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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영평사의 구절초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라 할 만하다. 시기상으로는 가을의 복판이지만 날씨는 여름의 문턱을 좀체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영평사를 찾았던 지난 1일도 뜨거웠다. 신문에서나 보던 지구 온난화의 폐해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다. 하늘은 여름에 쓰고도 한참 남은 햇볕을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 그는 지금이 10월이란 걸 알 턱이 없다. 그래도 산사에 흐드러진 구절초 덕분에 늦더위를 잊는다. 열기에 시달리던 감각이 두 눈 속으로 들어와 황급히 몸을 숨긴다. 구절초는 가을에 피는 대표적인 자생화로 들국화의 일종이다. 원형으로 뻗어나가는 하얗고 기다란 꽃잎이 아름답다. 3만평(10만㎡) 대지가 구절초 천지다. 때 아닌 ‘폭설’에 눈이 따갑다.

사찰에 핀 흐드러진 ‘눈꽃’에 눈이 따갑다



영평사의 구절초는 자생이 아니다. 인간의 땀으로 틔운 꽃이다. 15년 전 주지 환성스님이 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직접 심었다. 하얀 꽃잎과 꽃말이 마음에 들어서다. 구절초의 파종은 4월부터 6월까지 꼬박 3개월이 걸린다.

모종을 심고나면 주변의 잡초를 솎아내는 일로 여름 한철을 보낸다. 아무리 발육이 좋은 구절초라도 한 곳에서 3년 정도 자랐으면 땅을 갈아엎어야 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열에 아홉은 성장을 거부한다. 환성스님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꽃들도 땅에 싫증을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꽃조차 권태를 느끼는 모양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란 속설은 호르몬 분비의 변화와 관계가 깊다. 가을이 되면 남성의 성욕을 유발하는 테스토스테론이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그래서 더 외롭고 뒤숭숭하단다.

<사진> 영평사 대웅보전 앞에 핀 구절초.

윤리와 법도가 엄존하는 인간사회에서 주체할 수 없는 흑심이란 그리 달가운 기분이 못된다. 물론 가을은 남자만 힘들게 하지 않는다. 여자도 가을을 탄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생체리듬도 바뀌게 되는 것이 이유다. 일조량이 줄어들고 기온이 낮아지면 노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등 정신을 차분하게 만드는 호르몬이 왕성하게 뇌에 전달된다. 곧 우울해지는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 벌거벗은 나무와 같은 서글픈 풍경도 가뜩이나 가라앉은 마음에 돌덩이를 얹는다.

남성에 비해 정서적으로 예민한 여성들은 좀더 강렬하게 추월색(秋月色)을 앓는다. 이때부터 심해지는 생리불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구절초는 이들을 위해 산다.

음력 9월9일 중양절(重陽節)은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성성하다는 날이다. 이날엔 국화나 구절초로 술을 빚어먹는 것이 풍습이다. 구절초(九折草)란 이름은 꽃잎을 9월에 땄을 때 약효가 최고조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특히 부인병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냉증에 좋고 생리통에 강하다. 월경주기를 바로잡아주고 심지어 폐경을 되살려낸다. 오죽하면 선모초(仙母草), 신선이 어머니들에게 준 약초라는 별명이 붙었다. 옛 어머니들은 딸이 시집을 가기 직전과 해산을 하고 몸조리를 위해 친정에 왔을 때 구절초를 달여 먹였다. 구절초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구절초도 가을 안에 살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꽃 한 송이. 꽃 한 송이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구절초 안에 다 들어 있다.

… 돈이 전부가 아닌 이유, 사람이 잘났다고 다 잘 되지는 못하는 이유,

전 세계적으로 집값이 폭락하는 이유, 배우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까지.

하얀 꽃잎을 짐짓 유심히 살펴본다.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갑자기.



영평사(永平寺)가 위치한 장군산은 금강(錦江)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룡(逆龍)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산세는 작지만 기운이 세찬 명당으로 불린다. 사찰이 지향하는 ‘영원한 평화(永平)’는 꽃들이 만든다.

봄에는 매발톱꽃, 여름에는 백련이 풍성하다. 9월이 오면 구절초가 대세다. 흰빛의 물결은 9월말에서 10월 중순까지가 절정이다. 이때 사찰에선 축제를 연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영평사 구절초 축제는 오는 19일까지 계속된다. 여러 가수들의 공연을 볼 수 있고 구절초로 요리한 음식과 구절초로 염색한 옷을 체험할 수 있다. 가장 가 볼만한 지역축제 가운데 하나다.

구절초에도 향기가 있어 곤충들이 끊임없이 몰려든다. 꿀을 빨고 있는 나비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다리가 네 개뿐이다. 네발나비 역시 여느 곤충처럼 여섯 개의 다리를 가졌었다. 그러나 앞다리 한 쌍이 퇴화돼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아졌다. 퇴화라기보다 포기에 가깝다. 흙 속에 스민 무기질과 수분을 섭취하기도 하는 네발나비는 꽃보다 땅에 앉을 일이 많다. 울퉁불퉁한 꽃잎 위에 앉을 일이 빈번했다면 다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리보다 훨씬 날렵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날개가 있다. 본디 나비란 게 다리 한두 개쯤은 없어도 괜찮은 짐승이다. 그래도 징그럽다.

들꽃을 보면 측은해진다. 들에 사는 것들에겐 집이 없다. 반복되는 추위와 더위를 맨몸으로 견뎌야 하는 운명이다. 사람의 발길질 한번에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는 풍전등화의 목숨이다. 그래서 모든 위험과 역경을 극복하고 당당한 성체로 선 꽃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동정심이 질투심으로 바뀌는 지점이기도 하다. 채 피지도 못한 채 삶을 빼앗긴 청춘이나 입 달리고 손 달린 죄로 신음하는 중생의 신세가 들꽃보다 나을까 싶다. 마음을 닫고 보면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데, 마음은 자꾸 흐른다.

<사진> 구절초 위에 앉은 네발나비.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는 ‘남전참묘(南泉斬猫)’의 일화로 유명하다.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며 다투자,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문제를 단칼에 해결해버린 인물이다. 그는 수행승에게 주어진 가장 엄혹한 금기인 불살생을 단숨에 갈아 마셔버렸다. 대(大)의 화합을 위해 소(小)를 희생한 것이라는 둥 중생의 탐욕을 분쇄하기 위한 충격요법이었다는 둥 워낙 의외의 행위였기에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선악의 피안을 어찌 말로 다스릴 것인가.

지금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낸 육긍(陸亘, 764~834)은 남전선사와 친분이 두터웠다. 어느 날 승조스님이 쓴 <조론(肇論>을 탐독하다가 퍼뜩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부리나케 스님에게 달려가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했다.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天地同根 萬物一體)’이라는 구절이 나오던데, 매우 훌륭한 말씀이군요.” 칭찬이나 보충설명을 기대했겠으나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묵묵부답하던 중 뜰 안에 핀 모란꽃 한 송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한 송이의 꽃을 마치 꿈결인 양 바라보는구먼(時人見此一株花 如夢相似).’ 대단치도 않은 깨우침에 괜히 호들갑을 떤다는 무언의 호통이다. 불법은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것인데, 책만 파고 있다는 비판이다.

남전의 꽃은 모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꽃 한 송이. 꽃 한 송이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구절초 안에 다 들어 있다. 고양이가 목을 베인 이유, 네발나비의 다리가 네 개뿐인 이유, 인류가 출현한 이유, 돈이 전부가 아닌 이유, 사람이 잘났다고 다 잘 되지는 못하는 이유, 전 세계적으로 집값이 폭락하는 이유, 배우 최진실이 자살한 이유까지. 하얀 꽃잎을 짐짓 유심히 살펴본다.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갑자기.

공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66호/ 10월1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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