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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화격 정밀한 묘사…화엄계 불화의 거작”

송광사 조선 화엄교학의 중심
부휴, 각성스님 교학 발전시켜
간경사업 外 화엄법회도 봉행

1770년 ‘화엄경변상도’ 봉안
화엄사상과 불사원력의 결실

칠처구회 시각적으로 구체화
우리나라 ‘화엄경변상도’ 규범
온전히 지킨 조선불화 기준작
조계총림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는 1770년에 조성됐다. 송광사 화엄사상과 대원력의 결과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스님들이 공부하시는 절, 조계총림 송광사(松廣寺)는 깨달음으로 가는 치열한 구도 행각의 길을 함께 하는 한국의 승보종찰이다. 일찍이 신라 말에 혜린선사가 창건한 후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비롯해 16국사 스님을 내셨고 대대로 많은 선지식을 배출한 유구한 역사의 명찰로, 조계종의 근본도량이기도 하다.

송광사의 위상은 일주문에 걸린 두 개의 현판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大乘禪宗曹溪山松廣寺)’와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곳에 국보 제314호이자 한국 불화의 거작 ‘화엄경변상도’가 있다. 조선 후기 송광사의 화엄사상과 불사 원력의 결과물이자 현존하는 한국 화엄경 변상도의 규범과도 같은 불화이다. 

화엄(華嚴)은 법계연기(法界緣起),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고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을 지닌다. 쉽게 말하면, ‘모든 만물이 일체의 대립을 넘어 하나로 융화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상적 세계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줄여 ‘화엄경’을 통해 설명된다. 대승경전의 왕 혹은 경전 중의 경전으로 불리는 화엄경은 60 화엄경, 80 화엄경, 40 화엄경, 3종류가 존재한다. 이 중에서 80 화엄경은 일명 ‘주본(周本)’으로,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전체 39품의 칠처구회(七處九會)로 구성,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과 이를 바탕으로 한 화엄사상은 한국에서도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며 발전했고 그 전통은 조선으로까지 계승되었다. 조선 개국 후 억불 기조 속에서 불교계 교단들이 통합되면서 화엄종도 종파적인 성격이 축소되긴 했으나, 화엄경은 여전히 교학의 중심 경전으로 자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사찰에서는 화엄경의 해설 주석서인 화엄경소(華嚴經疏)와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 등을 활발히 간행했다. 또한 ‘화엄종주(華嚴宗主)’ 혹은 ‘화엄강백(華嚴講伯)’으로 존경받던 스님들을 모셔와 대규모의 화엄법회를 개최하기는 등 화엄사상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 속에서 조계산의 송광사와 선암사는 화엄종주와 강백 스님들을 중심으로 교육과 활발한 간행사업을 진행하면서 화엄교학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된다. 특히 송광사는 부휴선수(浮休善修)스님과 그 문도인 벽암각성(碧巖覺性)스님 등 여러 스님들이 주석하면서 교학의 발전을 이끌어갔다. 송광사에서는 부휴계 각성스님이 증명을 맡아 <대방광불화엄소(大方廣佛華嚴疏)>를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중요한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한 변상도(變相圖)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이후 1770년 화엄경변상도 불화의 기초가 되었다. 송광사의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은 현재 보물 제19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간경 사업 외에도 송광사에서는 묵암최눌(默庵最訥)스님이 주축이 되어 1750년과 1759년에 연이어 화엄법회를 개최할 정도로 화엄사상이 꽃피었다. 

그 토대 위에 송광사에서는 1770년에 ‘화엄경변상도’를 봉안하게 된다. 이 그림은, 화면 하단의 화기에 따르면, 무등산 안심사에서 양곡의건(暘谷義建) 대선사를 증명(證明) 스님으로 모시고 화련(華蓮)스님을 비롯한 12명의 화승들이 동참해 그렸으며, 완성된 후 송광사로 옮겨와 화엄전에 모셨다고 한다.

시주자로는 광양에 사는 재가불자 4인과 함께 팔정(八淨), 해징(海澄), 행인(幸仁) 등 여덟 분의 송광사 대종사 스님들이 참여했다. 이분들은 1759년 화엄대법회의 회주였던 풍암세찰(楓巖世察) 대사의 법통을 이은 스님들이다. 화엄경변상도 불화 역시 화엄강백의 법통을 이은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발원한 대원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한편 그림의 제작을 주관했던 화련스님은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를 그리기 전에도 곡성 태안사 봉서암의 감로도(1759), 해남 대흥사 영산회괘불도(1764), 삼십삼조사도(1767)를 제작한 이력이 있는 조선 18세기 최고의 수화사(首畵師) 중 한 명이다. 화련스님을 필두로 총 열두 분의 스님들이 각기 어떤 역할을 맡아 이 불화를 그렸는지는 명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림의 어느 한 곳도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충전(充塡)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량이 우수한 분들로만 구성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는 부처가 화엄경을 설파할 때 7곳에서 9번의 모임을 했다는 ‘칠처구회 (七處九會)’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해 표현한 그림이다. 세로 281cm, 가로 255cm의 비단 바탕에, 화엄경의 심오하고도 방대한 내용을 짜임새 있게 구현해 냈다. 각 설법회의 주존과 설주보살(說主菩薩), 그 외의 제 보살과 성중, 배경 등을 모두 묘사했으며 명문까지 더하고 있어 말 그대로 ‘그림으로 구현한 화엄경’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섬세하면서도 명확한 필선으로 무수히 많은 존상을 모두 흐트러짐 없이 그렸고 구름을 이용해 칠처구회를 안정감 있게 구분, 배치했다. 또한 붉은색, 녹색, 군청색, 황토색, 백색을 적절하게 잘 운용하며 각각의 주제가 시각적으로 잘 눈에 들어오게 처리했다. 복식의 장신구, 보관, 대탑 등은 귀한 순금을 사용해 꼼꼼하게 처리하기도 했다. 
 

제1 보리도량회(菩提道場會) ‘삼매에 든 보현보살’.

화엄경변상도 화면은 크게 하부의 ‘지상설법회’와 상부의 ‘천상설법회’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지상에서 설법한 제1 보리도량회(菩提道場會), 제2, 7, 8 보광명전회(普光明殿會), 제9 서다림회(逝多林會)가 위치한다. 화엄경의 서막에 해당하는 제1회인 보리도량회는 연화장세계와 보리도량의 설법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하단에는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가 향수해(香水海) 바다에서 피어난 연화와 찰종(刹種)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연화장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보리도량회의 좌측(향 우측)에는 제2, 7, 8회의 보광명전 설법회가 위치하는데, 보광명전이라는 동일한 공간을 배경으로 노사나불과 설주보살, 법을 청하는 성중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보리도량회의 우측(향 좌측)에는 제9회인 서다림회가 묘사되어 있다. 이곳에는 <입법계품>에 근거, 선재동자께서 53선지식에게 법을 구하는 내용이 상하구조로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지상설법회의 위쪽에는 하늘에서 설법한 제3회인 도리천궁회(忉利天宮會), 제4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 제5회 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 제6회 타화자재천회(他化自在天會)가 그려져 있다. 상서로운 구름에 둘러싸인 존상들의 원만한 모습과 천상 설법회 장면이 안정감 있게 시야에 들어온다.
 

제2, 7, 8 보광명전회(普光明殿會)와 주존 ‘노사나불’.

지상과 천상의 각 법회에서 설법하는 주불은 양손을 어깨 위로 올려 설법하는 모습을 취한 노사나불(盧舍那佛)이시다. 각 회의 설주보살로는 보현보살, 문수보살, 법혜보살, 공덕림보살, 금강당보살, 금강장보살 등이 등장한다. 주존 노사나불은 정수리, 눈, 발바닥 등에서 광명이 뻗어 나오는 모습으로 심오한 화엄세계의 분위기를 고취시키고 있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물론이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을 매우 충실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그려낸 최고작이자 기준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그림은 이후 1780년 선암사본, 1790년 쌍계사본,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통도사본 등으로 계승되며 조선 후기 화엄경변상도의 규범과도 같은 불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더욱이 선암사본과 쌍계사본은 도난을 당해 현재 사중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인 가운데, 송광사본은 사찰에 온전히 모셔져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실로 대단하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9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는 심오한 화엄경의 세계를 시각화했다는 점도 놀랍고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화격도 뛰어나지만, 세부로 집중해 들어갈수록 정밀하면서도 구체적인 묘사에 더욱 압도되어 찬탄하게 되는 화엄계 불화의 거작이자 최고봉이다. 이 위대한 그림이 훗날까지 온전히 잘 지켜지고 계승될 수 있도록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제9 서다림회(逝多林會) ‘53선지식’.

[불교신문3576호/2020년4월2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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