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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미 우아한 화취까지 공존하는 희대의 명작”

조선 세종 때 왕실후원 받아
극락보전 건립, 46년 후 불화 조성
해련 선의 죽림스님이 흙벽에
아미타불 관음 지장보살 그려

고려불화 계승해 창의적 변용
숭고미와 우아한 화취 공존
불교벽화의 최고봉으로 꼽혀

전라남도에는 영암군과 강진군을 품고 있는 월출산(月出山)이 있다. 월출산은 비옥한 평야 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바위산의 웅장한 형세가 더 두드러지는 명산이자 영산으로, 호남의 소금강이 불릴 정도로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명산에는 명찰이 있듯 월출산에는 도갑사, 무위사, 그리고 월남사지 등 많은 전통 사찰과 절터가 전한다. 그중에서 무위사(無爲寺)는 월출산의 동남쪽인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위치하는데 ‘무위’라는 절 이름에 걸맞게 자연적이면서도 단아한 모습으로 늘 우리를 반겨준다.

강진 무위사 아미타삼존도(사진 가운데)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데 아미타삼존불 모습이 마치 극락에서의 설법을 연상시키듯 존엄하다. ⓒ성보문화재연구원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사명으로 창건했으며 9세기에 도선국사가 중창하면서 ‘갈옥사(葛屋寺)’로 바꾸기도 했다. ‘무위사’라는 사명은 고려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스님이 주석, 중창하면서 가지산문(迦智山門) 소속 선종 사찰로서 위상을 공고히 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천태종 17개소 자복사(資福寺) 중의 하나로 소속되는 등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불사를 이뤄갔다. 

무위사에는 유구한 전통에 걸맞게 현재도 많은 국가지정문화재가 전한다. 극락보전, 내부의 아미타삼존좌상과 각종 벽화, 선각대사탑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주불전인 극락보전은 무위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극락보전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처마를 받치는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놓인 주심포이다. 간결하지만 기품 있고 아름다운 15세기 건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현재 국보 제13호이다.

한편 극락보전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지유(指踰)’로 참여했고 이곳에서 수륙재를 설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지유란 조선전기 대전(大殿)이나 인수부(仁壽府)에 소속되어 왕실의 상제의식에 관여했던 직책을 의미한다. 15세기 무위사가 수륙사(水陸社)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극락보전의 내부로 들어가면 정면 중앙에 아미타삼존좌상이 불단 위에 모셔져 있고 그 뒤로 후불벽에 아미타삼존도가 그려져 있다. 아미타삼존도는 건물이 지어지고 46년 후인 1476년에 그려진 벽화이다. 세로 270cm, 가로 210cm의 크기의 흙벽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위주로 하고 백색, 군청색, 황토색을 일부 사용해서 채색했다.

무위사 아미타삼존도 중 지장보살. ⓒ성보문화재연구원
무위사 아미타삼존도 중 관음보살. ⓒ성보문화재연구원

그림의 양쪽 하단부에 쓰여 있는 기록에 따르면, 강진의 세도가들을 비롯해 인근의 불자 다수와 스님들이 동참 시주했고 그림은 해련(海連)스님을 필두로 선의(善義)스님과 죽림(竹林)스님이 동참해 그렸다. 존상의 구성에 대해서는 ‘무량수여래관세음지장보살(無量壽如來觀世音地藏菩薩)’이라고 구체적으로 명명하고 있기도 하다. 

주존인 아미타여래는 안에 군의(裙衣)를 입고 그 위에 대의를 걸친 채 사자가 표현된 비교적 높은 대좌 위에 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뒤로는 연 봉오리 모양의 광배가 갖춰져 있다. 대의에는 원형의 꽃문양이 시문되어 있고 광배의 테두리에는 연꽃과 당초 줄기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으며 그 밖으로는 부처님의 법력을 상징하듯 화염이 역동적으로 뻗어 나간다.

여래의 좌측에는 관음보살이 높은 보관에 화불을 모신 채 두 손을 모으고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서 계신다. 긴 보발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투명한 듯 보이는 베일을 걸치고 유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부처님의 우측에는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각기 손에 보주와 석장을 들고 서 계신다. 당초문, 원문, 연주문 등 각종 문양이 그려진 군의와 가사를 걸치고 당당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아미타삼존은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극락에서의 설법을 연상시키듯 존엄하다. 그 뒤로는 여섯 분의 불제자들이 합장을 한 채 엄숙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부처님을 향해 시립해 계시는데, 위대한 수행자의 모습에 경외감이 들기까지 한다. 

무위사 아미타삼존도는 숭고미와 우아한 화취가 공존하는 명작이다. 또한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불화 중 시기가 명확한 가장 이른 사례로 조선 초 불화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기준이 되는 유물이기도 하다. 당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강진에서 그려진 것이긴 하나 본래 무위사가 효령대군 등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었음을 염두에 둘 때 뛰어난 기량의 화사들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화기의 맨 앞에 이름을 올린 해련(海連)스님이 ‘대선사’로 언급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장인으로 참여한 스님들의 지위와 연륜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조선 초 억불의 기조 속에서도 숭불의 전통과 불사를 이어간 무위사 원력의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무위사 아미타삼존도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 불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창의적으로 변용했다는 점이다. 우선 전통의 계승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확인된다. 첫 번째 이 그림이 ‘벽화’라는 점이다. 현재 애석하게도 고려의 불전과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사> 등 문헌을 보면 당시 사찰의 불화 상당수가 벽화였던 것 같다. 개경 소재 왕실 원찰인 흥왕사와 보제사의 벽화가 대표적인 예이며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고려 벽화도 이를 입증해 준다.

혹자는 현존하는 고려 불화가 거의 다 족자라는 점을 상기하며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현존작들은 대부분 귀족들의 원당 혹은 집안 내 불당에 봉안했던 것이다. 무위사 아미타삼존 벽화는 이렇듯 고려 불교 벽화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대표적인 작례이다. 

두 번째는 화면의 구성이다. 무위사 아미타삼존도는, 앞서 설명했듯이,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 그리고 지장보살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관무량수경>에 따르면 아미타여래의 우협시는 대세지보살이지만, 실제 동아시아 불교 조각이나 그림 등 작품에서는 지장보살로 대체된 사례가 적지 않다.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자비의 ‘관음보살’과 지옥 중생 구제의 ‘지장보살’을 함께 모시고자 하는 염원이 반영된 신앙적 결합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구성이 고려에서부터 확인된다. 리움 소장 아미타삼존도, 일본 마츠오데라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 개인 소장 관음지장병립도 등이 있는데 무위사본의 경우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표현과 기법에서 고려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관음보살이 걸친 베일의 전면에 세밀하게 그려진 마엽문(麻葉文)은 고려의 수월관음도에서 주로 보이며 지장보살이 쓰고 있는 두건의 형상과 가사에 그려진 당초문 역시 고려 지장보살도의 특징이다. 정면에 사자가 그려진 높은 대좌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무위사 아미타삼존도는 고려 불화를 계승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더불어 조선에 들어와서의 변화 양상도 다수 확인된다. 특히 주존인 아미타부처님의 표현에서 많은 변용을 시도했다. 우선 부처님의 몸, 특히 상체가 고려에 비해 좀 더 길게 표현되었다.

다음으로 부처님의 상호에서 정상 계주가 높게 솟아 있는 점이나 연봉오리 모양의 거신 광배 등도 고려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표현이다. 또한 여래의 대의 안에 승각기가 생략되어 있거나 대의에 시문된 문양이 간략화된 점도 고려와 다르다. 즉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고 변용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차별성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벽화는 제작 당시의 장소에 당초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한 점에서 무위사의 아미타삼존 벽화는 15세기 조선 사찰의 불화 양상과 신앙 동향을 살펴보기에 손색이 없는 유물이다. 더욱이 조선 15~16세기 불화가 대부분 일본 등 해외에 반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명작을 국내 사찰에서 온전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의미로 다가온다. 월출산 무위사 아미타삼존도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국보 제313호로 승격되었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

[불교신문3554호/2020년2월5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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