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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2~3세기 미륵신앙 활발
중국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래
사바에서 중생 구제하는 하생
도솔천 나투는 상생신앙 유행

미륵정토변상도 비롯해 하생도
내영도 등 세 가지 형식 구분
고려 하생경변상도 2점 전해

1294년에 조성된 일본 묘만지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 현재 교토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舍圍城) 제타숲에 계실 때 아난존자가 미륵불이 다스리는 세계에 대하여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미래에 이 땅에 계두성이라는 성이 있을 것인데 땅이 기름지고 백성들이 번성할 곳이다. 그때가 되면 계두성 뿐 만 아니라 온 지구상에 곡식이 풍성하고 백성들이 번성할 것이다. 사람들은 질병이 없고 장수하며 한 마음 한뜻으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 평등하여 차별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욕심이 없어 보석이 지천으로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계두성의 상카왕은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세계를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인데, 그는 엄청난 보물창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준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질병이 없으며 서로 사랑하며 평등이 없는 세계. 이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세계가 아닐까. 사회가 불안하고 나라가 혼란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지상낙원을 꿈꾸게 되며, 이러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이자 미래불로 신앙되던 부처가 곧 미륵(彌勒, Maitreya)이다. 

미륵은 범어 마이트레야(Maiteya)를 음(音)으로 표기한 것이며, 한역으로는 자씨(慈氏), ‘자존(慈尊)’이라고 한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던 중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Tusita)에 머물며 진리의 법문을 설하다가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에 걸쳐 설법하여 석가모니가 못다 제도한 중생들을 성불시킨다고 한다. 

미륵에 대한 신앙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 인도 시크리에서 2세기 후기의 미륵상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인도에서는 2~3세기경 미륵신앙이 꽤 활발하였던 것 같다. 4세기에 이르러 축법호(竺法護)가 <불설미륵하생경(佛說彌勒下生經)>을 한역한 이후 미륵신앙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고, 삼국시대부터 미륵은 열렬히 신앙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이라는 종파가 성립되었으며, 미륵은 불교조각과 회화로도 널리 조성되었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서 태어나기를 원하는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과 미륵불이 사바세계로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의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상생신앙의 유행으로 미륵보살반가사유(彌勒菩薩半跏思惟)의 도상이,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미륵하생신앙이 유행하면서 미륵하생과 미륵설법의 도상이 유행하였다. 

이와 함께 미륵불을 그린 불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미륵불화는 크게 미륵정토변상(彌勒淨土變相)과 미륵하생도(彌勒下生圖), 미륵내영도(彌勒來迎圖)의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미륵정토변상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 미륵천궁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미륵보살은 보통 보관에 탑을 묘사하거나 손에 탑을 가지며, 손에 든 연꽃에 탑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아있는 작품이 없으나 돈황석굴에는 다수의 미륵정토도가 남아있다. 미륵하생경변상도는 <미륵하생경>에 의거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미륵내영도는 아미타내영도와 거의 유사하다. 보통 보관을 쓴 미륵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고 주위로 보살들과 성중(聖衆),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미륵정토 수행자가 작게 배치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정토변상도와 미륵내영도는 거의 조성되지 않았으며, 고려시대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가 2점 남아있다.

미륵하생경변상도 중 전륜성왕의 삭발하는 장면.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미륵하생경변상도이다. 현재 일본 묘만지(妙滿寺), 지은원(知恩院)과 친왕원(親王院) 등이 각각 1점씩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화면의 구성요소와 배치는 물론 그림의 크기까지도 비슷하여 동일한 초본을 바탕으로 하여 그려진 것 같다. 다만 묘만지본에서는 하단에 미륵정토로 왕생하는 사람들을 태운 반야용선이 그려져 있어 미륵정토를 희구했던 고려인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림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미륵불의 설법장면, 하단에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해하였다. 즉 화면을 크게 2등분해 윗부분에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하여 설법하는 장면을 그렸다. 아래에는 미륵하생지로 알려진 계두성(翅頭末城)의 여러 모습을 묘사했다. 상부의 중앙에는 미륵불이 협시보살을 비롯한 권속들에게 둘러싸여 앉아있는데, 미륵불은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주위에는 제석천과 범천, 10대 제자, 12신장들이 좌우에서 본존을 협시하고 있다. 미륵불의 머리 위로는 미륵이 성불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도솔천궁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모습과 주악천녀, 5구의 부처가 그려져 있다. 미륵불의 아래에는 전륜성왕과 왕비가 미륵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여 꿇어앉아 삭발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미륵이 하생한 계두성의 모습과 말, 코끼리가 끄는 보배(寶輩), 전륜성왕 및 여러 대신들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 제일 아래 부분에는 향로가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귀인(貴人)과 시녀가 둘러서 있다. 그 좌우로는 농부가 밭갈이하는 장면, 벼를 베고 도리깨로 타작하고 낱알을 주어 담는 모습 등 추수장면이 있다. 미륵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장자(長者)가 바위 굴 속에 앉아있는 장면, 금은보화를 쓸어 담는 장면 등을 그렸다. 이러한 장면들은 아마도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 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하며, 칠보(七寶)가 널려져 있다는”는 미륵정토의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상은 중국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 제33굴, 148굴, 208굴, 361굴, 445굴, 안서유림굴(安西柳林窟) 제25굴 등의 미륵하생경변상도에서도 볼 수 있어 두 그림간의 공통점을 엿보게 한다. 

1692년 조성된 금당사 미륵괘불도.

1350년에 제작된 일본 친왕원소장본의 좌측 아래 모서리에는 주지(朱地)에 금니(金泥)로 명문이 적혀있다. 1350년 현철(玄哲)을 발원자로 해 따로 23인의 뜻을 모아 시주와 함께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에 의해 여러 중생을 제도하려 했다는 내용과 회전(悔前)이라는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다. 곧 이 그림은 미륵불이 하생해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는 용화삼회에 참석하기를 바라며 현철 등이 중심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조성한 미륵하생경변상도로서, 당시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결사(信仰結社)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고려후기 민간에서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향목을 해변에 묻어두는 매향(埋香)풍습과 더불어 미륵하생신앙의 유행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대전란이 빈번했던 조선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미래에 오실 미륵부처에 대한 신앙이 간절하였을 것이다. 사찰에는 미륵전이나 용화전을 만들어 미륵부처를 봉안했으며, 큰 법회가 있는 날이면 멀리서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미륵괘불도를 내다 걸고 평화로운 세상, 미륵정토를 갈구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금당사 미륵괘불도이다. 이 괘불도는 1692년에 그려진 것으로 13폭의 삼베를 이어 붙인 높이 8.70m 폭 4.74m의 화면에 보관을 쓰고 꽃을 든 미륵부처를 단독으로 그렸다. 미륵부처는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에는 중앙의 아래·위 2단으로 7구씩 총 14구의 화신(化神) 보살을 그리고 그 좌우에 2마리씩 총 4마리의 봉황으로 장식하였다. 보관에 화신 보살과 봉황을 표현한 것은 부여 무량사 괘불(1627년)에서도 볼 수 있는데, 미륵경전에 기술된 내용과 일치하고 있어 본존이 미륵불임을 알 수 있다.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 좌우로 치켜 올라간 눈과 굳게 다문 작은 입 등에서 부처의 위엄이 그대로 느껴진다. 

언젠가 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들을 구원할 미래불 미륵부처에 대한 믿음은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들의 바람은 미륵이 다스리는 정토와 미륵이 하생한 사바세계에 대한 모습으로 가시화됐으니, 이것이 곧 미륵불화가 아닐까. 

[불교신문3391호/2018년5월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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