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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철불, 正法이 진리임을 보이다

명성황후와 고종 사로잡은
巫女 진령군이 세운 암자

조선 지배하던 성리학 대신
왕조 떠받쳤던 무속도 가고
佛法만 남아 영원히 빛나

 

관운장 신앙이 풍미했던 구한말 무녀와 명성황후의 인연이 서린 빌미산 충주 백운암 전경.

충청북도 충주 백운암은 작은 암자다. 지방 국도도 아닌 지방도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 속에 자리했다. 전각은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가 전부다. 뒷산도 작고 낯선 이름이다. 빌미산. 아무리 찾아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백운암은 작지만 품고 있는 역사는 예사롭지 않다. 

충주 빌미산 백운암

지난 9월25일 백운암을 찾아가는 길은 황금색 물결로 넘실거렸다. 지나가는 차 마저 드문 한적한 길 양 옆 논은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빨갛게 익은 사과가 따가운 햇볕을 즐기는 한가로운 농촌이었다. 서양식 저택을 돌아 산 위로 2km 가량 올랐을까? 축대가 나타난다. 작은 계단을 올라가자 암자가 반긴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주지 스님이 거주하는 듯한 요사채가 있고 왼쪽 계단 위가 삼성각이다. 대웅전은 일자형인데 법당에 딸린 작은 문은 별채처럼 안으로 들어간 모습이 특이하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불상이 반긴다. 

정식 명칭이 충주백운암철조여래좌상(忠州 白雲庵 鐵造如來坐像)이다. 지난 2007년 보물 제1527호로 지정된 의미 깊은 불상이다. 충주는 철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철불상이 이 지역에 많다.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을 포함하여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을 충주 3대 철불이라고 한다.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높이 87cm로 크지 않다. 전문가들은 통일 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한 이목구비 표현이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 잘 드러난 수작으로 평가한다. 
 

 

백운암 보물 철불.

보물 철조여래좌상 눈길 

이 불상은 백운암 불상이 아니고 원래는 이 절 인근에 있었던 고려시대 사찰 억정사지(億政寺址) 불상으로 추정한다. 백운암 아래 지금은 논과 과수원 자연부락이 조성된 곳이 억정사터다.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의 억정사지에는 과거 대찰이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보물 제16호 대지국사(大智國師)비만 남아있다.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태고 보우국사를 스승으로 출가한 대지국사의 법호는 목암(木庵), 법명은 찬영(粲英)이다. 

참선수행에 매진했던 스님을 일러 공민왕은 ‘벽안(碧眼) 달마’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했다. 우왕이 왕사로 봉하고 충주 억정사에 머물도록 해 62세 열반까지 머물렀다. 억정사지 비문에 따르면 스님은 “얼굴은 근엄하지만 말씀은 온화하였고, 입으로는 남의 잘하고 잘못하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기껍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저지른 지나간 잘못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일지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지 않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잘하는 것만 말하였다”고 묘사한다.

억정사지에서 나온 철불

그런데 이 곳 억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철불이 백운암으로 갔다. 백운암으로 간 연유가 있다. 조선 후기 왕실 무녀 진령군(眞靈君) 여대감(女大監) 박창렬과 명성황후가 인연의 주인공이다. 그 이면에는 19세기 몰락하는 봉건왕조의 운명과 관련 있다. 시작은 임오군란이었다.

1882년 임오(壬午)년 홀대를 받던 구식군대가 군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가 민씨 일파를 비롯해 관리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인은 강화도 조약 이후 고종이 주도하는 개혁개방과 이로 인한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대우였다. 궁을 빠져나온 황후는 장호원까지 피난 간다. 

황후는 피난 길에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과 폭도들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 하루 하루 지옥 같은 날을 보내야 했다. 불안감을 못이긴 민비는 무속에 기댄다. 궁에서 나올 때 서울 집에 숨겨주고 충주까지 피난길을 호송했던 측근 민응식이 한 무당을 데려와 황후의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억정사에 머물렀던 대지국사비.

관운장을 몸주로 모신다는 무당은 자신과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라며 예언했는데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황후는 환궁하며 그녀에게 진령군 군봉을 내렸다. 조선을 통털어 여자가 당호(堂號)를 받지 않고 군호(君號)를 받은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게다가 무당은 7종 천민 계급이었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깊이 믿고 의지했는데 두 사람은 날로 친숙하게 되었고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황후는 진령군을 언니라고 불렀다. 황후의 언니이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매천야록’은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禍福)이 걸려 수령과 변장(邊將, 지방의 군사지휘관)의 자리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고관대작들이 아부해 수양아들로 삼아달라고 보채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국민이 주인이고, 대통령의 숨소리까지 전달되는 언로가 활발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무녀라고 추정하는 최순실이 대통령을 언니라 부르며 국정을 농단했다. 그에 빌붙어 한 자리 하려는 정치인 관료가 줄을 서고, 대통령을 모셔야할 비서가 하수인을 자처했다. 그의 존재와 만행을 낱낱이 아는 자들은 제 한 몸 지키느라 혹은 그 역시 대열에 열심히 참여하느라 입을 닫았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무녀가 아니라 권력의 향배를 좇는 간신배들이다. 

그나마 진령군은 관운장 신앙으로 조선과 왕실을 수호하려 한 목적이 있었다. 관운장 신앙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당시다. 중국 한나라 말기 중원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유비의 부하 장수 관우는 중국 명나라에서 무신(武神)으로 추앙받았다. 몽골 여진 거란 등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던 중국 한족은 위 촉 오 세 나라 중 한족의 발원지를 근거지로 삼았던 유비의 촉에 정통성을 두었다.
 

 

백운암 현판. 퇴경 권상로 선생의 글씨다.

명나라 시대 ‘삼국지연의’가 출간되고 유행한 배경이다. 유비 관우 장비 중 무예에 출중했던 관우가 신으로 모셔지고 사당이 대대적으로 건립됐다. 명은 조선도 관우를 모실 것을 종용해 황제가 직접 건립 비용을 보냈다. 서울 동대문 밖 동묘가 그것이다. 서울 남쪽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장수가 관왕묘를 건립했다. 

그러나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선은 처음에는 관운장 신앙을 탐탁치 않게 여기다가 숙종대에 이르러 대응이 달라졌다. 이후 영정조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면 왕실 차원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관운장 신앙을 받들었다. 관우를 신으로 받아들인 진령군이 왕실 총애를 받으며 실세로 등극한데는 이러한 종교적 배경도 감안해야한다. 

진령군은 황실을 보호하고 관왕의 충의를 권장한다는 명분 아래 1883년 지금의 명륜동 성균관대 부근에 북묘를 세웠다. 진령군이 세운 북묘는 송시열 집 아래 흥덕사라는 절터였다. 

송시열이 누구인가? 임진란으로 왕실 권위가 땅에 처박힌 뒤 실질적으로 조선을 이끌었던 성리학의 대부다. 17세기 이후 조선은 말이 왕조이지 사실은 성리학자 관료들 세상이었다. 그 절정이 60여년에 걸친 세도정치다. 무려 300여년에 걸쳐 성리학 등쌀에 시달렸으니 대부 격인 송시열의 집 근처에 관운장 사당을 모신 연유를 짐작할 만하다. 

송시열 집 뒤 암벽에 새긴 증주벽립(曾朱壁立), 성리학을 완성한 증자와 주자를 잇는다는 송시열의 뜻은 무녀에 의해 짓밟히고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고 하면 과장일 까? 고종과 황후는 열심히 북묘를 찾아 치성을 드렸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궁에서 도망쳐 나온 고종과 황후가 몸을 숨겨 목숨을 건진 곳도 북묘다. 관운장과 무녀가 나라는 못 지켰지만 잠깐이지만 왕실은 보호했다. 

왕실 사로잡은 관운장

진령군의 위세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친일내각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그녀는 궁에서 쫓겨나 겨우 몸만 유지하다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당하자 그 충격으로 절명했다는 소문만 떠돌 뿐 최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진령군의 위세는 끝났지만 관운장 신앙은 잦아들지 않았다. 명성황후 뒤를 이어 고종의 비로 등극한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서대문 근처에 관운장 사당 서묘를 지었다. 순헌황귀비 역시 현령군이라는 윤씨 성을 가진 무녀의 권유로 사당을 세웠으니 무속의 힘이 이토록 무섭다. 

관운장 신앙은 전국으로 퍼져 민간에 까지 스며들었다. 관운장 신이 내렸다며 사당을 세우는 무당이 거듭 나오고 이를 떠받드는 종교인들이 생겼다. 일반인도 단체를 만들어 사당을 보호하는 등 조선은 관운장으로 들썩였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찰 신중단에는 긴 창을 들고 흰 수염을 펄럭이며 적토마를 탄 관운장이 등장했다. 

진령군이 아직 궁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며 관운장 신앙을 퍼뜨리던 1886년 꿈을 꾸었다. 꿈에 백의철불이 나타나 흙속에 묻혀 있다며 새롭게 안치해달라고 현몽했다. 무녀는 꿈에 나타난 곳으로 찾아가 버려져 있던 불상을 모시고 꿈에서 본대로 백불을 모셨다. 

억정사가 폐찰되면서 땅에 묻혀있던 불상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뒤를 이어 고종의 비가 된 순헌황귀비 역시 미륵불이 하천에 방치돼 있는 꿈을 꾸고 그곳을 찾아 불상을 찾아 절을 지었으니 그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철불이 본래 있었던 억정사지.

북묘 허물고 불교대학이… 

맹위를 떨치던 관운장 신앙도 조선이 기울며 막을 내린다. 외교 군사권을 빼앗기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1908년 관왕묘 제사 철폐령에 따라 북묘와 서묘는 철폐돼 관성제군 화상은 동묘로 합사된다. 

그런데 1930년 북묘 자리에 불교종립대학 동국대학교 전신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들어섰다. 성리학의 대부 가옥이 무속의 사당으로 바뀌고 그 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불교학교가 들어섰다. 무속인이 세운 백운암은 정법을 받드는 조계종 소속 암자로 지역 불자들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었다. 

충주=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28호/2019년10월23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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