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삼존골 마애삼존불 |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 시를 따르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밤, 어둠이 깊어질 때 까지 월출산 언저리를 배회했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섬뜩한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투명한 하늘에 떠 있던 별을 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맑은 별이라도 한껏 바라보면 내 속에 엉겨 붙은 번뇌습탁(煩惱濕濁)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침없이 옷섶을 파고들던 거친 바람결에 그것이 씻겨 지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모아 번뇌를 덮고 거듭된 두타행으로 습탁을 씻어내려 몸부림 쳤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번뇌습탁이 사라진 그 자리에 깃든 별과 같은 맑음이 나에게도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난 아침, 여느 때처럼 산 위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산 아래 퇴동(兎洞)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아직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같은 석상이 있기 때문이다. 석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각형의 바위에 인면으로부터 불두, 불좌상 그리고 괴이한 모습을 한 상(象)들이 모두 13구나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돌기둥이다. 또 그것이 세워져 있는 지대석은 팔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 또한 흔히 보는 연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처음 이 석상을 대했을 때 난감하고 황당했다. 그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나라 안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어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그 앞을 서성이곤 했으니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오늘은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밝은 빛줄기 하나를 들고 찾아 왔다. 그 빛줄기는 2005년 월출산 삼존골에서 발견된 마애삼존불이다. 봄이 무르익어가던 그해 5월, 무심코 산길을 걷던 강영석(62) 강진문화원 부원장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삼존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그이가 뒤돌아보니 큰 바위의 북쪽 사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삼존불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발견 당시의 사진은 본 터였다. 워낙 희미할 뿐 더러 해가 들지도 않는 곳이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조금씩 흥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석상의 실타래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상에는 워낙 다양한 형태의 상들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마애삼존불의 눈 모양과 흡사한 표현 양식을 지닌 것들이 더러 있었다. 세련된 석공이 매만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분방한 생각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석상의 몇몇 조각들과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석공의 솜씨인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서로 위치한 곳이 지근거리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석상을 사문안석상이라고 부르는데 곧 사문(寺門) 안의 석상이라는 뜻이다. 석상으로부터 2km 남짓한 곳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머물렀던 월남사(月南寺)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폐찰이 된 월남사 사역 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마애삼존불은 월남사로부터 월출산 8부 능선까지 오르지만 거리로는 채 2.5km가량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셋은 직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퇴동마을을 떠나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무엇으로 단언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무엇부터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옛 암자 터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길도 없는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길이란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에 동의하고 수용하여 끊임없이 오고가는 반복을 통해 생기는 것이 길이거늘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끊긴지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샘터로부터 2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물 한 잔 들이키며 고개 들면 빤히 보여 얕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서면 비탈이 심하기도 할 뿐 더러 덤불과 나무에 가려 다다라야 할 바위가 보이지 않으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먼 곳에서는 잘 보이던 바위가 숲으로 들어서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문득 그 길에서 삶의 길을 보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먼 곳을 바라보기는커녕 발밑조차 헤아리지 못하여 미끄러지거나 헛디뎌 넘어지는가 하면 길을 잃기 일쑤인 삶의 길 말이다. 그것은 내가 디디고 있는 발밑을 헤아리기보다 저 먼 곳, 내가 다다르고 싶은 곳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 시를 따르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밤, 어둠이 깊어질 때 까지 월출산 언저리를 배회했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섬뜩한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투명한 하늘에 떠 있던 별을 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맑은 별이라도 한껏 바라보면 내 속에 엉겨 붙은 번뇌습탁(煩惱濕濁)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침없이 옷섶을 파고들던 거친 바람결에 그것이 씻겨 지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모아 번뇌를 덮고 거듭된 두타행으로 습탁을 씻어내려 몸부림 쳤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번뇌습탁이 사라진 그 자리에 깃든 별과 같은 맑음이 나에게도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난 아침, 여느 때처럼 산 위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산 아래 퇴동(兎洞)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아직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같은 석상이 있기 때문이다. 석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각형의 바위에 인면으로부터 불두, 불좌상 그리고 괴이한 모습을 한 상(象)들이 모두 13구나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돌기둥이다. 또 그것이 세워져 있는 지대석은 팔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 또한 흔히 보는 연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처음 이 석상을 대했을 때 난감하고 황당했다. 그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나라 안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어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그 앞을 서성이곤 했으니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오늘은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밝은 빛줄기 하나를 들고 찾아 왔다. 그 빛줄기는 2005년 월출산 삼존골에서 발견된 마애삼존불이다. 봄이 무르익어가던 그해 5월, 무심코 산길을 걷던 강영석(62) 강진문화원 부원장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삼존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그이가 뒤돌아보니 큰 바위의 북쪽 사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삼존불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발견 당시의 사진은 본 터였다. 워낙 희미할 뿐 더러 해가 들지도 않는 곳이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조금씩 흥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석상의 실타래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상에는 워낙 다양한 형태의 상들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마애삼존불의 눈 모양과 흡사한 표현 양식을 지닌 것들이 더러 있었다. 세련된 석공이 매만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분방한 생각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석상의 몇몇 조각들과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석공의 솜씨인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서로 위치한 곳이 지근거리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석상을 사문안석상이라고 부르는데 곧 사문(寺門) 안의 석상이라는 뜻이다. 석상으로부터 2km 남짓한 곳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머물렀던 월남사(月南寺)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폐찰이 된 월남사 사역 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마애삼존불은 월남사로부터 월출산 8부 능선까지 오르지만 거리로는 채 2.5km가량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셋은 직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퇴동마을을 떠나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무엇으로 단언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무엇부터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옛 암자 터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길도 없는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길이란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에 동의하고 수용하여 끊임없이 오고가는 반복을 통해 생기는 것이 길이거늘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끊긴지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샘터로부터 2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물 한 잔 들이키며 고개 들면 빤히 보여 얕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서면 비탈이 심하기도 할 뿐 더러 덤불과 나무에 가려 다다라야 할 바위가 보이지 않으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먼 곳에서는 잘 보이던 바위가 숲으로 들어서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문득 그 길에서 삶의 길을 보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먼 곳을 바라보기는커녕 발밑조차 헤아리지 못하여 미끄러지거나 헛디뎌 넘어지는가 하면 길을 잃기 일쑤인 삶의 길 말이다. 그것은 내가 디디고 있는 발밑을 헤아리기보다 저 먼 곳, 내가 다다르고 싶은 곳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퇴동 사문안석상의 인면상. 오른쪽 위는 불두상이며 왼쪽 아래는 승상으로 추정된다. 그는 백제시대의 스님인 혜현(慧顯)이다. 스님은 서산마애삼존불과 산하나 차이인 덕숭산 수덕사에 머물며 <법화경>은 물론 삼론(三論)에 정통해 강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수덕사로부터 홀연히 몸을 숨긴 곳이 강남(江南) 혹은 남방(南方)의 달라산(達拏山)이며 그 산이 곧 지금의 월출산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산중에 살던 그가 입적을 하자 제자들이 굴속으로 옮겼는데 범이 그의 시신을 모두 먹어치웠지만 붉은 혀만은 남겨 두었다고 한다. 3년이 지난 후 다시 굴을 찾아가자 그때까지도 혜현의 혀는 마치 생전의 그것마냥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부드러웠다고 한다.
환조로 평면에 선으로 표현…퉁방울눈 ‘독특’ <사진설명>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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