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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사찰 입구에는 어김없이 찻집이 있다. 통도사 송광사 해인사 등 대다수 사찰의 언저리에는 차를 사고, 마시면서 다기를 구입할 수 있는 다실이 여럿 있다. 이같은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있었다. 고려시대 ‘다촌(茶村)’이 그것이다. 석용운 스님이 지은 <한국차문화강좌>에 따르면 다촌은 고려 광종과 성종 연간에 만들어졌다. 사원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마을을 일컫는다. 당시 사찰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또 음다를 즐기는 불교도들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양산 통도사가 다촌으로 유명하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당에서 모셔온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금강계단을 만든 불보사찰이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통도사의 북쪽 동을산에 있는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곳이다. 차 부뚜막과 차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후세인들이 다소촌이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사찰의 가람배치도에도 다당(茶堂)이 있었다.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는 <한국의 차문화사>를 통해 “선종예법에 다례에 사다(謝茶)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차야말로 사원에서는 다반사가 아닐 수 없었다”며 “이런 중에도 구승들이 송의 명차들을 왕실이나 신도들에게 공양받는 일이 많았고, 그 일부는 문인들에게까지 보내준 일도 잦았다. 지금까지 남은 많은 다시(茶詩) 중에 스님께 차를 받거나 보낸 것에 대한 작품이 많은 것도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광종때부터 사찰 앞 茶村 유행

가람에도 茶堂 배치해 차 즐겨


고려시대에는 단차(團茶), 말차(抹茶), 잎차가 두루 이용됐다. 고려인들은 소님에게 차를 대접할 대 대면한 자리에서 달이지 않고 뜰이나 다른 장소에서 다린 후 찻잔에 담아 내왔고, 손님은 주인이 권해야 비로소 차를 마시는 것이 예정이었다고 한다. 왕실에서는 광종때부터 공덕재(功德齋)에 공양할 차를 왕이 손수 올리는 풍속이 생겨났고,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왕이 납원차 또는 대차를 내렸다.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펴낸 <다도의범>에 따르면 고려 초기의 문장가로 유명한 최승로(927~989)는 성종에게 차와 관련한 지나친 폐단을 중지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내용을 보면, “폐하께서 공덕을 쌓기 위해 차와 보리를 갈아 불공에 정성을 다한다고 들었사온데, 이는 지나친 일로서 성체를 해칠까 두려울 뿐입니다. 이처럼 공덕을 쌓기 위해 재를 올리는 일은 광종 때부터 비롯된 일로, 불교의 가르침인 인과응보를 그대로 믿는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아뢰옵니다”라고 했다. 즉 왕이 부처님에게 올리기 위한 말차를 몸소 만들어 공양하는 행위가 지나친 것임을 상소하는 기록이다. 당시 조정과 민간에서 차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는 사료다.

<고려사>의 권64에 따르면 성종은 차와 관련 상소를 올린 최승로를 비롯 나라에 공이 컸던 최지몽 최량이 사망하자 부의품으로 뇌원차 200각과 대차 10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의 차가 사찰과 왕실 귀족 등의 지배층에 널리 유행해서 수행이나 제의 의례는 물론이고 일반적 접대의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불교신문 2460호/ 9월17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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