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사찰을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배우들은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절 안에서 사랑을 나누거나 갈등을 빚으면서 내밀한 인간심리를 표현한다. 사찰이 촬영지로 활용되는 이유는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문화유산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성함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간직한 사찰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와 TV 속에서 고전적 영상미를 한껏 발산하는 사찰들을 살펴봤다.
여름 끝자락…TVㆍ영화 속 사찰서 하룻밤 템플스테이
장금이가 보모상궁 수발한 부안 내소사
전도연이 배용준과 키스한 진도 쌍계사
동이가 남인세력과 접선한 봉화 청량사
“사찰에 가면 우리도 작품 속 주인공”
부안 내소사의 명물은 전나무길이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40미터 길이로 빽빽이 도열한 아래, 누렇고 곧은 흙길이 뻗었다. 더위로 피하기도 번뇌를 피하기도 맞춤인 길이다. 참배객들은 사시사철 이 안에서 삼림욕과 행선을 즐기며 마음을 씻는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사실이 아름다움의 증거다.
아름다운 내(內)변산의 관문은 사극의 배경으로 자주 활용됐다. 대표적인 한류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였다. 보모상궁의 수발을 위해 장금(이영애 분)이가 거처하던 절. 극중의 ‘운암사’가 바로 내소사였다. 내소사는 2003년 인기리에 방영된 ‘다모’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장성백(김민준 분)과 채옥(하지원 분)의 부모 위패를 모신 장소로 설정됐다. 친남매였으나 서로 적으로 겨뤄야 했던 두 남매의 슬픈 운명을 품은 곳이다. 내소사가 드라마의 단골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일단 채석강과 적벽강, 직소폭포 등 카메라의 앵글을 위해 존재한다 싶은 변산반도의 절경 덕분이다. 근린에 위치한 부안영상테마파크의 영향도 받았다.
<사진> MBC 드라마 ‘대장금’ ‘다모’ 등의 촬영지였던 부안 내소사. 불교신문 자료사진
채석강 길은 올해 초 명품 사극으로 각광받은 ‘추노’에서 시청자들 앞에서 천혜의 비경을 자랑했다. 바닷물이 침식과 퇴적을 반복해 남겨놓은 절벽은 마치 녹슨 철판을 수만 겹 쌓아놓은 형세다. 기이하고 웅장하다. 장군이었으나 정적의 모함으로 노비로 전락한 송태하(오지호 분)와 필생의 라이벌 황철웅(이종혁 분)이 대결을 벌이던 배경이다. 추노에서도 제법 절이 보였다. 송태하가 옛 전우들과 천신만고 끝에 상봉해 소현세자의 복위를 의기투합한 장소로 화순 운주사가 쓰였다.

<사진> 부안 내소사. 불교신문 자료사진
운주사는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이 있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이미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민초들이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했다는 통한의 절로 묘사된 바 있다. 일어나면 세상을 개벽하고 1000년간의 태평성대를 이룩한다는 와불(臥佛)의 신화도 영웅 서사시를 한층 극적으로 만드는 모티브다. 아울러 추노 4회째에서 송태하와 김혜원이 숨어든 암자는 구례 사성암이다. 좌의정(김응수 분)이 이대길(장혁 분)에게 거금을 내걸며 송태하를 잡아오라던 정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고려말의 선지식 나옹스님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주 신륵사가 위치한 남한강변 암반에 서 있는 정자다.
해남의 달마산과 도솔암은 추노의 영상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송태하와 부부의 가약을 맺은 혜원(이다해 분)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길이다. 백두대간의 발에 해당하는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층층이 이어지는 기암괴석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같다. 산의 끄트머리, 험준한 봉우리 사이에 낀 도솔암은 그야말로 땅의 끝에서 하늘의 끝을 볼 수 있는 암자다. 이밖에 진도 쌍계사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년)에서 극중 정절녀 숙부인(전도연 분)과 호색한 조원(배용준 분)의 키스신 촬영지로 유명하다.

<사진> 2009년 흥행작 ‘워낭소리’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봉화 청량사 석조여래좌상. 불교신문 자료사진
영남에서는 봉화 청량사가 알아주는 세트장이었다. 2009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선덕여왕’, 저예산 독립영화로 공전의 히트를 친 ‘워낭소리’에 등장했다.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에 쫓기던 천명공주가 김춘추를 낳고 국선 문노를 찾아나서는 장면이 촬영됐다. 늙어 죽은 소를 매장한 노부부가 청량사를 찾아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장면. 영화 ‘워낭소리’의 첫 부분이다. 청량사가 지닌 흥행의 길운은 올해 MBC 월화 사극 ‘동이’가 이어받았다. 주인공 ‘동이’(한효주 분)와 적대관계였던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 오태석(정동환 분)과 그의 조카 오윤(최철호 분)의 접선 장면. 은밀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헌팅’됐다는 후문이다.
안동 봉정사도 영화 속 사찰을 말할 때 주목해야 할 절이다. 불교와 선(禪)을 소재로 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의 배경이다. 주된 촬영지는 봉정사 영산암이었는데, 큰 마당과 작은 마당의 접점에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주요한 오브제로 설정됐다. 그늘에 의해 두 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마당은 음울하면서도 몽환적이다. 동자승과 어머니의 생육의 정을 다룬 ‘동승’(2003년)도 봉정사에서 촬영됐다.
사찰은 현대물에서도 등장한다. 군산 동국사는 우리나라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어서 이목을 끈다. 1913년 일본의 승려 우치다가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라 세웠다.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실내에서 옮겨 다닐 수 있어 독특하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무엇보다 전각의 처마에 한국 사찰건축의 백미인 단청을 하지 않은 게 특징이다. 이국적인 이미지 덕분에 극적 영상미를 부각시키는 장치로 활용하기 좋다. 2006년 흥행작인 ‘타짜’에서 주인공 고니(조승우 분)가 두문불출한 채 화투의 기술을 익히던 곳이다.
종교적 신성함 자연 풍요로움
고전적 영상미 한껏 발산…
작품 완성도 높이는 최적공간
사찰과 도박은 윤리적 측면에서 상극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사찰에서 도박의 기술을 연마한다, 세상과 단절한 채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다. 특히 대웅전 뒤편 대숲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이후 고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암시하는 듯해 의미심장하다. 아울러 군산 동국사 주변엔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일본식 목조 기와건물(적산가옥)과 근대 서양식의 건물이 산재해 있다. 덕분에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인 영화 ‘장군의 아들’(1990년)에서도 촬영지로 쓰였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에는 강원도 삼척의 작은 절 신흥사가 나온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방송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담당 PD 은수(이영애 분)는 상우(유지태)와 함께 녹음을 위한 출장을 떠난다. 녹음기에 눈 덮인 산사에서 들리는 풍경소리를 담는데 이곳이 바로 신흥사다. 신흥사 설선당은 은수와 상우가 하루를 묵으며 서로 연인으로서의 호감을 느끼던 곳이다. 시골의 작고 아늑한 사찰인 신흥사는 오랫동안 찾는 이가 드물었으나 ‘봄날은 간다’ 이후 마음의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영화배우 정우성과 손예진이 출연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는 원주 구룡사가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됐다. 구룡사에서는 목수일 하는 철수(정우성 분)가 어릴 때 목공을 가르쳐준 스승이 일하는 사찰에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문턱에서 주인공의 그때 그 마음을 느끼며 영화와 TV 속 사찰의 정취를 만끽하는 건 어떨지.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647호/ 8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