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풍수지리는 대보살이 세상 구제하고 중생 제도하는 법”

 

옥룡사지를 지나 운암사로 가는 오솔길에서 마주한 운암사 대불. 중생구제 원력을 담은 도선국사의 뜻을 되새기게 하는 사찰이다.

사람 위하고 공동체 행복염원
도선의 풍수사상 유교가 변질

國師 35년 주석했던 옥룡사
어머니 모시려 창건한 운암사
사람들 위해 동백숲도 조성

전남 광양은 도선국사의 고장이다.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출신으로 광양 백계산에 옥룡사를 지어 35년을 주석하고 이곳에서 입적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옥룡사 옆에 운암사를 지었다. 도선은 원효 의상과 더불어 천년이 훌쩍 넘은 현재 가장 많이 호출되는 고승이다. 이 땅 어디를 가든 도선국사와 연관 없는 사찰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도선은 풍수지리를 도입한 풍수꾼 정도로 취급받는다. 도선국사가 잘못 알려진 것은 풍수사상이 원래 의미에서 변질됐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풍수의 본래 의미를 되찾을 때 도선국사의 진면목도 드러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역할은 지대하다. 

잘못 알려진 도선국사 진면목

지난 4월19일 전남 광양 백운산과 백계산 일원 도선국사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광양 시내를 벗어나자 온통 도선 이야기다. 그 정점은 도선마을이다. 백운산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도선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어 안으로 들어갔다. 왜 ‘도선마을’인지 이유가 궁금했다. 마을을 소개하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선덕을 베풀기 위해 집집마다 참배나무를 심었는데 그중 한 그루가 남아있어 국사 마을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 배를 ‘일매배’로 부르며 제사 등 중요한 날만 올리는 진귀한 과일이라고 한다. 풍수터가 좋고 훌륭한 약수가 있다는 소개도 덧붙였다. 

도선국사 마을로 지정할 충분한 근거와 역사 그리고 스토리를 지닌 마을이다. 그러나 도선국사 마을에서 소개하는 체험 프로그램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밤을 굽고 고구마를 구워먹는 농촌테마체험, 온돌방체험, 손두부. 광양매실, 천연염색, 고로쇠 된장 만들기 맛보기 등이 도선국사를 기리는 마을에서 하는 행사다. 

마을을 탓할 일이 아니다. 관심을 두지 않은 불교계 잘못이다. 마을과 지자체가 나서 불교 고승을 선양하는 것을 넘어 마을이름까지 지었으면 그들로서는 도선국사를 최대한 예우한 셈이다. 사찰이나 종단이 그 내용을 채우고 이들과 함께 했다면 국사(國師)가 농촌체험으로 수익을 얻는 도구로만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옥룡사지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도선스님 없는 도선국사 마을

마을서 30여분 걸어 내려오면 옥룡사지다.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꽃이 군락을 이루는 전국 최대의 동백서식지다. 어른 키보다 큰 동백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올라가면 옥룡사지가 나온다. 입구 넓은 주차장에는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가 서있고 절터에는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로 북적였다. 옥룡사지 주변 동백은 2000여평에 7000그루 가량 된다.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보호수를 심었다고 한다. 5~6m에 이를 정도로 크고 수백년 수령을 자랑한다. 3월 초순에 꽃을 피워 3월말 절정을 이룬다. 사지에 연못 모양이 남아있다. 옥룡사를 창건하려 백룡과 청룡이 살던 연못을 메우기 위해 활을 쏘았다. 청룡은 등천했으나 백룡은 버티다 국사가 쏜 화살에 한 쪽 눈을 맞고 나서야 물러났다. 옥룡사를 대찰로 키운 뒤 후학들에게 백씨 성을 가진 승려를 절에 들이지 말라고 일렀는데 활을 맞은 백룡이 승려로 변해 꾸민 짓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옥룡사를 나와 언덕을 넘어가면 최근에 조성한 듯한 큰 부도탑 2기가 나온다. 일제 때 완전 파손된 도선국사와 제자 경보스님의 부도탑과 탑비를 광양시가 최근 새로 복원했다. 도선국사 부도가 맞는지 확인은 되지 않았다. 

도선국사와 제자의 부도 

부도와 아래 오솔길 주변도 온통 동백 숲이다. 그 가운데 우뚝선 대불(大佛)이 눈길을 끌었다. 효성이 깊던 도선국사가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는 운암사다. 대불과 더불어 여러 전각이 있는 대찰(大刹)이다. 화엄사 도광스님 제자로 여수 영구암을 중창한 종견스님이 중창했다. 원래 옥룡사를 중창하려 했지만 시 소유지가 많아 포기하고 운암사를 중창했다. 운암사가 있어 옥룡사지에서 느낀 허전함을 달래고 도선국사에게도 면목이 서는 기분이다. 

서기 827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道詵, 827˜898년)국사는 15세에 출가하여 지리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20세 무렵 동리산 태안사 혜철스님에게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운봉산 태백산 등지서 정진하다 37세 무렵 광양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러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하며 35년간 주석하다 입적했다. 그래서 ‘옥룡자’ 혹은 ‘도승(道乘)’으로 불렸다. 

신라 헌강왕(875˜885년 재위)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해 왕궁에 초빙했는데, 둘은 초면인데도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72세에 “내가 이제 가야겠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니 무엇하러 더 여기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 뒤 입적했다. 

효공왕(898˜912년 재위)은 도선의 입적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시호를 요공(了空),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으로 봉하였다. 훗날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숙종은 왕사(王師)로 추증했으며, 인종(1123˜1146년 재위)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봉했다. 제자에는 경보(868˜948년), 형균, 민언, 지효, 지연 등 전하는 이름만 수십여 명에 이른다. 

도선은 풍수사상을 전파한 인물로 현재 원효 의상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대중화된 스님이다. 한국인의 풍수 사랑이 도선의 명성을 천년 넘게 유지시켰다. 한국인에게 풍수는 생활이며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한 한국인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편향’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근거와 명분이 분명한데도 불교라면 거부감을 일으키는 공무원과 기독교 단체장이 발벗고 나서서 도선을 기리고 심지어 부도까지 세우는 ‘이상 현상’ 역시 도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덤 자리를 택일하고 이사나 결혼 날짜 등 택일(擇日),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점술이 풍수가 아니다. 왜곡된 풍수가 잘못된 도선신화를 만들었다. 

도선과 풍수사상이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 의식 저변에까지 깊이 자리잡게 된 계기는 고려가 불교와 풍수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다. 태조가 통치이념과 기준으로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가 그 시작이다. 훈요십조 제1조와 제2조는 고려의 국가운영 방침이 불교와 도선의 풍수지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제1조는 고려 왕조가 제불보살의 호위를 힘입어 창업했기 때문에 여러 사원을 창건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다. 그 구체적 방침은 ‘도선(道詵)의 풍수지리법(風水地理法)으로 사원 설립지를 정하라’는 제2조에 담겨 있다. 

 

도선국사가 조성한 동백숲.

풍수사상 국가 통치 원리 삼은 고려

풍수지리를 사원 건립 원칙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왕건은 신라의 멸망이 사원의 무분별한 건립으로 인한 재정 낭비와 민심 이반에서 찾았다. 그래서 불교를 숭상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되 절제되고 조화로운 사찰 건립을 후대 왕에게 지시한 것이다. 

풍수지리법의 사원 건립 이념이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다. 지세를 살펴서 부족하고 어긋나는 곳(欠背處)에 사찰이나 부도탑을 세워 지덕을 보충한다는 이론이 비보사탑설다. 도선은 이렇게 일렀다. “우리나라의 지형지국은 배가 항해하는 형태로 태백산과 금강산은 배의 머리, 영암 월출산과 영주산은 배의 꼬리, 부안의 변산은 배의 키, 지리산은 배의 노, 능주(현 화순)의 운주는 배의 복부에 해당한다” 그래서 운주에 운주사를 짓고 천불천탑을 봉안하여 지국을 눌러야 나라가 안정되어 편안하다고 주장했다. 

‘비보사탑설’은 좋은 곳만 찾고 차지하려는 세간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불교적 개념이다. 개인의 안락과 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터를 찾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전체의 이익에서 보면 이는 공멸(公滅)의 길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뛰어난 자질을 지녔으면 굳이 돕지 않아도 제 역할을 알아서 충실히 한다. 도움이 필요한 곳은 부족한 지역과 사람이다. 

도선의 비보사찰은 그런 점에서 전체의 조화 속에 부족하고 못난 곳을 보완하는 불교적 국토운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도선국사는 흉하고 화가 미칠 여지가 있는, 부족하고 덜 찬 곳에 사찰을 짓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를 보완하는 것이 왕조의 번성을 가져온다고 주창했다. 

도선의 풍수사상은 호국(護國)에 바탕을 두었다. 반드시 필요한 곳, 도움을 받아야할 못나고 부족한 곳,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강조한 풍수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였다. 그래서 훈요십조의 결말도 ‘백성을 위한 정치’였다. 

도선국사와 풍수사상이 천년을 넘어 사랑을 받는 것은 풍수가 이 땅의 민중들이 숭상하고 받드는 국토신앙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풍수사상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이 땅은 거의 본능적으로 풍수에 입각해서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다. 풍수라는 정형화된 사상으로 정립하지는 않았지만 산악이 많았던 이 땅의 사람들은 산을 중시하고 그 지세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통일신라 시대에 풍미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불국토신앙, 이 땅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정토라는 개념도 전통신앙과 결합한 한국적 불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광양시가 조성한 도선국사 부도와 탑비.

전체 조화 화합 중시한 풍수

전체의 조화와 어울림을 강조했던 풍수신앙은 조선시대 들어 유교와 결합하면서 변질됐다. 유학자들은 풍수를 가문의 번성을 위한 수단, 기껏 조상 무덤 쓰는데 악착같이 매달렸다. 문종 1년 (1451) 부사정(副司正) 정안종(鄭安宗)이 왕에게 이렇게 상언(上言)했다. 

“양진· 비보하여 화기(和氣)를 순합(順合)함은 옛 신선(神仙)이 남긴 자취인데, 지금에 있어서는 풍수라는 것이 오직 무덤을 앉히고 집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을 뿐이고, 산천의 국맥(國脈)을 양진·비보하는 술법으로 쓰임을 듣지 못하니, 이는 성명(聖明)의 시대에 있어서의 흠결이 아니겠습니까?” 유학이 망가뜨린 풍수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도선국사에게 풍수지리를 전했다는 ‘이인(異人)’은 이 사상이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라고 했다. 풍수학의 대가 최창조 교수는 “풍수사상은 공동체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됐다. 스님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권선징악의 실천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땅보다 사람을 중시하며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상을 갖고 있다”고 정의했다. 

도선국사의 중생제도 염원에서 나온 풍수지리의 본래 뜻을 오늘날 불교계가 살려야 한다. 유학이 왜곡한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멀리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도선국사를 함부로 규정하고 장사 속으로 다루는 이들을 방치해서도 안된다. 백운산과 백계산에서 만난 도선국사가 전해주는 깨달음이다. 

 

도선국사 마을에 그려진 벽화.

[불교신문3490호/2019년5월2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