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부처님 성지를 도보로 순례하고 있는 전 동국대 교수 호진스님이 다섯 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절친한 도반인 승가대학원장 지안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진스님은 ‘싯타르타가 왜 녹야원에 갔을까’하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좇으며 소회를 풀어놓았다.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5비구의 활약, 경전엔 없어
지안스님, 녹야원으로 걸어가면서 몇 번이나 했던 생각 가운데 한 가지는, ‘싯다르타가 왜 녹야원으로 갔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5명의 도반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의문은 왜 그들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기 위해 그 먼 곳으로 가기로 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5~6년간 도반으로 지냈던 그들에 대한 우정 때문이었을까요. 그들 사이에 그처럼 돈독한 우정관계가 이루어져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싯다르타가 그토록 진지하게 고행을 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위해 단 한 그릇의 우유죽 공양 받는 것을 보고, ‘타락한 자’라고 매도하면서 떠날 수 있었을까요.
이들 5명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경전 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스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후기의 어떤 불타전에 따르면, 이들은 부왕 숫도다나가 싯다르타를 시중들도록 카필라바스투에서 파견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의 수행 모습에 감동을 받아 한사람씩 차례로 출가한 사람들이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너무 심하게 꾸민 이야기라 그럴듯하지도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왕사성 근방과 보드가야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수행하게 되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왕사성 근방에는 알라라 깔라마와 우드라까 라마뿌뜨라 라는 두 스승이 이끌던 수행 단체와 사리뿌뜨라와 목갈라나의 스승 산자야 밑에서 수행하던 수백 명 규모의 단체가 있었습니다. 역시 보드가야에도 까샤빠 3형제와 그의 제자들 1000명이 있었지요. 이처럼 왕사성과 보드가야에는 상당한 수준의 스승들과 수행단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5비구들은 왜 스승도 없고, 수행경력도 거의 없는 ‘얼치기 수행 초보자’인 싯다르타와 함께 수행을 했을까요. 사실 싯다르타는 수행경력이 거의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을 뿐 아니라, 외국인이었고, 끄샤뜨리야 출신으로서 출가 이전까지는 종교나 철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 아닙니까.
5명의 비구들이, 기성교단의 수행방법이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수준 높은 수행자 또는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에 제각기 혼자서 떠돌이 행각을 하다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싯다르타를 만나 함께 수행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싯다르타가 범상하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와 함께 어울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5비구들이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몇 년 후에 싯다르타를 엉터리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버리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 5명은 그 후 정각을 성취한 싯다르타의 설법을 듣고 최초로 아라한이 되었지만, 교단에서는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경전에서 그들의 활약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 5명 가운데서 한 사람도 붓다의 10대 제자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중생구제 위한 길은 아닐것
싯다르타가 녹야원으로 간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교화’의 시작을 위해서였을까요. 그것보다는 자신이 깨달은 법, 발견한 진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통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초기경전을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해보면, 싯다르타가 출가해서 도를 이룰 때 까지는 ‘중생구제’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출가 동기, 즉 4문유관을 하면서 인생의 괴로운 실상을 본 것, 밤이 깊도록 유흥을 즐기다가 잠에 취해 흐트러진 기녀(妓女)들의 추한 모습을 본 것, 또는 부왕이 출가를 만류하면서 “나는 왕으로써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하자, 싯다르타는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게 해 달라”고 했다는 것 등, 이들 이야기들 가운데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든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부왕의 간청도, 야쇼다라와 갓 태어난 아기의 문제도, 왕자로서 까삘라바스투 국의 장래에 대한 문제도, 그에게는 2차적인 것이었을 뿐입니다. 중생구제는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사진>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5비구를 교화하기 위해 찾은 녹야원 전경. 불교신문 자료사진
출가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스승, 알라라 깔라마와 우드라까 라마뿌뜨라 곁을 떠난 이유도, ‘진리의 추구’나, ‘중생구제’ 문제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자신의 고(苦)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중아함 204經). 6년이라는 세월 동안 몰두 했던 고행을 포기한 이유도 “고행으로써는 고에서 해탈 할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였던 것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여러 경전과 율장에 나오는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이야기에 의하면, 싯다르타는 정각을 성취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법 설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너무나 깊고 미묘해서 탐욕에 빠지고, 무명에 뒤덮여 있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자신만 피로할 것이라는 것, 그래서 그대로 지내다가 열반에 들어 버리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라(魔羅)는 싯다르타의 생각이 옳다고 부추겼고, 범천은 세 종류의 연꽃의 비유를 들면서 사람들에게 설법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라와 범천이 실제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싯다르타 마음속에 일어났던 갈등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이 경전내용에서, 싯다르타는 도를 이룬 뒤에도 중생구제라는 거창한 일은 차치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조차도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야 교진여’는 감격의 외침
그런데 싯다르타는 왜 얼마 전에 그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을 찾아 그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녹야원으로 갔을까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진정한 것인가,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는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해와 공감과 확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발견했던 진리를 말해 보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생각했던 사람들은 5비구가 아니라 6년 전에 그가 잠시 동안 배웠던 두 스승이었습니다. 그들이라면 자신이 발견한 그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甚深難解法)’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공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보드가야에서 걸어서 3~4일 만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다음에 생각한 사람들이 누구였겠습니까. 5명의 도반들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특별한 우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고, 자신의 말을 듣고 이해 해줄 것 같은 사람은 오직 그들뿐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5비구들을 녹야원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싯다르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들을 만나러 온 그를 인사조차 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까지 하면서 냉대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 얼굴을 보아라. 언제 이처럼 맑고 깨끗하고 빛나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하소연까지 했겠습니까.
5비구들에게 며칠 동안 자신이 발견한 법을 설명했지만, 처음 우려했던 대로 그것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드디어 아야 교진여(阿若 陳如:Ajata Kaundinya)가 그의 가르침을 이해했습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너무나 기뻐서 “교진여는 깨달았다! 교진여는 깨달았다!” 라고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Ajata Kaundinya!’ 경 번역자들은 ‘깨달았다. 이해했다’라는 의미의 ‘Ajata’를 ‘아야(阿若)’라고 번역해서 교진여의 이름 앞에 붙임으로써 그의 성(姓)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성이 아니라 싯다르타의 ‘감격에 넘친 고함 소리’였던 것입니다.
지안스님, 나는 ‘아야 교진여’라는 이름을 대할 때마다, 싯다르타가 앉은 무릎을 들썩이면서 고함을 질렀을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싯다르타가 이처럼 기뻐했던 것은 교진여가 법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발견한 법이 다른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이해되고 공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붓다가 5비구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설법을 한 것은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첫 설법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새벽, 싯다르타는 바라나시 숲속의 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있다가, 고뇌에 차서 우연히 그 곳을 지나가던 야사(Yasa)라는 청년을 위해 법을 설해 주고 귀의를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곧 야사의 친구들 54명도 싯다르타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발견한 법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은 5비구를 포함해서 60명이 되었습니다.
이때에서야 싯다르타는 자신이 발견한 ‘법에 대한 확신’과 ‘타인에 대한 교화’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로소 60명의 제자들에게 “중생들(人天)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전도를 떠나라. … 나도 우루벨라(보드가야)로 법을 설하러 가리라”라고, 소위 말하는 전도선언(傳道宣言)을 하게 된 것 아닙니까. 이에 앞서 5비구들, 그리고 야사와 그의 친구들 가운데서 처음 귀의 한 4명에게 법을 설했을 때는, 아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하라”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발견한 진리, 확인 위한 길
요약하면, 싯다르타가 녹야원으로 갔던 이유는 5비구를 가르쳐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했던 진리의 ‘공명과 확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시 그의 출가, 수행도 모두 자신의 개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지, 중생구제를 전제로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문제였지만, 그것이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위한 추구였고, 그 결과 역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을 넘어서서 ‘중생의 문제’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녹야원 설법의 성공이 ‘불교의 탄생’이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된 것 아닙니까.
지안스님, 나는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싯다르타의 이와 같은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태도가 좋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정직하고, 진지하고,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불교신문 2470호/ 10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