 예가 대장경의 판각사업. 1011년 거란의 침공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막아내기 위한 초조대장경 제작, 1237년 몽골의 침입에 맞선 팔만대장경 제작이다. 대장경 판각은 고려의 문화적 자존심이었고 철저히 불교적인 이념에 따라 국가시스템이 운영됐음을 시사한다. 강화도로 천도해 몽골군과 항전하던 고려는 끝내 개성으로 환도하고 원나라에 굴복했다. 왕조가 쇠멸기로 접어들면서 불교계 역시 생기를 잃었다. 모든 법회에서는 국왕의 안녕을 빌기 전에 먼저 원나라 황제의 안녕을 빌어야 했다. 오랜 전통인 담선(談禪)법회도 원의 압력으로 중단됐다. 수선사는 원나라 황실의 비호를 받게 되면서 성격이 변질됐다. 이 시기에 저술된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는 불교계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 민족의 긍지와 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분명히 세웠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다만 티베트불교가 유입되는 등 원과 고려 사이의 활발한 인적 교류로 불교계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무엇보다 간화선이 일반적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가불자들까지 화두 참구에 몰입했다. ◆ 조선왕조 500년…암흑 불교 태고보우 국사는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법맥과 종풍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옹혜근 선사 역시 선풍을 크게 떨쳤다. 불교계가 간화선을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유교의 성리학과 함께 새로운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아갔다. 하지만 친원파(親元派)가 지배하던 교단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의 점유, 부적격 승려의 양산으로 유교의 성리학을 앞세운 신진사대부들에게 비판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척불론을 주장한 진보파 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해 조선왕조를 열면서 불교계는 이후 500년간 암흑의 터널에서 헤매게 된다. 조선은 왕조 500년 간 억불(抑佛)로 일관했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탄압은 본격화됐다. 대부분의 사찰을 폐사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으며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제한했다. 성종 대에 성리학에 근거한 국가법령인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압박은 한층 가혹해졌다. 승과고시를 폐지하고 출가를 금지했다. 왕실의 흥융을 비는 법회와 불사만은 명맥을 이었다. 오욕의 세월에서도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불교는 소멸되지 않았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허응보우 스님을 선종판사로 등용해 선교양종(禪敎兩宗)을 재건케 하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했다. 그러나 유생들의 반발은 집요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스님은 곧바로 제주도로 유배돼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했다. 다만 보우스님 덕분에 능력을 갖춘 스님들이 승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청허휴정 선사(서산대사)는 승과에 합격한 후 교종과 선종판사를 겸직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승군 활동을 펼치며 혁혁한 전과를 세우면서 새로운 존립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승군의 활약은 불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조선 후기는 문파불교의 성립이 특색이다. 주로 서산대사와 동문인 부휴스님의 제자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문파는 현대의 문중으로까지 이어졌다. ◆ 왜란 승군 활약…문파불교 성립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양반들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찰은 자립경제를 추구했다. 농업에 종사하고 종이나 미투리를 만드는 수공업에도 나섰다. 계(契) 조직을 통해 부흥을 준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세계질서 안에 편입됐다. 특히 불교계는 새로운 열강으로 부상한 일본불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템플스테이의 의미에 대한 고찰, 사찰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한 풍물, 법당과 불상 등 부처님을 부처님답게 장엄하는 불교미술, 삼국시대부터 개화기까지 한국불교의 장구한 역사에 관해 소개했다. 절에 머물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들을 정리한 셈이다. 다음부터는 눈에 띄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과 사찰을 조목조목 살필 예정이다. 참고: 조계종출판사 발간 <불교사의 이해> ![]()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623호/ 5월15일자] |
'이런저런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백문백답/ 석가모니부처님은 채식주의자셨나? (0) | 2010.06.29 |
|---|---|
| 불교설화/ 화성 홍법사 홍랑각시의 슬픈사연 (0) | 2010.06.24 |
| 백문백답/ 왜 선행을 감추라고 합니까? (0) | 2010.06.22 |
| 불교설화/ 원효스님 오도성지 평택 수도사 (0) | 2010.06.17 |
| 템플스테이/ 귀한 인연 맺고 佛法의 씨 소중히 나누는 보금자리 (0) | 2010.06.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