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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연미사의 제비원

보물 제115호인 이천동 석불상. 석불상이 위치한 오도산의 소나무숲은 민간 신앙 속 ‘성주신’의 근거지다.





새로 일어설 절집의 성주신 누가 영접할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격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효하다. 짐승들에게 귀소(歸巢)는 숙명이다. 발 달린 것들은 누구나 몸을 누일 공간을 원한다. 거기서 밥도 먹고 새끼도 치면서 나름의 행복을 일군다. 집을 거부당한 삶은 서럽다. 노숙자가 그렇고 이등병이 그렇다. 시험을 망친 아이가 그렇고 부부싸움에서 크게 패배한 남편이나 아내가 그렇다. 집은 몸의 확장이고 집을 먹여 살리는 일은 곧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이다. 스스로의 몸과 꿈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집을 구했다. 주로 나무로 만든 옛집들은 화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빈번한 전란 역시 끝내 집을 잃고 말리란 불안감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집에는 신(神)이 깃들어 있어야 했다.

성주는 집을 지키는 신령이다. 성조(成造) 혹은 상량신(上樑神)이라고도 한다. 집안의 으뜸가는 신으로 대들보에 붙어 한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리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집을 새로 짓거나 옮긴 뒤에 필히 성주를 모셨다. 으레 깨끗한 한지를 여러 겹으로 접은 뒤 그 속에 왕돈(둘레가 큰 엽전) 한 푼을 넣어 성주의 육신으로 삼았다. 항아리에 곡식을 넣어 받들기도 했다. 성주를 두는 장소는 집안의 중심이 되는 대청이나 안방 문 위쪽이었다. 성주신에 대한 제사는 대개 추석을 즈음한 10월 상순에 이뤄졌다. 백성들은 햅쌀로 술과 떡을 빚고 햇과일을 장만해 한 해 동안 살림과 피붙이를 지켜준 은덕에 보답했다.

안동에서 영주 방면 5번 국도로 3㎞ 가량을 달리면 한티재에 이르고 제비원 휴게소가 나온다. 2㎞를 더 가면 오른편으로 이천동(泥川洞) 석불상이 보인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부처님의 머리를 얹은 보물 제115호다. 암벽의 높이는 12.38미터이며 너비는 7.2미터다. 불두(佛頭)의 높이는 2.43미터 남짓. 크기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이스크림 위에 박힌 별사탕처럼 생경하다. 불상 자체만을 두고 감상하면 문화재적 가치는 녹록치 않은 편이다. 가로로 부드럽게 뻗은 눈매에 입술이 두텁고 미소가 은은하다. 안동 사람들은 대대로 ‘제비원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아낙 하나가 바위 아래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짓이기며 무언가를 빌고 있다. 손발도 없는 불상이 어떤 복을 내려줄 수 있을지.

안동은 영남대로의 길목이었고 제비원(院)은 나라에서 마련한 여관이었다. 전국을 떠도는 장사치들과 출장을 나온 벼슬아치들을 먹이고 재웠다. 제비원은 여관 이전에 사찰이었다. 신라 선덕여왕 3년(634) 명덕스님이 연자루(燕子樓)라는 전각을 짓고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했다. 안동의 명물인 이천동 석불상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말 그대로 모양이 제비를 닮았다는 연자루는 본래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었다. 지금도 불두(佛頭)가 놓인 바위에는 주춧돌을 놓았던 홈이 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던 절집들은 죄다 철거된 상태다.

중흥불사가 한창이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번듯한 새 법당과 요사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행적이 묘연한 성주신도 이때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집들의 왕을 영접할 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불상이 위치한 산의 이름은 오도(五圖). 연자루는 석불상을 머리로 해서 뒤춤으로 오도산까지 덮은 아치형의 법당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은 연(燕)자 돌림으로 몇 가지 이명을 낳았다. 누각의 전체적인 형태가 제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띄었기 때문에 ‘연비사(燕飛寺)’라고도 일컬었다. 연구사는 석불상 위쪽의 전각이 제비의 부리에 해당한 까닭에 비롯된 이름이다. 오늘날은 연미사(燕尾寺)가 공식적인 명칭이다. 스님들이 거처하던 요사채가 제비의 꼬리를 닮았다는 데서 연유했다. 다음은 스승 류성룡(柳成龍)의 명을 따라 권기(權紀)가 작성한 안동의 대표적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 ‘불우(佛宇)’조의 기록이다.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는 부(府) 서북쪽 12리 떨어진 오도산(五圖山) 남쪽에 있다. 큰 돌을 세워 불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8년에 만들었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다. 집 모양이 하늘에 날개를 펴는 듯하다. 뒤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을 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의 재목은 다 옛것을 사용했다.”

부처님이 힘을 잃자 제비는 자리를 훌훌 털고 떠났다. 거룩한 사찰이 한낱 여관으로 전락한 이유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조치로 여겨진다. 폐사됐던 연구사는 안동 봉정사 신도모임이었던 등촉계(燈燭契)의 발의로 복원됐다. 그들은 절터에 3채의 법당을 지어 지역불교의 불씨를 되살렸다. 1934년의 일이다. 오도산은 다섯 가지 사물이 얽혀 상서로운 풍광을 자아낸다는 뜻이다. 석불상과 연자루, 삼층석탑과 연미사 그리고 소나무. 석불상 뒤편에 흐드러진 소나무 숲의 틈새로 삼층석탑이 아른거린다. 옛집들의 주요 재질은 소나무였다. 나무들은 문외한이 봐도 실하다. 불타 없어진 숭례문의 목재도 여기서 가져다 썼다고 전한다.

<사진> 이천동 석불상 뒤편에 있는 삼층석탑.

성주신은 안동에서 왔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구전되는 무가(巫歌)인 ‘성주풀이’는 우리나라 집들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다. ‘성주의 근본이 어데메냐 경상도 안동 땅의 제비원이 본이로다. 제비원의 솔씨를 받아 소평(小坪) 대평(大坪) 던졌더니 그 솔씨 점점 자라 대부동이 되었구나. 대부동이 점점 자라 청장목이 되고 황장목이 되고 도리기둥 되었구나.’ 이 노래대로라면 민초들의 누옥도 임금의 구중궁궐도 결국은 동향(同鄕)인 셈이다.

성주풀이는 ‘술의 무서움’과 ‘아내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서천국(西天國)의 천궁대왕(天宮大王)과 옥진부인(玉眞夫人)이 혼인해 살았다. 40이 넘도록 혈육이 생기지 않아 부처님께 치성을 드려 기어이 잉태했다. 옥동자를 낳았고 이름을 ‘성조’라 지었다.

15세가 된 성조는 옥황상제에게 요청해 솔씨 서말 닷되를 받아 지하궁(地下宮) 공산(空山)에 심었다. 3년 후 계화씨(桂花氏)의 여인과 결혼한 성조는 주색에 빠져 아내를 내치고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노한 부왕은 성조를 황토섬으로 귀양보내버렸다. 객지에서 고생하던 성조는 자신의 고충을 혈서로 담아 아버지에 보냈고 마침내 사면됐다.

왕궁으로 복귀한 성조는 아내에게 탕아로서의 행실을 사죄하고 용서를 받았다. 금슬은 재생됐고 성조 부부는 각각 5명의 아들딸을 줄줄이 출산했다. 한편 공산에 심었던 솔씨는 온 백성의 집을 지어도 될 만큼 풍성하게 자라났다. 자신이 심은 소나무로 나라의 모든 가옥을 완성한 성조는 스스로 신이 됐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던 절집들은 죄다 철거된 상태다. 중흥불사가 한창이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번듯한 새 법당과 요사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행적이 묘연한 성주신도 이때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집들의 왕을 영접할 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나무가 주택 건축의 부재(副材)로 위상이 깎인 지 오래다. 차라리 동네 공인중개사에게 집안의 흥망성쇠를 묻는 세상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신과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건 불상뿐이다. 이천동 석불상의 시선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가끔 구름이 끼고 비행기나 지나다니는 서방정토(西方淨土).

안동=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64호/ 10월4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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