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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 정취 스며든 미술사상 걸작



묘탑 전체 걸쳐 세밀히 조각된 문양 20여 종

곳곳에 페르시아 양식…국제적 문화교류 징표

탑 속 보물 도난당한 채 경복궁 한켠서 천대

일제가 약탈했다 반환…아직까지 후유증 남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은 고려 국사 해린(海麟) 스님의 부도이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조형미와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한 이 부도는 특히 장식문양의 종류가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측면에서 현존 묘탑 중 최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래적 요소가 가미된 장식문양을 사용한 점 또한 이 묘탑이 미술사에서 중요시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현재 경복궁 잔디밭에 외롭게 서 있는 이 묘탑은 원래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에 탑비와 함께 나란히 서 있었다.



사진설명: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 경복궁 소재. 평면 방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경복궁 잔디밭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에 의해 약탈되어 갔던 국보급 불교 유적 두 점이 다시 돌아와 다른 유적 틈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경천사 10층석탑이고 다른 하나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다. 경천사탑은 다른 석조유물과 함께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현묘탑만은 아직도 경복궁 잔디밭에 외로이 남아 문화재 약탈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전시 청국 보물 수집 방법’이라는 것을 제정했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문화의 근저는 조선,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일본 고유의 성질을 명백히 함에 있어서는 이들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대륙인방(조선과 중국)의 유물을 수집하는 것은 학술상 최대의 의무에 속한다.… 동양의 보물 중 으뜸 되는 것을 우리나라로 수집해 와서 완성시켜야 한다. 모든 좋은 기회를 이용해 그 실행을 도모해야 한다. 전시에 명품을 수집하는 것은 전승의 명예다.”

조선에 침입했던 일본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재를 너무 많이 일본으로 가져간다”는 거센 비난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약탈 문화재 몇 점을 생색내기로 되돌려 보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다. 반환된 현묘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경복궁 빈터에 복원되었지만 기단 네 모퉁이에 있었던 사자상과 탑 속의 사리장치 등 보물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뒤였다.

사진설명: 옥개석에 조각된 화불.
지광국사 현묘탑은 지광국사 해린의 묘탑으로, 지광은 시호(諡號)이고 현묘는 묘탑 이름이다. 국사는 열여섯 살 때 법천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평양 중흥사에서 중대사가 되었으며, 수다사에 있다가 다시 해안사로 옮겼다. 덕종 때 삼중대사에 올랐다가 수좌(首座)가 되고, 정종 말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문종 때는 현화사로 옮겨 현화사를 중심으로 한 법상종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다. 1056년 왕사(王師)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국사(國師)에 올라 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은퇴한 뒤로는 계속 법천사에 머무르다 1070년 10월에 입적했다. 법천사터에 지금도 지광국사 탑비가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현묘탑의 조성 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평면 방형(方形) 형식의 부도라는 점이다. 그리고 7층의 부재(部材)로 상.하층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탑신을 받친 점, 층층이 높이와 넓이에 변화를 주어 거대한 탑에 안정감과 변화감을 준 구조와 장막(帳幕) 형태의 상.하층 기단 갑석(甲石)과 천개형(天蓋形) 옥개석 장식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또한 눈에 띄는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현묘탑에서 돋보이는 것은 옥신과 옥개석, 묘탑 전체에 걸쳐 빈틈없이 조각된 20여 종의 문양들이다. 1층 옥신에 장식된 문양부터 살펴보면, 사리 장엄구를 운반하고 있는 인물상, 구름 위의 신선들, 구름 속에서 용트림하는 용, 산수풍경 등이 회화적 기법으로 시문되어 있다.

사리 장엄구를 운반하고 있는 장면은 지광국사 장례 때 사리를 운반하던 화려한 가마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 장엄구를 운반하는 장면을 두 폭에 그렸는데, 인물 자세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내용은 같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림 속 인물의 인상착의 등이 서역 지방 사람을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머리 한 복판에 가르마를 탄 양머리 모양의 인물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의 카프탄(kaftan)류의 민족의상과 비슷하다. 카프탄은 이 그림에서 보듯이 동정이 없고 옷자락이 길며 품이 넉넉한 겉옷으로, 트인 앞쪽을 장식 띠로 여밀 수 있게 만든 옷이다.

현묘탑에 보이는 외래적인 요소는 이뿐만 아니라 2층 옥신을 장식하고 있는 문비(門扉)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문비의 기본 형태 즉, 두 개의 문짝, 광두정 철물 장식, 자물쇠 장식 등은 일반적인 탑이나 부도의 문비 장식과 같다. 그러나 문짝 윗부분에 해를 원형으로, 달을 초생달 모양으로 표현한 것은 옛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해와 달을 다 같이 원형으로 표현하는 우리의 전통 방식과 다르다. 또한 굵은 실로 엮은 술(流蘇), 영락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장막과 드림새 장식도 외래적 요소이다. 이런 장식들이 묘탑 건립 당시에 서역과의 활발한 문화교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진설명: 사리장엄구 운반장면을 묘사한 회화적 기법의 문양. 인물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1층 옥신에는 사리 장엄구 외에도 구름 위에 서 있는 신선들, 구름 속에서 용트림하는 용, 산수 연운(煙雲) 풍경 등 피어오르는 구름을 배경으로 한 장식그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무리를 이룬 신선들이 두 손 모아 약합(藥盒)을 받쳐 들고 구름 위에 차례로 서있는 장면은 묘탑의 분위기를 환상적인 세계로 이끈다. 같은 층 옥신에 장식된 운룡도는 주된 소재가 구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구름은 장식 미술의 대표적 소재로 고미술에 널리 활용됐다. 하지만 묘탑에서처럼 풍부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런 장식을 가한 이유는 구름 자체가 천변만화의 기운과 내재적인 기세, 그리고 강약과 허실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묘탑의 주인공을 신비화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2층 옥개석에도 역시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양들이 가득 들어 차있다. 닫집 기둥처럼 허공에 매달린 옥개석 기둥에 영성(靈性)을 상징하는 화염보주와 부처님의 또 다른 화현인 화불(化佛)이 보이고, 기둥 사이에는 도교의 선녀를 닮은 비천(飛天)이 화려하고 환상적인 천의를 휘날리며 허공을 날고 있다. 옥개 네 모서리의 추녀 부분에는 긴 꼬리를 뒤 쪽으로 길게 늘어뜨리면서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봉황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비천은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 찬탄한다. 불탑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석등이나 부도에는 자주 나타난다. 현묘탑의 비천은 묘탑 주변 분위기를 신비화하고 묘탑 주인을 찬탄하고 기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로 묘탑을 신령스럽게 조성하는 효과가 있다.

사진설명: 상륜부의 가릉빈가
상륜부에는 초화, 앙련, 영지형 구름, 영락 드림새 장식, 가릉빈가 등이 더욱 현란하게 장식되어 있다. 돋보이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가릉빈가이다. 팔각 모서리마다 한 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를 새겨놓았다. 가릉빈가는 극락정토에 사는 새로, 자태가 매우 아름답고 소리 또한 오묘하여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라고도 한다. 입적한 선사가 극락정토에 환생하기를 비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이보다 적합한 소재가 없을 것이다.

지광국사 현묘탑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부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품 이전에 지광국사 해린스님의 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해린스님은 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요순(堯舜)의 교화로 할 것을 권했고, 도덕정치로 민심을 얻어야 한다고 청원했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이국적인 정취가 스며들어 있는 현묘탑을 보면 해린 스님이 고려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알 수 있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09호/ 3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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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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