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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공감하는 바른 원칙은 깊은 뿌리를 내린다
감천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하늘마루’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비를 머금은 지붕과 외벽이 더욱 깊은 색감을 만들어 주었다.

지난 17일 지독한 미세먼지와 황사가 한반도를 엄습했다. 수도권·강원영서·충청권의 미세먼지 농도는 ‘나쁨’을 나타냈다. 부산은 전날부터 내리고 있는 비로 미세먼지와 황사의 영향권에서 비껴나 있다. 어찌하다보니 누르스름하고 뿌연 서울을 피해 피난이라도 내려온 모양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향한 곳이 부산 감천마을이다.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감정초등학교 앞으로 가자고 했다. 초등학교 건너편이 마을의 입구이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외국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3명이 택시를 타고와 내리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이들을 여기까지 이끈 풍광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이 처음으로 찾는 장소가 아마도 부산 사하구 감천2동 산복도로 일대에 자리한 감천마을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아닐까?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 보았다.

부산 관음사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단청이 되어있는 법당. 이 외의 몇 안 되는 전각들은 그 기능에 충실할 뿐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첫 도착지는 마을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하늘마루’란 이름이 붙여진 전망대다. 알록달록한 작은 성냥갑 같은 집들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바다가 마을에 닿아 보인다. 우리나라에 이런 풍광도 있었구나. 순간 서울촌놈이 되고 말았다.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은 부산은 개항 때부터 유입된 외지인들이 경사진 산지를 따라 판자촌을 이뤘다. 그 가운데 감천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시작됐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의 골격은 유지한 채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초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관음사와 담 없이 함께 있는 환희노인요양원. 사찰 내 어느 전각보다도 규모와 시설에서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한때 2만5000여명이 모여 살던 마을은 보다 나은 주거여건을 찾아 떠나면서 절반 이상의 주민이 떠나갔다. 사람이 떠나 마을은 황량하게 변해갔다. 

그러던 마을이 2009년 전환점을 맞는다.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고유의 지역성은 보존한 상태의 도시재생이 시작된다. 마을에 조형적 미술품을 설치하기도하고 빈 집을 예술창작 공간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 결과 현재는 60점 이상의 예술작품과 해마다 열리는 골목축제 여기에 다양한 문화공연과 골목길 투어 등으로 손에 꼽히는 부산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지금도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로 우로 일정한 규칙이 없이 마구 휘어져 있고 때로는 계단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햇볕을 가리지 않게 서로 비켜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길은 통해야 한다’와 ‘뒷집의 조망을 막으면 안된다.’ 이 작지만 소중한 원칙이 지켜졌기에 현재의 성공적 도시재생이 가능했다. 오래된 세계적 대도시들은 시간에 따라 노후화되고 이에 따라 끊임없이 부서지고 새로 지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때 해당 노후지역이 독특한 고유성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으면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보존의 당위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감천마을에서 찾아낸 텃밭.

발길을 돌려 도착한 곳은 같은 부산 사하구의 관음사. 이곳도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송광사 부산분원’ 이라는 말도 따라 다린다. 지리적으로는 같은 사하구에 속하고 역시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송광사 부산분원’ 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통도사와 범어사의 역할이 큰 부산에서는 외지인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묘하게 감천마을과 닮은 구석들이 있다. 

명성에 비하면 사찰은 단출하다. 현재의 관음사를 일군 지현스님은 해인사 강원과 율원을 마치고 인연 따라 1980년대 이곳으로 왔다. 도심 사찰이다 보니 어린이법회 필요성이 가장 먼저 다가와 어린이법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사찰과 연대의 필요성을 느껴 어린이지도자연합회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일들은 복지관 등으로 확산됐다. 이 모든 일에는 스님의 하나의 원칙에서 시작됐다. 요익유정(饒益有情) 즉 ‘중생에게 이익됨’이다. 중생에게 있어 이로움은 곧 행복이다. 스님이 운영하는 곳에는 ‘기쁨’ ‘환희’라는 이름이 들어간다. ‘사회복지법인 늘기쁜마을’ ‘환희복지대학’ 이런 식이다. 

비 오는 날임에도 감천마을 곳곳에는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지난해에는 관음사 사회복지법인이 어느덧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1998년 법인설립 후 노인복지사업에 집중하며 노인요양원, 노인주간보호센터, 경로당지원사업, 호스피스봉사단 등으로 성장해 나갔다. 튼튼한 뿌리에서 자란 복지시설들이 충실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3365호/2018년1월3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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