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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가봐야 할 사찰] 우란분절에 생각나는 청도 운문사

백송김실근 2022. 8. 22. 08:00

극락행 반야용선 ‘용가(龍駕)’ 보셨나요?


청도 운문사 비로전 ‘용가’. 운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 비로전 천장 대들보에 달려 있는 용가(龍駕)는 영가천도를 위한 의식구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어렵다.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이 용의 앞머리 고리에 매단 줄을 당겼다 놓으면 용이 좌우로 크게 움직여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가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비로전 천장에 매달린 ‘용가(龍駕)’는 반야용선을

밑에 달린 9개 보령은 극락세계 구품을 표현했다.

용의 앞머리 고리에 매단 줄을 당겼다 놓으면

용이 좌우로 크게 움직여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가는 느낌을 준다. 또 9개의 보령이 일제히 울리면

망자는 이를 신호로 용선에서 내려온 밧줄을 타고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가게 된다는 것을 표현했다.

 

청도 운문사 입구 소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구불구불 자연미 넘치는 푸른 소나무는 사찰을 지키는 용 같기도 하고 금강역사, 사천왕 등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무수한 신중들처럼 느껴진다. 멀리 호랑이가 웅크린 기상인 호거산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평지 가람에 운문사가 있다. 이런 까닭에서일까? 운문사에는 일주, 금강, 천왕문이 없다. ‘호거산운문사(虎踞山雲門寺)’ 편액이 걸린 운문사 정문, 범종 누각을 마주하게 된다.

저녁예불 무렵 운문사를 참배하면 사물(四物)의 울림과 스님들의 청아한 예불을 보너스로 들을 수 있어 좋다. 특히 법고(法鼓)의 우레와 같은 울림은 육근(六根)을 맑혀 무아지경(無我之境)의 환희삼매(歡喜三昧)에 들게 한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설법을 하신다는 것을 안 파사익왕은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며 설법하는 곳에 이르자 부처님은 아난에게 큰 법고를 치라고 이르시고 법을 설하기 시작하였다.”(<대법고경>) 법고를 울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당당하고 우렁차서 미혹의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옛 절터 작갑사(鵲岬寺) 유래를 짐작케 하는 작갑전의 통일신라 석가모니불과 사천왕상.
작갑전 석가모니불과 사천왕 석주는 …

운문사에 처음으로 법고가 울린 것은 <삼국유사>권4 의해5 ‘보양이목(寶壤梨木)’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운문사의 창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연선사가 1277년부터 5년간 운문사 주지로 머물며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고, 운문사의 역사를 고증했다.

“보양선사는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던 길에 서해의 용왕이 용궁으로 맞아들였다. 선사가 경(經)을 설하자 용왕은 금란가사를 바치고 아들 이목(璃目)이 선사를 시봉(侍奉)토록 했다. 용왕이 당부하길 ‘지금 세 나라에 난리가 일어난 것은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었기 때문이오.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鵲岬)에 절을 세우면 몇 년 안에 반드시 어진 군주가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라고 했다. 돌아와 까치가 땅을 쪼는 곳을 파보니 벽돌이 나와 탑을 세우고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다. 얼마지 않아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전답 500결을 바쳤다. 청태4년 정유년(937)에 왕건이 ‘운문선사(雲門禪寺)’란 사액(賜額)을 내리고 부처님의 신령스런 음덕을 받들었다.”

이러하듯 운문사는 옛 절터에 새로이 작갑사를 지었고 오늘의 운문사가 되었다. 이러한 삼국유사 이야기를 증명하듯 현 작갑전에 모셔진 통일신라시대 석조 석가모니불과 사천왕 석주는 당시 전탑 속에 모셔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금당 앞 장명등(석등)과 부처님을 외호하는 사천왕·팔부중·십이지상이 표현된 비로전 앞 석탑 2기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어 옛 절터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운문사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상징하는 천연기념물 소나무.
천연기념물 소나무, 법신불 아닐까?

운문사 경내는 조용하고 모든 것에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하다. 이곳은 스님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곳이라 그런지 범종루를 들어서면 커다란 처진 소나무가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닮은 듯 맑고 푸른 기운을 뿜어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소나무는 수령 약 500년, 둘레 약 3m, 높이 10.3m 크기로 사방 10여 m씩 뻗어 나간 모습이다. 삼월삼짇날 막걸리 열두 말을 보약으로 드시는 멋진 소나무는 곧 법신불이다. 옆 만세루(萬歲樓)는 많은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200여 평의 누각으로 문을 달지 않아 시원스러운 소통의 멋을 풍긴다. 수많은 기둥은 호법선신들이 호위하는 듯 서 있고 지붕의 대들보는 용들이 날아다니는 듯 휘어져 운치가 있다.


비로전 앞 삼층 석탑(불탑)과 석등(장명등).
운문사 最古 전각 비로전 그리고 ‘용가’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655년에 건립되어 운문사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런데 운문사 비로전 천장 대들보에는 특이한 조형이 달려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용가(龍駕)인데 우란분재일 등 영가천도를 위한 의식구(儀式具)이다. <대장일람집>에서는 극락세계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경전을 받아 지녀서 4구(句)를 취하고 성인과의 훌륭한 인연을 지어서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면 반드시 반야선(般若船)을 타야 하리라”고 했다.

천장에 매달린 용가는 반야용선을, 밑에 달린 9개의 보령(寶鈴)은 극락세계의 구품(九品)을 표현하였다. 용의 앞머리 고리에 매단 줄을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이 당겼다 놓으면 용이 좌우로 크게 움직여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가는 느낌을 준다. 또 9개의 보령이 일제히 울리면 망자는 이를 신호로 용선에서 내려온 밧줄을 타고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가게 된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런데 용(龍)과 ‘오르다’, ‘타다’의 뜻을 지닌 가(駕)가 합하여 ‘용으로 오르다’는 뜻의 용가(龍駕)인데 ‘용으로 만든 시렁, 횃대’란 뜻의 용가(龍架)로 쓰고 있어 불교적인 의식의 의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횃대의 뜻이라면 굳이 용의 모습이나 9개의 보령을 달아둘 필요도 없고, 횃대에서 내려온 밧줄에 사람이 타고 오르는 모습도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망자가 반야용선에 올라타는 것을 의미한 용가(龍駕)로 써야 한다. 또 용선에 오르려는 망자를 악착같이 반야용선에 오르려고 한다고 해 ‘악착보살(齷齪菩薩)’이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잘못된 표현이 아닐까? 망자를 극락으로 보내고자 하는 가족들의 바람을 무시한 말인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어떻게 극락을 악착같은 마음으로 갈 수 있겠는가. 망자의 선업과 가족의 정성스러운 기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7월 보름, 백중날은 선망부모를 위해 자식들이 우란분재를 올리는 날이다. 스님들은 천도의식으로 여러 부처님과 지장보살, 인로왕보살 등 여러 불보살을 이 자리에 모셔서 공양을 올린다. 또 지옥문을 열고 보령을 흔들어 아귀 등 혼령을 불러 이 자리에 청한 후 일곱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새로운 몸을 받아 반야용선에 올라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용가라는 조형에 담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