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남양주 봉선사

백송김실근 2022. 12. 13. 08:00

깊어가는 가을 더 늦기 전에 춘원과 봉선사를 …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춘원의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되는 남양주 봉선사의 큰법당. 커다란 한글 편액 ‘큰법당’에서 불경의 한글화에 크게 이바지한 운허·월운스님의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내부 벽에서는 동판에 새긴 한글 화엄경도 볼 수 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이후 조선 세조가 예종에게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思孝)”을 유언으로 남겼다. 예종은 1469년에 ‘봉선사(奉先寺)’란 사액을 내려 절 이름이 바뀌었고 광릉의 능침사찰이 되었다. 세조는 왕권 강화와 토지제도 정비, 불교서적 간행 등 백성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긴 호불 군주로 ‘조선의 아쇼카왕’이라 말할 수 있다.


봉선사 일주문.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 편액이 젊은 방문객들 더 반갑게 한다.


‘삼해탈’ 일주문

봉선사 일주문을 바라보면 ‘어! 한글이네’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앞의 ‘운악산 봉선사’ 한글 편액과 뒤에 ‘교종본찰 봉선사’란 한자 편액을 볼 수 있다. 일주문만 보아도 봉선사는 불경의 한글 역경사업의 중심도량임을 알 수 있다. 봉선사는 조선 명종6년(1551) 허응당 보우스님의 목숨을 건 선교양종의 승과 부활로 교종의 으뜸사찰이 되었다. 일주문은 삼문(三門)으로 4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운 것은 흔들림 없는 수행으로 삼독심을 버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표현했다. 대웅전에 걸린 특이한 한글 편액 ‘큰법당’에서는 불경의 한글화에 크게 이바지한 운허·월운스님의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내부에는 한글 <화엄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 벽을 이루었다. 6·25전쟁으로 타버린 법당은 철근 콘크리트를 구조이지만 전각의 전통성을 잘 표현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범종을 치는 이유


봉선사 범종. 예종의 지극한 효심을 볼 수 있는 강희맹의 글이 눈길을 끈다.


범종각에는 예종의 지극한 효심이 느껴지는 보물 범종이 있다. 범종에는 1469년 조선 시문서화의 4절로 꼽히는 최고의 문장가 강희맹의 글이 새겨져 있다. “범종이란 불도 수행 기구의 가장 으뜸이 되는 것으로서 그 소리가 웅장하여 위로는 하늘 꼭대기에, 아래로는 지옥까지 미쳐 육도에 들린다. 색계 18천의 하늘 아가니타왕까지 이 범종이 크게 울려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나니 지금 이 범종으로 하루 여섯 번 경책하면 악도에 윤회하는 것을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광릉에 크게 울려 문득 부처님의 지혜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를지언정 이 공덕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봉선사 중창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또 이 범종 소리로 세조대왕이 깨달음을 이루고 28중생세계(지옥, 아귀 축생, 인간, 욕계6천, 색계18천)가 윤회를 그쳐 극락에 이르길 발원하였다. 이처럼 새벽에 28번 범종을 치는 것은 28중생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범종은 높이 238㎝, 입지름 168㎝의 큰 동종(銅鐘)으로 조선 범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용뉴에는 위엄이 넘치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며 여의주를 잡고 있다. 사방 4곳의 연못에는 각 9개씩 36개의 연꽃봉오리가 도드라져 있어 밀교의 37존불을 형상화했다. 연못 사이에는 4명의 보살이 서 있고 그 밑에는 육자대명왕진언, 파지옥진언을 범어(梵語)로 새겼다. 아래 중첩된 물결무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가는 것을 나타냈다.


산신, 칠성, 독성 세 가족을 한 지붕아래 모신 봉선사 삼성각. 산령각, 북두각, 독성각 세 편액이 함께 걸려있다.


북두칠성은 7여래로 변하여…

큰 법당 서쪽 언덕에는 1926년에 건립된 삼성각이 있다. 6·25전쟁을 견뎌낸 산령각, 북두각, 독성각은 한 지붕 밑에 세 가족처럼 한 전각에 산신, 칠성, 독성을 모셨다. 가난했던 시절 초가삼간에 부모님 모시고, 처자와 함께 살았던 정이 묻어난다. 처마 끝 풍판(風板) 안쪽에는 청룡이 힘차게 날고 운악산 백호가 긴 꼬리를 흔들거리며 늠름하게 봉선사를 지키고 있다. 북두각에는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가 금륜을 왼손에 들고 인간의 수명과 복락을 관장한다. 북두칠성은 칠여래로 변하여 중생을 살피고, 치성광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연꽃 위에 해와 달을 들고 있다. 원유관 위에 흰 점으로 별을 표시한 칠원성군이 있다.

그 옆의 독성각에는 빈도라발라타사 즉, 나반존자 불화가 있다. 독성의 모습은 오른손에는 불로초를, 왼손에는 긴 석장(錫杖)을 들고 반석 위에 앉아 있다. 탈속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배경으로 붉은 태양과 상서로운 구름, 천태산의 소나무, 학, 모란꽃과 호랑나비, 새, 황룡, 거북, 동자, 동녀, 신선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동녀가 안은 학과 바다 속 거북이가 흰 기운을 뿜으며 서로 입을 벌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 옆에는 오랜만에 동자의 호리병 속에서 나온 황룡이 검은 구름을 일으키며 신나 한다.

봉선사에는 음식 이야기가 전한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보면 박술은 구걸하기 위해 봉선사를 들렀다. 때마침 경기감사가 오니 봉선사는 진수성찬을 올렸는데 거지 박술이 절 뜰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남산도 더는 높지 말고, 한강도 더는 깊지 말며, 감사께서도 더는 배부르지 말고, 걸인도 더는 배곯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공이 먹다 남긴 것이라도 얻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감사는 웃으면서 음식을 내주었다고 한다. 부족하지도 말고 넘치지도 않는 행복한 세상은 ‘보시’에 있음을 말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춘원 이광수가 봉선사로 간 이유는?


‘청법가’ 작사가이기도 한 춘원 이광수 기념비. 봉선사 입구에 있다.


봉선사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감성적 천재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일제강점기에 불교문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1922년 석왕사에서 <화엄경>, 1923년 금강산에서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불경을 읽고 더욱 불교에 심취하여 <이차돈의 死>(1935), <꿈>(1938), <무명>(1939), <사랑>(1939), <원효대사>(1942) 등 많은 불교관련 소설을 집필했다. 해방이 되자 춘원은 팔촌인 봉선사 운허스님에게 의지하여 머물며 지난날의 친일협력에 대한 번민의 돌베개를 베었다. 춘원은 <돌베개>의 서문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갔다”고 했다.

춘원의 시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아쉽게 북으로 끌려간 후 1950년에 생을 마감했다. 깊어가는 가을, 세조대왕, 춘원이광수와 함께 봉선사를 걸어 봄직도 하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