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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고 역사와 전통을 지닌 봉황사 이름에 걸맞는 중창불사가 지난 6월 회향했다.

중창불사 회향·문화재 등록 등
최근 변화 주도하며 활발히 활동
이웃 보듬는 자비행 의지처 역할

짓기 전 이름 먼저 가진 누각 등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텔링 풍부
최적의 방생지 조건 갖춰 ‘각광’

제16교구 말사 봉황사는 안동 임동면의 아기산(鵝岐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안동에서 가장 오랜 사찰인데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절이다. 오랜 기간 사세가 그만큼 미약했다는 뜻이다. 요즘 봉황사는 ‘뜨는 절’ 가운데 하나다. 여전히 작고 외진 절이지만 중창불사와 문화재 등록, 지역민을 위한 활동 등으로 이름을 알리며 조금씩 관심을 받고 있는 탓이다.

일주문이 따로 없는 봉황사는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은 남덕루(覽德樓) 밑으로 난 돌계단길이다. 덕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의미의 남덕루는 최근 복원된 전각 가운데 하나다. 문화재로 등록돼 있는 대웅전을 기품 있게 해주는 맛이 있어 봉황사를 돋보이게 하는 전각으로 꼽을만하다.

남덕루는 최근 복원돼 단청까지 곱게 입혀진 누각임에도 칠이 다 벗겨진 현판을 누각 안쪽에 걸고 있다. 그 사연에 대해 주지 태원스님은 “남덕루는 건축물 보다 이름을 먼저 가진 누각”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왔을 때 남덕루 현판이 남아 있었는데, 누가 쓰고 새겼는지 알 수 없으나 1735년 조성됐다. 300년 된 현판이 남아 있으니 누각을 복원하게 됐다는 것이다.

봉황사 누각 남덕루는 건물을 짓기 전 이름을 먼저 가졌다. 새로 복원된 남덕루 안쪽에 걸린 현판.

봉황사에 가려면 안동시 임하면과 임동면에 걸쳐 임하댐으로 인해 형성된 호수 임하호를 건너야 한다. 임하호를 가로질러 이르는 첫 마을 수곡리를 끼고 아기산 깊숙한 곳이다. 거위가 양 날개로 포근히 감싸고 있는 형세다. 수곡리는 수몰마을이다.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상당부분 수몰되고 높은 지역으로 이동해 지금의 마을이 새로 형성됐다. 덕분에 봉황사와는 주민들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수곡리를 비롯한 임동면 사람들에게 봉황사는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던 고찰로 기억되고 있다. 간간이 무리지어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데, 어렸을 적 기억을 좇아 봉황사를 찾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봉황사를 황산사로 알고 있다. 황산사가 봉황사로 바뀐 것은 1980년 사적비가 발견돼 제이름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찰 옆 개울에서 발견된 사적비는 ‘아기산 봉황사 사적비’라는 이름으로 조선 순조 13년 때인 1813년 조성됐다.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승당, 선당, 청풍당, 만월대, 범종각, 만세루 등의 여러 전각과 낙석암, 정수암 등 산내암자가 있었다는 기록도 사적비에 담겨있다.

대웅전에 얽힌 전설도 비로소 재발견됐다. 단청을 맡은 화공이 절대 단청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정면과 측면을 마치고 뒷면을 그릴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몰래 훔쳐봤더니 봉황이 단청을 하고 있었다. 봉황은 사람들의 눈길이 이르자 날아가버려 단청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부안 내소사와 무주 안국사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한다. 남덕루와 단청 이야기는 좋은 스토리텔링 거리다.

봉황사는 사찰의 작은 일까지 신도들이 함께 도량을 일구어가는데 힘을 보내고 있다. 주지 태원스님과 신도들이 겨울 김장을 담갔다.

태원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2013년 이후 봉황사는 변화가 시작됐다. 신도가 몇 안되는 절이다보니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지역민들과의 소통이었다. 임동면에 있는 33개 경로회관을 찾아다녔다. 쌀과 국수를 가져가 인사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의지처임을 각인시켰다. 지역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내놓았다.기록에 의하면 봉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 때인 644년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됐다. 1400년이나 된 유서 깊은 사찰로 안동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됐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봉황사의 사세가 적지않은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최고(最古)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에 있는 봉정사와 광흥사에 비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태원스님은 “전에 머물던 스님들은 봉황사가 알려지는걸 원치 않았던 모양”이라고 했다.

문화재 등록도 최근에야 이뤄졌다. 대웅전을 비롯해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 삼존패, 후불탱화, 오방번기, 사직도 등 17점을 경상북도 문화재로 등록했다. 태원스님은 오랜 성보가 행여라도 도둑 맞거나 훼손되지 않을까 성보 현항 조사를 벌이고 문화재 등록을 서둘렀다고 했다.

사찰로서의 기본적인 사격을 갖추기 위한 중창불사도 진행됐다. 사찰이 제역할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다. 중창불사는 4년여에 걸쳐 남덕루와 칠성각, 공양간을 새롭게 건립하고 지난 6월 회향했다.

이같은 변화에 힘입어 봉황사를 찾는 이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인연 있는 스님들이 신도들과 함께 순례를 오기도 하고, 입소문을 전해들은 순례객들도 봉황사를 찾는 횟수가 늘었다. 임하댐이 바로 인근에 있어 사찰 단위로 방생지로 찾는 이들도 생겼다.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옛 사격을 찾아가는 중인 봉황사로서는 기분 좋은 변화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 변화를 가장 반기는 것은 신도들이다. 법회가 끝나면 차 한잔 편하게 마실 공간 조차 없어 서둘러 절을 나서야 했던 서운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봉황사는 내년부터 이 지역 수몰민을 위한 위령재와 수륙재를 정기적으로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수몰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에 맞춰 고향을 찾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또 이 지역의 진산인 아기산 산신대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태원스님은 “기도소리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도량이 되기 위해 지역 내에서 사찰의 역할을 스스로 찾아나가고 조금씩 활동을 늘려 나가려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동 봉황사 전경.

인터뷰 / 주지 태원스님

주지 태원스님.

지역민 함께 하는 도량으로 거듭날 것”

먼저 사람들에 손 내밀며 소통
“기도소리 끊이지 않게 하겠다”

“봉황사가 워낙 알려져 있지 않은 전형적인 시골절이어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지역민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작은 것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찰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봉황사 주지 태원스님의 노력은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찾는 보배로운 마음이다. 주지 부임 후 유교적 성향이 강한 지역민들에게 먼저 손내밀고 인사하며 소통에 나선 것도 지역 내에서 봉황사의 역할을 찾고자함이라 할 수 있다. 태원스님은 “요즘 시골은 사람도 없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라 절에 오는 것도 힘들어 한다”며 “이런 여건 속에서 짧은 시간에 지역 사람들에게 봉황사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토로했다.

태원스님은 가급적 외부 출타를 하지 않고 신도들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직접 예경의식과 기도의식을 집전한다. 사시 때에는 108배와 <금강경> 기도소리가 도량 가득하다. 정성을 마음으로 느낀 신도들이 예전보다 더 자주 절을 찾는다. 태원스님은 “신도 입장에서 보면 농사일에, 자식들 문제에, 건강 문제에 절에 가지 않을 이유를 찾자면 수도 없이 많다”며 “주지 스님이 열심히 기도한다고 사찰을 찾는 횟수가 많아진 신도들이 그저 고맙다”고 했다.

신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해야할 일도 찾게 된다. 내년 4월 개최하기로 한 임하댐 수몰민을 위한 위령재와 수륙재가 대표적이다. 남아있는 수몰민도 있지만 많은 수몰민들이 외지로 떠났다. 그래도 고향은 그리운 법이다. 수몰민들이 1년에 한번씩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해 봉황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 결과가 수몰민 위령재와 수륙재 봉행 계획이다. 지역민과 소통하려는 주지스님의 원력과도 잘 맞는다. 태원스님은 “편하게 살고자 하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부처님밥 먹는 빚은 갚고 살고 싶다”며 봉황사가 안동지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에 걸맞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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