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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삼존골 마애삼존불



민초들의 시린 가슴 달래주려는 듯


相好에 시대의 모든 믿음 품으셨네



<사진설명> 순천대학교 최인선 교수팀이 탁본한 월출산 마애삼존불이다. 특이하게 해가 들지 않는 북쪽 사면에 새겨 놓은 탓도 있지만 선각으로 새겨진 삼존불의 마모가 심해 해가 높이 솟는 한여름이 아니면 잘 가늠하기도 쉽지 않으며 사진 찍기는 더욱 어렵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 시를 따르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밤, 어둠이 깊어질 때 까지 월출산 언저리를 배회했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섬뜩한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투명한 하늘에 떠 있던 별을 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맑은 별이라도 한껏 바라보면 내 속에 엉겨 붙은 번뇌습탁(煩惱濕濁)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침없이 옷섶을 파고들던 거친 바람결에 그것이 씻겨 지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모아 번뇌를 덮고 거듭된 두타행으로 습탁을 씻어내려 몸부림 쳤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번뇌습탁이 사라진 그 자리에 깃든 별과 같은 맑음이 나에게도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난 아침, 여느 때처럼 산 위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산 아래 퇴동(兎洞)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아직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같은 석상이 있기 때문이다. 석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각형의 바위에 인면으로부터 불두, 불좌상 그리고 괴이한 모습을 한 상(象)들이 모두 13구나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돌기둥이다. 또 그것이 세워져 있는 지대석은 팔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 또한 흔히 보는 연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처음 이 석상을 대했을 때 난감하고 황당했다. 그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나라 안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어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그 앞을 서성이곤 했으니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오늘은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밝은 빛줄기 하나를 들고 찾아 왔다.

그 빛줄기는 2005년 월출산 삼존골에서 발견된 마애삼존불이다. 봄이 무르익어가던 그해 5월, 무심코 산길을 걷던 강영석(62) 강진문화원 부원장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삼존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그이가 뒤돌아보니 큰 바위의 북쪽 사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삼존불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발견 당시의 사진은 본 터였다. 워낙 희미할 뿐 더러 해가 들지도 않는 곳이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조금씩 흥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석상의 실타래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상에는 워낙 다양한 형태의 상들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마애삼존불의 눈 모양과 흡사한 표현 양식을 지닌 것들이 더러 있었다. 세련된 석공이 매만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분방한 생각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석상의 몇몇 조각들과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석공의 솜씨인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서로 위치한 곳이 지근거리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석상을 사문안석상이라고 부르는데 곧 사문(寺門) 안의 석상이라는 뜻이다. 석상으로부터 2km 남짓한 곳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머물렀던 월남사(月南寺)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폐찰이 된 월남사 사역 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마애삼존불은 월남사로부터 월출산 8부 능선까지 오르지만 거리로는 채 2.5km가량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셋은 직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퇴동마을을 떠나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무엇으로 단언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무엇부터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옛 암자 터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길도 없는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길이란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에 동의하고 수용하여 끊임없이 오고가는 반복을 통해 생기는 것이 길이거늘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끊긴지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샘터로부터 2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물 한 잔 들이키며 고개 들면 빤히 보여 얕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서면 비탈이 심하기도 할 뿐 더러 덤불과 나무에 가려 다다라야 할 바위가 보이지 않으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먼 곳에서는 잘 보이던 바위가 숲으로 들어서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문득 그 길에서 삶의 길을 보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먼 곳을 바라보기는커녕 발밑조차 헤아리지 못하여 미끄러지거나 헛디뎌 넘어지는가 하면 길을 잃기 일쑤인 삶의 길 말이다. 그것은 내가 디디고 있는 발밑을 헤아리기보다 저 먼 곳, 내가 다다르고 싶은 곳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 시를 따르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밤, 어둠이 깊어질 때 까지 월출산 언저리를 배회했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섬뜩한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투명한 하늘에 떠 있던 별을 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맑은 별이라도 한껏 바라보면 내 속에 엉겨 붙은 번뇌습탁(煩惱濕濁)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침없이 옷섶을 파고들던 거친 바람결에 그것이 씻겨 지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모아 번뇌를 덮고 거듭된 두타행으로 습탁을 씻어내려 몸부림 쳤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번뇌습탁이 사라진 그 자리에 깃든 별과 같은 맑음이 나에게도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난 아침, 여느 때처럼 산 위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산 아래 퇴동(兎洞)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아직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같은 석상이 있기 때문이다.

석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각형의 바위에 인면으로부터 불두, 불좌상 그리고 괴이한 모습을 한 상(象)들이 모두 13구나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돌기둥이다. 또 그것이 세워져 있는 지대석은 팔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 또한 흔히 보는 연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처음 이 석상을 대했을 때 난감하고 황당했다.

그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나라 안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어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그 앞을 서성이곤 했으니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오늘은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밝은 빛줄기 하나를 들고 찾아 왔다. 그 빛줄기는 2005년 월출산 삼존골에서 발견된 마애삼존불이다. 봄이 무르익어가던 그해 5월, 무심코 산길을 걷던 강영석(62) 강진문화원 부원장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삼존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그이가 뒤돌아보니 큰 바위의 북쪽 사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삼존불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발견 당시의 사진은 본 터였다. 워낙 희미할 뿐 더러 해가 들지도 않는 곳이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조금씩 흥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석상의 실타래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상에는 워낙 다양한 형태의 상들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마애삼존불의 눈 모양과 흡사한 표현 양식을 지닌 것들이 더러 있었다. 세련된 석공이 매만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분방한 생각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석상의 몇몇 조각들과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석공의 솜씨인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서로 위치한 곳이 지근거리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석상을 사문안석상이라고 부르는데 곧 사문(寺門) 안의 석상이라는 뜻이다.

석상으로부터 2km 남짓한 곳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머물렀던 월남사(月南寺)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폐찰이 된 월남사 사역 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마애삼존불은 월남사로부터 월출산 8부 능선까지 오르지만 거리로는 채 2.5km가량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셋은 직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퇴동마을을 떠나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무엇으로 단언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무엇부터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옛 암자 터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길도 없는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길이란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에 동의하고 수용하여 끊임없이 오고가는 반복을 통해 생기는 것이 길이거늘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끊긴지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샘터로부터 2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물 한 잔 들이키며 고개 들면 빤히 보여 얕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서면 비탈이 심하기도 할 뿐 더러 덤불과 나무에 가려 다다라야 할 바위가 보이지 않으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먼 곳에서는 잘 보이던 바위가 숲으로 들어서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문득 그 길에서 삶의 길을 보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먼 곳을 바라보기는커녕 발밑조차 헤아리지 못하여 미끄러지거나 헛디뎌 넘어지는가 하면 길을 잃기 일쑤인 삶의 길 말이다. 그것은 내가 디디고 있는 발밑을 헤아리기보다 저 먼 곳, 내가 다다르고 싶은 곳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던 백호(白湖) 윤휴의 ‘자경自警’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구절은 “괴롭게도 찾아드는 오만 가지 이 잡념들(無端萬累苦侵尋) / 은하수 끌어당겨 이 마음을 확 씻었으면(欲挽天河洗此心)”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 시를 따르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밤, 어둠이 깊어질 때 까지 월출산 언저리를 배회했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던 바람소리에 섬뜩한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투명한 하늘에 떠 있던 별을 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맑은 별이라도 한껏 바라보면 내 속에 엉겨 붙은 번뇌습탁(煩惱濕濁)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침없이 옷섶을 파고들던 거친 바람결에 그것이 씻겨 지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모아 번뇌를 덮고 거듭된 두타행으로 습탁을 씻어내려 몸부림 쳤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번뇌습탁이 사라진 그 자리에 깃든 별과 같은 맑음이 나에게도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난 아침, 여느 때처럼 산 위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산 아래 퇴동(兎洞)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아직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같은 석상이 있기 때문이다.

석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각형의 바위에 인면으로부터 불두, 불좌상 그리고 괴이한 모습을 한 상(象)들이 모두 13구나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돌기둥이다. 또 그것이 세워져 있는 지대석은 팔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 또한 흔히 보는 연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처음 이 석상을 대했을 때 난감하고 황당했다. 그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나라 안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어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그 앞을 서성이곤 했으니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오늘은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밝은 빛줄기 하나를 들고 찾아 왔다. 그 빛줄기는 2005년 월출산 삼존골에서 발견된 마애삼존불이다. 봄이 무르익어가던 그해 5월, 무심코 산길을 걷던 강영석(62) 강진문화원 부원장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삼존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그이가 뒤돌아보니 큰 바위의 북쪽 사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삼존불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발견 당시의 사진은 본 터였다. 워낙 희미할 뿐 더러 해가 들지도 않는 곳이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조금씩 흥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석상의 실타래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상에는 워낙 다양한 형태의 상들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마애삼존불의 눈 모양과 흡사한 표현 양식을 지닌 것들이 더러 있었다. 세련된 석공이 매만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분방한 생각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석상의 몇몇 조각들과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석공의 솜씨인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서로 위치한 곳이 지근거리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석상을 사문안석상이라고 부르는데 곧 사문(寺門) 안의 석상이라는 뜻이다.

석상으로부터 2km 남짓한 곳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머물렀던 월남사(月南寺)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폐찰이 된 월남사 사역 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마애삼존불은 월남사로부터 월출산 8부 능선까지 오르지만 거리로는 채 2.5km가량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셋은 직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퇴동마을을 떠나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무엇으로 단언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무엇부터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옛 암자 터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길도 없는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길이란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에 동의하고 수용하여 끊임없이 오고가는 반복을 통해 생기는 것이 길이거늘 이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끊긴지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샘터로부터 2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물 한 잔 들이키며 고개 들면 빤히 보여 얕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서면 비탈이 심하기도 할 뿐 더러 덤불과 나무에 가려 다다라야 할 바위가 보이지 않으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먼 곳에서는 잘 보이던 바위가 숲으로 들어서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문득 그 길에서 삶의 길을 보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먼 곳을 바라보기는커녕 발밑조차 헤아리지 못하여 미끄러지거나 헛디뎌 넘어지는가 하면 길을 잃기 일쑤인 삶의 길 말이다. 그것은 내가 디디고 있는 발밑을 헤아리기보다 저 먼 곳, 내가 다다르고 싶은 곳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퇴동 사문안석상의 인면상. 오른쪽 위는 불두상이며 왼쪽 아래는 승상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헛디디고 미끄러지면서 다다른 곳, 부처님은 바로 그곳에 계셨다. 응달진 곳, 골짜기를 타고 올라 온 거친 바람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곳이었다. 햇살은 눈부시도록 쨍쨍했지만 손이 곱을 정도로 거친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통에 그저 두 손 모으고 머리 숙여 경배할 뿐 향도 사르지 않았고 초도 켜지 못했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몸을 웅크리고 탁본과 견주어 가면서 찬찬히 부처님을 우러렀다.

삼존불은 분명하되 본존이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서 계셨다. 우협시 또한 서 있었으나 좌협시는 반가의 형태로 앉은 것인지 아니면 허리 아래 일정부분이 마모가 된 것인지 혹은 아예 새기지 않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만약 본존과 우협시가 입상이고 좌협시가 반가상이라면 이는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 84호)과 같은 도상이다. 아직 나라 안에서 서산마애삼존불 이외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니 눈길을 끌었다. 만약 이곳의 마애삼존불이 서산의 그것과 같다면 굳이 한 사람을 떠 올려야 한다.

그는 백제시대의 스님인 혜현(慧顯)이다. 스님은 서산마애삼존불과 산하나 차이인 덕숭산 수덕사에 머물며 <법화경>은 물론 삼론(三論)에 정통해 강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수덕사로부터 홀연히 몸을 숨긴 곳이 강남(江南) 혹은 남방(南方)의 달라산(達拏山)이며 그 산이 곧 지금의 월출산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산중에 살던 그가 입적을 하자 제자들이 굴속으로 옮겼는데 범이 그의 시신을 모두 먹어치웠지만 붉은 혀만은 남겨 두었다고 한다. 3년이 지난 후 다시 굴을 찾아가자 그때까지도 혜현의 혀는 마치 생전의 그것마냥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것은 스님이 <법화경>을 강설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서산마애삼존불 또한 <법화경>에 근거해 석가와 미륵 그리고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을 새긴 것이다. 그렇다면 도상이 같은 것이라고 보이는 월출산 마애삼존불의 근거 또한 <법화경>이라는 것이 된다. 혜현의 생존 연대나 서산마애삼존불의 조성연대가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이므로 이 같은 가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마애삼존불이 그 시대에 새겨졌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혜현으로부터 이어지는 영향을 받은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새겨졌을 것이며 통일신라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고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아침부터 퇴동마을의 석상 앞을 서성거릴 까닭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곳 마애삼존불의 얼굴과 퇴동마을의 석상의 조각들 중 몇몇은 분명히 닮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퇴동의 석상은 아무리 봐도 불(佛)과 선(仙) 그리고 민(民)이 습합된 모습이다. 또한 월남사에 주석한 진각국사 혜심은 선(禪)과 다(茶) 그리고 시(詩)와 선(禪)의 일치를 말했으며 유불동원(儒彿同源)을 말했다.


삭풍도 쉬어가는 그곳에 선정 드신 부처님

수더분한 인상안 분방한 無爲 깃들여 있어

산위 부처님과 퇴동마을 석상 엇비슷 ‘흥미’



다시 생각에 젖는다. 혜현(慧顯)이 월출산으로 깃든 후 퍼지기 시작한 불법이 고려의 혜심에 이르러 당대를 아우르는 모든 믿음을 하나로 회통시킨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부처님이나 협시불의 모습에서 숭엄함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 그 까닭이다. 오히려 수더분한 이웃 아저씨와 같은 모습이다. 그것을 세련되지 못한 솜씨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내 보기에는 분방한 무위(無爲)가 깃들어 있었으며 그 분방함은 퇴동의 석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두어 시간 산에서 머물다가 내려와 다시 퇴동의 석상을 찾았다. 전면에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것들을 제외하면 민머리로 표현된 것은 스님이며 왼쪽 상단에 머리만 있는 것은 불두가 분명하다. 또 오른쪽 후미진 곳에 삼매에 젖은 듯 앉아 계신 분은 불좌상이 틀림없으며 승상이라고 보이는 조각들의 눈은 조금 전 바라보던 마애삼존불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러나 생각을 더 이상 이어가지는 않았다. 유불도(儒彿道)에 더하여 민간신앙까지 무엇이 학문이고 또 무엇이 종교일까. 종교도 학문이고 학문도 신앙이다. 무지렁이 민중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 또한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기댈 곳 어깨를 감싸주는 훌륭한 안식처이니 굳이 따져 무엇 하겠는가. 이곳 월출산 아래로 깃든 사람들은 진즉에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얼굴로 부처님을 새기고 섬겨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 산에는 노을이 깃들고 있었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삼존골 마애삼존불은

환조로 평면에 선으로 표현…퉁방울눈 ‘독특’

본존불, 육계.삼도 뚜렷…법의는 통견 걸쳐

월남리 삼존골 마애삼존불(가칭)은 2005년 5월 24일에 강진군 성전면에 사는 강영복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출산 8부 능선인 해발 600m 지점의 가로 10m 세로 3m 가량의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사진설명>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전경.


입상인 본존불은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높이가 172cm이며 우협시 또한 입상이며 높이는 100cm 좌협시는 정확한 자세를 알 수 없지만 본존을 향해 몸을 틀고 있으며 높이는 93cm이다. 모두 굵은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협시에 비해 본존불이 더 뚜렷하다. 본존불은 육계가 솟았으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법의는 통견으로 걸친 듯 하며 발은 양쪽으로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마애삼존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얼굴이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동안 봐 오던 부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눈의 표현이 두드러진데 마치 퉁방울눈처럼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눈은 남도지방에서 흔히 만나는 돌로 만든 벅수의 눈과도 닮았다.

벅수는 대개 환조 환조여서 조각이 더욱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평면에 선으로 새기게 되었다고 가정하면 이곳 마애삼존불의 그것 마냥 표현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찾아가는 길 /

월출산 국립공원 경포대 매표소에서 천황봉 쪽으로 오른다. 매표소에서 15분가량 오르면 구정봉과 천황봉으로 향하는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30분가량 더 오르면 왼쪽으로 약수터가 나온다. 그곳에서 약수를 등지고 바라보면 약간 왼쪽으로 뾰족하게 삼각형을 이룬 바위 더미가 보인다. 바위 위에는 듬성듬성 소나무가 두어 그루 있으며 그 바위의 북쪽 사면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약수터에서 등산로를 따라 10m 가량 더 올라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되는데 그곳부터는 길이 없다.

퇴동 사문안석상은 경포대 매표소에서 월남사지 방향으로 내려오면 월남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를 에돌아 내려가면 길가 왼쪽에 노전미술관이라는 표석이 보이고 사문안석상을 알리는 팻말이 있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왼쪽으로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 곁에 있다.



[불교신문 2388호/ 1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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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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