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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심이 일구어낸 ‘화산 속 한 송이 연꽃’


“앞으로 보면 옛 탑이 죽순 돋아나듯 하고
뒤를 보면 산봉우리가 연꽃이 떠 있는 것 같다”
고산 윤선도가 자랑한 ‘천하의 명당’ 용주사
홍살문과 삼문, 행랑채, 천보루…왕궁 느낌

“보통 사람들이 천지의 귀신을 섬기는 것은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만 못하니
어버이가 가장 높은 신이다” - <사십이장경〉
보물 1942호 용주사 대웅보전.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 이덕무가 경내의 많은 주련을 썼으나, 대웅보전에도 당시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

 

화성 용주사를 ‘효(孝)의 본찰(本刹)’이라고 말하는 것은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는 극락왕생을 천년동안 기원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신라 때 ‘갈양사’로 창건된 용주사는 고려 광종 때 처음으로 수륙도량을 개설하였으며, 조선 정조는 절 이름을 지금의 ‘용주사’로 바꿔 사도세자가 극락에 태어나고, 혜경궁 홍씨의 수명장수를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엔 49재 천도의식에 크나큰 감명을 받은 조지훈이 아름다운 시 ‘승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정조는 을묘년(1795) 유교국가의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花山龍珠寺 奉佛祈福偈)〉라는 게송을 직접 지어 부처님과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코자했다. “소자가 8만4000 가지 불경의 뜻과 가르침을 베껴 삼가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게송을 지었습니다. 몸(身)으로는 지성으로 부처님께 예경하고, 말(口)로는 칭찬하고 찬미하며, 바른 뜻(意)으로는 생각하고 기억함으로써 부모께서 양육해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을 닦으려 합니다”라고 했다. 또한 정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을 병진년(1796)에 제작, 용주사에 하사하여 모든 백성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알게 했다.

 

왕실축원문. 붉은 물감으로 덧칠하고 다시 은으로 “주상전하수만세, 자궁저하수만세, 왕비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만세”로 고쳐 썼다.

 

정조 효심이 만들어낸 ‘왕궁구조’


용주사는 타 사찰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공간구조를 지니고 있다. 1790년 2월에 시작하여 9월에 완공한 145칸의 용주사 건물은 왕궁과 같은 구조로 만들었는데, 비명횡사한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연꽃과 같은 궁궐을 지어 바치고자 했던 자식의 마음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좌의정 채제공은 용주사 상량문에서 “앞으로 보면 옛 탑이 죽순 돋아나듯 하고 뒤를 보면 산봉우리가 연꽃이 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산 윤선도가 천하의 명당이라 자랑한 화산 속에 한 송이 연꽃이 용주사이다. 홍살문과 삼문, 행랑채, 천보루는 왕궁의 느낌을 준다.


특히 팔작지붕의 천보루(天保樓)는 돌기둥의 강건함과 더불어 정조가 평소 즐기던 <시경> ‘소아’의 ‘천보(天保)’를 누각의 앞면 편액으로 사용해서 용주사의 사격을 사도세자의 왕궁으로 재탄생 시켰다. ‘천보’ 시에는 현재의 임금이 선왕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니 신령이 만수무강을 약속해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한편, 신하들에게 그러한 자신을 따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천보루 옆 동서쪽으로 이어진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안쪽에 정원(庭園)이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주로 승방과 선방 등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한편 정조의 현륭원 원행(園幸)에 대비한 공간으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보루.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용주사 대웅보전은 왕궁의 정전(正殿)처럼 화려하고 위풍당당하다. 대웅보전은 석축을 쌓아 그 위에 건물을 올림으로써 용이 서린 것 같고, 초석은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내부 단청은 삼태극이나 용, 쌍학, 국화, 모란, 석류 등으로 장식하여 궁궐의 형식을 따랐다. 이뿐만 아니라 국왕이 직접 절 이름을 짓고 주련을 지어준 사찰은 오직 화산 용주사가 유일하다. 정조는 이덕무로 하여금 8개 전각에 2구(句)씩 주련 16구를 지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왕실의 안녕을 빌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련 일부만 걸려 있고 대웅보전에는 이덕무가 쓴 옛 주련의 송판에 다른 내용의 주련을 걸려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축원문은 왜 고쳐 썼을까?


정조의 국운왕성과 아버지 극락왕생, 어머니 만수무강을 바라는 지극한 효심이 위대한 예술품으로 승화된 것이 바로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세여래불화이다. 정조는 1790년 2월 북경에서 돌아온 김홍도를 감동관으로 발탁하여 궁중화원 이명기, 김득신과 더불어 민관, 상겸, 성윤 등 25명의 스님과 함께 살아계신 부처님을 그리는 일을 처음 시도했다. 이렇게 탄생된 불화가 용주사 삼세여래불화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동쪽에 약사여래를, 서쪽에 아미타불을 모셨다.


용주사 삼세불화에는 누가 그렸다는 화기(畵記)가 없는데, 만약 화기를 적었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부처님이 아니고 누군가 그려 점안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대좌 밑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문(祝願文)만 살짝 넣어두어 살아계신 부처님께서 항상 보살펴 주십사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처음 쓴 축원문은 먹으로 “주상전하수만세, 왕비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만세”를 써 넣었는데, 이 축원문을 본 정조는 어머니에 대한 축원이 없는 것을 알고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고, 그 바람에 축원문 위를 붉은 물감으로 덧칠하고 다시 은으로 “주상전하수만세, 자궁저하수만세, 왕비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만세”로 고쳐 썼다. 사진으로 보이는 검은 글씨가 처음 쓴 축원문이고 흰 글씨가 다시 고쳐 쓴 축원문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보다 임금 다음에 두어 파격적인 효심을 부처님께 아뢰었었다.

삼세불화(부분 확대). 가로 350㎝ 세로 44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대웅보전 삼존상에 있는 탱화다. 1790년 용주사 창건당시 만들어졌다.

 

용주사 삼세여래불화는 이음새가 없는 특수 제작된 가로 3.50m, 세로 4.40m로 1폭의 비단으로 만들어져 놀랍다. 어떻게 이런 비단을 짤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효심이 만들어낸 결과로 불가사의 하다. 특히 삼세불의 얼굴엔 광대뼈가 나오고 콧날이 오뚝하며 가슴은 팽팽하여 부처님이 숨을 쉬니 입주변의 수염이 움직이는 듯 풍부한 표정과 외곽의 명암에 의해 살아계신 삼세여래가 실제로 용주사에 나타난 듯하다. 상현 이능화는 1918년 무렵 이 불화를 보고 “그 모습이 아름답고 정교하여 그의 기이함이 신의 경지에 닿았다. 지금도 역시 그대로 남아있다”고 김홍도를 극찬을 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미술사학자들은 일제강점기 때 서양화법으로 그렸다고 우겨 그 우매함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예술의 세계가 그러하듯 절실함과 간절함이 극에 달하면 그땐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예술품으로 극찬한다. 용주사의 삼세여래불화는 살아계신 부처님을 이곳에 꼭 모셔야 하는 정조의 효심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불후의 명작이다.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을 상징하는 불상.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부처님


또한 용주사 효행박물관에는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을 상징하는 20세기 초로 추정되는 형상불이 있어 이채롭다. 쪽진 뒷머리에 옷고름은 뒤로 젖히고 자식을 무릎 위에 앉혀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살짝 나온 젖가슴은 풍만하여 자식을 튼튼하게 기르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손은 크고 귀는 길며, 머리 위 정수리는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소라 모양으로 뾰쪽하여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이 표현되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부처님이라는 불교적 의미를 특별히 강조한 유포양육 부처님이다. <사십이장경>에서 “보통 사람들이 천지의 귀신을 섬기는 것은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만 못하니, 어버이가 가장 높은 신이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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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3671호/2021년6월2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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