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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용암사터 마애여래좌상

山勢 빼닮은 부처님 모습에 넋을 잃다

월출산 용암사터 마애여래좌상은 해발 800m가 넘는 산상에 있다. 오르기는 힘들지언정 그 앞에 서면 마애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유장한 능선이 마치 오백나한처럼 마애불과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침묵 같은 어둠이 내려깔린 산을 오르는 내내 순례자의 입에서는 노랫소리 마냥 흥얼흥얼 시 구절이 흘러 나왔다. 절경에 대한 찬탄치고는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시여서 몇 해 전부터 외우다시피 한 그 구절의 중간이 다음과 같다.

누가 이곳에 절집을 지어

자취를 산과 바다 언덕에 깃들였나

돌길을 걸어 찾아오자 날이 저물어

망연히 바라보며 넋을 잃었노라

시를 지은 이는 고봉(高峰) 기대승으로 그의 나이 35세였던 1557년 3월 이 길을 걸어 월출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때 구정봉을 에돌아 내려 간 곳의 용암사(龍巖寺)라는 작은 산사에 다다라 ‘용암에서 주자의 운을 쓰다(龍巖用朱子韻)’라는 시를 지었는데 위의 시가 바로 그 것이다. 순례자 또한 폐사지로 변해버린 그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차가운 날씨에 땀이 나도록 부지런히 올라가는 까닭은 바람재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40분이나 걸었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다가 간 바람재의 바람은 거칠지 않았다. 마치 한데 내 놓았던 실크목도리를 목에 걸칠 때처럼 차가운 기운을 머금었지만 부드러웠다. 앞이 탁 트인 바위 위로 올라가 보온병에 담아 온 차 한 잔을 마시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가부좌를 틀었다. 한 번 몸에 묻으면 쉬이 떨어지지 않는 동지 무렵의 눅진한 새벽 놀이 금세 온 몸을 감싸 버렸다.

바람이 붉은색을 벗겨 줄 때 까지 앉았다가 오른 구정봉, 수많은 유사(儒士)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을 지나간 유사들 중 널리 알려진 인물들은 대령노인(臺嶺老人) 허목, 휴옹(休翁) 심광세, 문곡(文谷) 김수항과 그의 아들들인 몽와(夢窩) 김창집, 농암(農巖) 김창협, 삼연(三淵) 김창흡, 노가재(老稼齋) 김창업 그리고 담헌(澹軒) 이하곤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도갑사에서 천황봉과 구정봉을 거쳐 용암사로 향했다.

그 중 1722년 11월 28일에 용암사에서 묵은 김하곤이 남긴 기문인 <남유록(南遊錄)>에 따르면 암주는 탄식선사(坦識禪師)였으며 구정봉까지 마중을 나온 스님은 두상(斗相)이었다. 또 용암사를 두고 말하기를 “구정봉 아래에 있으며 지세가 고절孤絶하며 사방이 기암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정경은 지금의 천관산인 장흥의 천풍산에 있던 구정암(九精庵)과 같이 아름답다. 구정봉에서 용암사로 내려가는 길은 열 걸음을 떼면 앉아서 쉬어야 할 만큼 험했으며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 있어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은 300여 년이 흐른 오늘에도 틀리지 않았다. 산 높은 곳인 탓인지 응달진 곳에는 더러 얼음이 비치기도 하고 길은 험했지만 순례자가 굳이 앉아서 쉰 까닭은 몸이 곤혹스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 발 내려 설 때 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정경은 발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으며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기암괴석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툭하면 멈춰 서서 산의 정경에 흠씬 젖어 들던 걸음이 한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찬탄의 신음을 흘려야 했으니 저 먼 곳, 아득한 골짜기에 용암사의 탑이 보였기 때문이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것이 바로 저것인가. 여름 내 우거진 덤불과 풍성한 나뭇잎에 가려 그 존재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던 탑이 드러난 것이다. 금풍에 나뭇잎 다 흩어버린 채 가녀린 가지들만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당당하게 솟아 난 탑은 그 자체로 전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멍했다. 얼굴로 들이닥치는 햇살에 눈이 부셔 일어날 때 까지 얼마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탑이 보이는 것 또한 순간이었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자 나무색과 어슷비슷한 그는 초겨울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시 가파른 경사를 300m나 내려갔을까. 눈앞에 둥근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은 삼층탑이 마치 월출산을 수놓은 그 많은 바위들 중 하나인 것처럼 산중에 어울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전 보았던 그 탑은 아니었다. 정수리만 보여주던 조금 전의 탑이 체로금풍의 형형한 모습이었다면 지금 눈앞의 탑은 저자거리로 만행을 나온 납자의 모습이었다. 제 아무리 허름한 차림으로 모습을 가린다고 한들 어찌 운수객(雲水客)임을 감출 수 있겠는가. 지금 저 탑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암괴석들 사이에 어울려 있건만 한눈에 그 당당한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순례자의 눈이 밝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환한 것이다.

서둘러 다가간 탑의 둥근 기단부에 기대어 고개를 들었다. 부처님은 마주 보이는 그곳, 수직으로 깎아지른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이 먼 곳에서 예를 표했을 뿐 나는 부처님 가까운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부처님의 한 부분만 보일 뿐 온전한 모습의 전체를 우러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150m 남짓 떨어진 이곳에서야말로 온전한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으니 굳이 부처님 아래로 갈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오백나한’처럼 울쑥불쑥 솟은 능선바위 호위

깎아지른 바위에 웅장하게 앉으신 법신‘위압’

굳게 다문 입술 그윽한 눈매…절품중의 절품

부처님의 모습 또한 웅장하고 거대하지만 당신이 머무시는 산중 또한 그에 못지않은 법이다. 그러나 대개의 마애불들이 그 앞에서면 오로지 부처님의 모습만을 우러를 수 있을 뿐 당신을 장엄(莊嚴)하는 자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은 드물기만 하다. 그렇기에 이곳은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우러를 수 있는 곳이 몇몇 있긴 하지만 이곳만큼 유장한 능선과 계곡 그리고 바위나 나무들이 우거진 모습과 함께 부처님을 우러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구정봉을 내려서면서부터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미친 것은 두어 시간 부처님과 마주하고 난 후였다. 용암사터의 탑들이 그랬고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또한 가까이 다가서는 것과 멀리 떨어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드러 내놓고 말하지 않으니 마치 염화시중과도 같은 미시기의(微示其意)였다. 그러나 오히려 꺼내 놓은 것 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으니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조감(鳥瞰)과 관견(管見)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중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하나가 전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감이 곧 전체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한눈에 모든 것을 훑어 볼 수 있기 때문이지만 그것은 세세히 톺아보는 미시(微視)를 놓치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조감 또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자의 눈과 독수리의 눈, 그 둘을 아우른 지혜의 눈을 가슴 속에 품어야 하거늘 부분만을 보며 전체인양 착각하며 살아 온 철부지 순례자에게는 오늘 부처님에게로 오는 길, 그 자체가 이미 큰 가르침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단 이곳뿐이랴. 그 어느 곳으로 부처님을 찾아 간들 이러한 가르침이 없겠는가. 길섶에 미시기의로 내장(內藏)된 밀밀의(密密意)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음은 결코 두타행의 순례가 되지 못함을 이만큼 다니고서야 겨우 알아차리게 되었으니 둔하고도 어리석다. 그 어리석은 눈으로 다시 부처님을 우러렀다. 구정봉을 천개(天蓋)마냥 쓰고 미왕재로 향하는 능선의 바위들을 오백나한으로 거느린 부처님의 모습은 당당하기 그지없다.

사다리꼴의 자연석을 감실처럼 파내고 돋을새김으로 새긴 상호가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서 기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을 보고 입을 다무셨는가. 굳게 다문 입술과 그윽하게 감은 듯 아래를 굽어보는 눈매가 빚어내는 부드러움은 절품이다. 하지만 당신이 앉으신 대좌는 마치 백척간두의 끝이라도 되는 양 아찔하다. 여느 다른 부처님들이 앉으신 두툼한 연화대좌에 비할 수 없게 그 두께가 얇으며 더구나 대좌는 허공중에 떠 있는 것과도 같다. 그 아래로는 천길 벼랑과도 같이 끊어져 있어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곤두박질치고 말 것만 같은 것이다.

그것도 자연석을 그대로 다듬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바위를 떼 내어 대좌 아래를 낭떠러지로 만들었으니 왜 하필 그 자리일까. 오른쪽 무릎 곁에 있는 동자에게 물어봐도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먼 하늘에 저녁놀이 얼핏 비칠 때 까지 머물며 그 까닭을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을이 조금씩 짙어질 무렵, 한 자루 향을 사르고 서둘러 구정봉으로 올랐다. 노을에 물든 채 유장하게 흐르는 영산강과 들녘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 아름다웠다. 성급히 솟아오르는 새벽 놀과는 달리 스러지는 저녁놀은 느리기만 했다. 먼 하늘에 하얀 초승달을 띄워 놓고도 한 동안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았으니 그가 사라지려해도 내가 놓아주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는 순례자의 어깨에는 가녀린 푸른 달빛이 묻어 있었고 노을에 물들며 따라다니던 긴 그림자는 부처님 곁에 남겨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록문학가

■용암사터 마애여래좌상은

자연 암반에 고부조 조성…보존도 훌륭

佛身 비례 어색…고려초 만든 작품일 듯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머리가 상대적으로 커 보이며 허리는 머리보다 가늘게 표현되었다. 또한 대좌의 두께가 얇은 것도 특징이다. 오른쪽 무릎 끝에 작은 동자상이 보인다.

국보 제 144호인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은 전남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월출산 산상에 있다. 마애불이 위치한 곳의 해발은 대략 810m이며 마애불 바로 아래에 지금은 폐사가 된 용암사가 있었다. 1995년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용암사로 밝혀졌으므로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이라는 명칭은 용암사터 마애여래좌상이라고 고쳐야 할 것이다.

높이가 8.5m에 달하는 거대한 마애불이다.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의 자연 암반에 고부조로 조각된 마애불은 훼손 된 곳이 없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감실의 형태를 이룬 듯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움푹한 느낌이 든다. 마애불은 소발의 머리에 두툼하고 높은 육계가 둥글게 표현되었다. 눈은 가늘게 찢어져 있으며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 있으며 입은 굳게 다물어 근엄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인다. 상호는 전체적인 느낌이 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몸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비례가 어색하기도 하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며 우견편단으로 걸친 법의는 무릎과 다리를 지나 대좌까지 덮고 있는 상현좌(裳懸座)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인은 왼손을 복부에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올린 항마촉지인이며 오른쪽 무릎 바깥쪽으로 지물을 들고 있는 90cm에 가까운 보살상이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다. 대좌는 일부러 바위를 잘라낸 것처럼 되어 있으나 8.5m나 되는 크기의 마애불이 앉기에는 빈약한 느낌이다. 머리 주위로 세 겹의 두광이 표현되었으며 그 안에 단엽연화문이 표현되었다. 몸을 둘러 싼 신광은 두 줄의 선각으로 에워쌌으며 안에는 당초문이 아름답게 베풀어 졌다. 또 신광 밖으로 화염문이 조각되어 화려함을 더해 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불신의 비례가 어딘가 모르게 조화롭지 못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이다. 또한 마애불의 상단에서 발견된 와편에서 983년에서 1011년을 일컫는 ‘통화(統和)’라는 연호가 발견되었으므로 대략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찾아가는 길

영암읍에서 월남사지가 있는 월출산 국립공원 경포대지역으로 향한다. 예전 매표소에서 구정치(바람재)를 지나 구정봉에서 마애여래좌상 방향으로 500m 가량 내려가면 된다. 산중에 이정표가 잘 되어 있으며 본격적인 등산을 해야 하므로 가벼운 차림으로는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경포대에서 마애불까지 다녀오는 시간만 너덧 시간은 잡아야 한다.

[불교신문 2386호/ 12월1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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